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최홍서란 사람은 굽히고 들어갈 때조차도 꿋꿋해 보이는, 궁금하게 만드는 어떤 심지가 있는 사람이었거든. 저 사람이 지금 무엇을 위해서 거짓 웃음을 짓고 자기를 감추면서까지 비위를 맞추고 있는 걸까...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런 궁금증을 자극하는 사람.”
턱선을 훑던 그의 손이 귓가로, 머리카락 안으로 깊숙이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귀를 스칠 때마다 짜릿함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대신 와인을 들이켰다.
“그런데 보고받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내가 느낀 윤혜안은 그 반대였거든.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쉽게 알 것 같았고, 눈빛에는 권태가 가득해서 어떤 열정도 느껴지지 않았어.”
어느새 세 번째 잔도 비워낸 이해성은 자신의 몫과 최홍서의 잔에 와인을 좀 더 채워 넣었다.
“그리고 난 스스로 사람 보는 눈을 상당히 믿는 편이거든. 아무리 화면을 통해 걸러진 모습이라도 그 정도의 안목도 없이 이 자리에 있을 순 없으니까.”
새로 채운 잔을 가볍게 흔든 그는 잔을 기울여 와인 향을 맡았다.
“그런데 부딪쳐볼수록, 실제의 윤혜안은 그런 사람 같지가 않은 거야.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보고 있는데도, 보고서의 내용이 뭔가 잘못됐다고 느낄 만큼.”
와인을 마신 그의 얼굴이 최홍서를 돌아보았다.
“영상 속에서 그렇게 단조롭고 거만하고 권태로워 보였던, 아무런 궁금증도 자극하지 못했던 표정이... 나를 자꾸 흔들잖아. 뒤쫓고 싶고, 뒤쫓아서 나를 보게 만든 다음,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유를 캐고 싶어지는 얼굴.”
“......”
“...최홍서처럼.”
스스로 꺼낸 얘기가 쑥스러웠는지 그는 작게 코로 웃으면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카펫 위를 내려다보던 눈이 다시금 따스한 빛을 가지고 최홍서를 담아냈다.
“그리고, 이젠 내 눈에도 예전의 너와 지금의 네가 서로 닮아 보여.”
최홍서와 윤혜안이 아니라, 예전의 너와 지금의 너. 그의 표현은 그토록 세심했다.
다가온 그의 손이 또 한 번 뺨 너머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볼 위를 문지르는 엄지와 내려다보는 눈빛에서는 어떠한 망설임이나 꺼림칙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온종일 함께 있으면서 그에게서 그런 기척을 감지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결국, 이목구비의 생김새 자체보다는 인상이 더 중요한 거겠지.”
“......”
“인상이란 건 단순한 생김새 이상의 무언가잖아. 지문 같은 거지.”
“그럼 왜...”
“응?”
“아니, 아니에요.”
최홍서는 애써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겉모습이 달라진 것도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다면... 그럼 왜 키스하지 않는 거냐고.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연인의 바뀐 모습에 적응해야 하는 쪽은 이해성이었지, 최홍서 자신이 아니었다. 그를 위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내심에는 자신도 있었는데. 왜 이렇게 조급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다시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이해성이 최홍서의 팔을 당겼다. 그 힘에 이끌려 엉거주춤 끌려간 최홍서는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갤러리에서 한참 울었을 때처럼, 등에 그의 가슴이 닿아 있었다.
“음.”
읏차, 힘주는 소리와 함께 이해성이 뒤에서 최홍서를 끌어안았다. 한 팔은 윗가슴을 가로지르고, 한 팔은 아랫배에 둘러졌다. 키스고 뭐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턱 끝이 어깨 위를 지그시 눌러왔다. 목덜미와 아래턱, 왼쪽 귀가 온통 그와 맞닿아 있었다.
“가스파르에게 질투했었다고 말해줘.”
단둘뿐인 거실에서, 그는 문득 귓속말하듯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최홍서는 와인 잔을 꽉 붙잡았다.
그의 높은 코끝이 귓불을 건드리고, 성감대에 그의 숨결이 닿자 온몸이 성욕으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섹스는커녕 키스조차 아직은 망설여진다면, 그럼 이런 식으로 몸을 달구지 말아주기를 바랐다.
가슴 앞을 가로질러 어깨를 감싼 그의 팔을 왼손으로 꽉 붙잡았다.
“질투...했어요.”
“정말?”
그런 남자가 그의 키스를 받고, 애무를 받고, 그와 함께 침대 위에 뒤엉켜 있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껴봤었다. 유럽 어느 나라의 왕자님이나 귀족 같았다고. 차마 그렇게까지 솔직하게는 얘기하고 싶지 않을 만큼.
