139화
“네가 없어서...”
“......”
“내가 눈을 떼서, 잠들어서, 그래서 네가 없어진 줄 알고...”
“......”
“다, 다 끝난 줄 알아서...”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최홍서의 몸통을 휘감은 길고 강인한 팔은 힘 조절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무게나 기운이 상대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전혀 모른 채 친근감의 표시로 사람에게 달려드는 맹수 같았다.
뻐근한 통증이 흉곽에 느껴졌고, 코만으로는 충분한 산소를 들이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최홍서는 그에게 놔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 위로 턱을 치켜들고 입을 벌려 열심히 숨을 들이쉬었다.
팽팽하게 긴장한 근육들이 사납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맨 등에 팔을 둘렀다. 피부 위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상황을 파악해 보려 애썼다.
이보다 더 강한 힘으로 껴안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이해성은 이번엔 고개를 숙였다. 품속에 있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닿아 있기 위해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옆자리는 비어 있고, 핸드폰이나 다른 소지품은 그대로인데... 아침에 너를 봤다는 사람도 없고...”
“......”
“끔찍했어.”
이해성은 몸통을 들썩거리며 웃었지만, 유쾌하고 즐거운 그런 웃음은 물론 아니었다. 공포에 압도되어 그것을 떨쳐내기 위한 억지웃음에 가까웠다. 불안정하고 경직된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한숨 섞인 공허한 목소리로 그가 무너지듯 고백했다.
“제발... 네 영혼이 떠나버린 게 아니기만을 빌었어.”
“아...”
최홍서의 입술에서 신음 같은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잠자리에 들었던 허술한 차림 그대로 해변까지 달려 나온 이유가 명확해졌다.
한순간 최홍서가 입은 카디건을 꽉 움켜쥐었던 그는 팔의 힘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자신의 몸에서 약간이라도 최홍서를 떼어놓는 것이 불안한 듯 내키지 않는 얼굴로 여러 번 멈칫거리면서.
식은땀이 밴 찬 손이 양 볼을 감쌌다. 익숙한 각도로 턱을 들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홍서지?”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하지만 이해성에게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았다.
“아직 홍서 맞는 거지?”
최홍서는 얼굴을 감싼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홍서예요. 홍서 맞아요.”
이번에는 이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게 웃어 보이는 그의 입가가 잘게 경련했다. 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내가 너무 과민 반응했다. 그치?”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과민 반응 아니에요. 말도 없이 나와서, 제가 나빴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
한동안 두 사람 모두 침묵했다. 최홍서가 말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던 과거의 그 한순간을 상기하면서도, 둘 중 누구도 그것을 드러내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잔잔하고 일정한 파도 소리와 약간은 쌀쌀한 바닷바람이 불안한 침묵을 메워주었다.
그의 벗은 상체가 너무 추워 보여서 최홍서는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과 어깨, 팔 위를 쓰다듬었다. 이해성이 그런 최홍서의 양 손목을 꽉 붙잡으며, 추락해 깨져버린 것 같은 얼굴로 속삭였다.
“그래, 다시는 그러지 마. 다시는 안 그러면 돼.”
그대로 서서 얼굴을 몇 번 더 쓸어내린 이해성은 최홍서의 손을 찾아 쥐었다. 폭이 넓은 손바닥이 틈 없이 밀착해왔다.
“갈까? 아침 먹고, 하이킹 가야지.”
절벽을 따라 이어진 계단은 폭이 좁고 가팔라 두 사람이 나란히 오를 수는 없었다. 손을 잡고 앞뒤로 걷는다는 게 불편했지만, 이해성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했다. 손을 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예정보다 좀 일찍 일어나긴 했지만, 어차피 늦은 오후에 비 소식이 있으니까. 마침 잘됐지. 빨리 다녀와서 오후에는 느긋하게 보내는 게 좋겠어.”
그는 평소보다 훨씬 말이 많았다. 괜찮아졌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 같았지만, 경직된 어조와 상기된 목소리는 역으로 그의 불안정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뒤로 뻗은 이해성의 손을 잡고 뒤따라 계단을 오르던 최홍서는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계단을 디디는 그의 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맨발이었다. 젖은 잔디의 물기와 계단의 흙먼지, 해변의 진흙과 모래가 튀어 올라 세로줄 무늬의 푸른색 파자마 종아리 부분이 엉망이었다.
상의를 챙겨 입지도 못했을 만큼, 신발을 신을 생각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스스로 설명한 것보다 더 끔찍한 공포를 느꼈던 것일지도 몰랐다.
넓은 저택 이곳저곳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해성의 모습이 그려졌다. 평소의 차분함과 초연한 태도를 완전히 놓쳐버린,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며 공포에 질린 한 남자의 모습.
솨아아아아.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자, 그때까지 의식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한순간 문득 청각을 사로잡았다. 그 어떤 힘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강인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끌어 내려 잔디 위를 디딘 그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이든 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고, 세상을 소유한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최홍서는 앞에서 이끄는 그의 손을 반대로 잡아당겼다. 뒤로 당기는 힘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괜찮은 척해도, 그 얼굴은 여전히 충격으로 얼얼했다.
“처음엔... 내가 미친 줄 알았어요.”
“......”
“죽은 최홍서가 다른 사람의 몸속에서 깨어났다는 것보다는... 사실 나는 윤혜안인데 스스로를 최홍서라고 착각하면서... 그렇게 미쳐버린 거라고 생각하는 게, 그게 차라리 더 그럴듯한 일이니까요.”
최홍서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커졌다. 어제부터 계속 둘 모두 암묵적으로 피해왔던 화제였으니까.
“근데 그러면... 최홍서에 대한 내 기억이 다 엉터리여야 하는 거잖아요.”
“......”
“미친 사람의 뇌가 지어낸 망상이라고 하기엔, 모든 기억이 다 너무 자세하고 생생해서... 아저씨 생각밖엔 할 수 없어서...”
여전히 꽉 붙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이 떨구어졌다. 울음을 제거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그의 맨발이 다가와 최홍서의 뒷머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눌렀다.
“홍서야, 그만 얘기해도 돼. 힘들어하면서 지금 굳이 얘기할 필요 없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나도 무서워요.”
“......”
“아저씨를 다시 가까이에서 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다음부터는... 계속 더 무서웠어요.”
피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윤혜안의 몸을 언제까지 빌릴 수 있는 건지... 내 혼은 떠나고 윤혜안의 혼이 돌아오거나, 아니면, 윤혜안이 의식불명이었던 상태로 돌아가거나... 그렇게 해서 내가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지...”
“그런 얘긴 입 밖에 내지도 마! 네가 없어지긴 왜 없어져!”
이해성이 최홍서의 양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최홍서는 그의 눈 속에서 두려움을 보았다. 두렵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던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다.
“아저씨를 위한 게 뭔지 둔한 머리로 열심히 생각해 보려 했었지만...”
“......”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아저씨를 보고서야 후회했어요.”
최홍서를 흔드는 것을 멈춘 이해성의 손이 이번에는 그 어깨를 꽉 움켰다.
“어떤 끔찍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더라도, 남아서, 그 고통 속을 함께 통과해야 했었다는 걸.”
“......”
“다시 또 후회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기회가 있을 때 말해야 해요.”
“......”
“사랑해요.”
최홍서의 어깨에서 이해성의 손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 외에는 어떤 움직임도 그에게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최홍서를 찾아 헤맸던 조금 전의 충격을 완전히 잊은 듯했다. 새로운 충격이 이전의 충격을 덮어씌운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 외에 무언가를 더 얹고 싶었다. 그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깊이 사랑한다는 과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보다는 더 복잡한, 빛과 어둠을 번갈아 덧바른 주제가 불명확한 추상화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어려운 감정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랑한다고, 한 번 더 말하려는 순간 그가 다가왔다.
그토록 격정적으로, 거의 폭력적일 만큼 강한 힘으로 끌어안았던 이해성은 이번엔 반대로 아주 조심스러웠다. 가슴 앞에 가슴을 가만히 맞대듯이 다가와 어깨 위를 스치듯 감쌌다. 살아있는 생명을 호흡하는 입술이 귓가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 넣었다.
“없어지지 않아.”
“......”
“절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
아주 나지막한 속삭임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더 이상 공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귓바퀴 위를 꾹 누른 뜨겁고 거친 입술이 관자놀이를 따라 옮겨왔다. 입술은 눈꺼풀 위를 누르고, 콧대를 따라 미끄러졌다.
“아...”
그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알아챈 최홍서가 탄식하며 입술을 벌린 순간, 벌어진 틈 사이로 그의 입술이 맞물렸다. 몇 번이나 번갈아 가며 서로의 입술을 머금었다. 윗입술이 그에게 먹힌다 싶으면, 다음 순간엔 최홍서 자신이 그의 윗입술을 물고 있었다. 벌어졌다 다물어지기를 반복하며 폭신한 살점을 약하게 압박해 빨고, 입술 뒤쪽 점막의 젖은 부드러움을 교환했다.
보석의 파편처럼 반짝이는 태평양과 그 미지의 먼바다에서부터 불어온 바람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서로를 확인하고 보듬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와 키스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에게 도달했다는 안도감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쪼옥. 달콤한 효과음과 함께 이해성의 입술이 살짝 물러났다. 코끝을 비비면서도, 그의 시선은 최홍서의 입술을 향하고 있었다.
“하이킹, 꼭 가고 싶은가?”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고, 고개를 저을 때마다 서로의 코끝이 스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고, 제안이나 동의의 과정도 불필요했다. 손을 잡고 저택까지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