“친구로 지내는 것도 싫다고... 떼쓰고 싶을 만큼. 질투했어요.”
“......”
코끝으로 귓불을 비비던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놀란 것 같았다.
하아... 잠시 뒤 달콤한 한숨과 함께 그의 이마가 최홍서의 어깨 위에 툭 얹어졌다. 아랫배를 감싼 그의 팔이 몸통을 꽈악 조여왔다. 엉덩이 사이에 닿아오는 그의 성기의 뜨거운 부피감을 외면하기 위해, 이번에는 최홍서가 화제를 바꾸었다.
“현수랑... 또 무슨 얘기 하셨어요?”
얼굴을 일으켜 턱 끝으로 어깨를 꾹꾹 누르면서 그가 대답했다.
“윤혜안이 최홍서 흉내를 내면서 정보를 캐고 다닌다고 생각했을 때니까. 네가 송현수를 만나러 ‘제시카’에 나타났었다는 얘기를 듣고 너에 대해서 물어봤었지.”
“......”
“물론 넌, 그냥 친구가 보고 싶어서 갔던 거겠지만.”
그 시기의 오해들을 돌이켜보며 이해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좋은 사람인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지만. 좋은 친구더라. 송현수.”
붙잡은 그의 팔 위를 쓰다듬으면서,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울지 않으려 양쪽 턱에 꽉 힘을 주었다.
“명도훈을 죽여 달라고 했어.”
“...네?”
믿기지 않는 얘기에 저절로 목이 돌아갔다. 어두워진 눈빛의 이해성이 가까운 거리에서 최홍서의 눈을 침착하게 들여다보았다.
“나를 뒤쫓아와서, 명도훈을 죽여 달라고 악을 쓰더군. 그래야 네가... 눈을 감는다고.”
최홍서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해성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눈빛이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이해성은 그런 최홍서의 손에서 와인 잔을 가져가 카펫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미안. 아직 이런 힘든 얘기들은 하지 말자.”
머리카락 위에, 그가 입술을 꾹 눌렀다.
서서히 공기가 식는다고 느꼈는데, 벽난로 안에서 모닥불이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사그라져 스러지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한참 그의 팔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다 최홍서는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그는 한 침대에서 자기가 꺼려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런 얘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겠지. 이 자리를 파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는 자기가 먼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잘까요? 내일 하이킹도 가기로 했잖아요.”
그는 자신의 손목시계 대신, 최홍서의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트윈 베드룸도 있던데. 우리 같이 그 방을 쓰는 게 어때요?”
“......”
“처음 아저씨 집에서 자고 갔던 날. 그날도 그런 방에서 잤었잖아요.”
“그랬었지.”
“그때로 돌아간 것 같고 좋잖아요.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으로.”
쇄골 앞을 껴안은 이해성의 팔을 툭툭 두드린 최홍서는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해성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말했잖아요. 아저씨가 완전히 확신하게 될 때까지 상처 안 받는다고.”
“......”
“무리하는 게 더 싫어요.”
최홍서에게 잡힌 손을 위로 뻗고 앉은 채로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이해성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그러다 한참 만에 최홍서가 당겨주는 힘에 의지해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단둘이서만 있는 것처럼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는 한국에서부터 동행한 자신의 수행원들에게 그렇게 부탁했다고 했었다. 그 말 그대로, 2층의 게스트 침실로 갈 때까지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수행원이 세탁 후에 건조까지 해준, 오늘 구입한 파자마를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누워서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했던 고민이 무색하도록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그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을 느꼈지만, 그것이 꿈인지 아닌지 확인할 새도 없이 다시 또 깊은 잠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럴 만도 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진 하루였으니까.
■
전날에 이어 숙면을 취한 덕분인지, 최홍서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아기처럼 깊이 잠들었던 만큼 오래전부터 깨있었던 것처럼 번쩍 눈이 떠졌다.
가슴과 배 위를 누르고 있는 묵직한 팔, 가까이 느껴지는 체온과 숨결에 흠칫 놀란 후에야 이곳이 어디인지를 떠올려냈다.
“......”
최홍서를 품에 가두고, 이쪽을 향해 모로 누운 이해성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가 언제 이 침대로 옮겨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어젯밤 잠결에 보았던 것 같은 그의 모습이 꿈이 아니었던 건가. 그렇게 앉아서 잠든 나를 지켜보다가 그대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던 건가.
얼굴을 쓰다듬고, 미간의 주름을 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상의를 입지 않은 그의 어깨와 가슴, 팔이 호흡에 따라 부풀었다 꺼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온종일 보고 있어도 지겹지 않을 테고, 온종일 있어도 지겹지 않을 그의 품이었지만... 문제는 다시 또 육체가 그를 원할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는 욕망을 부끄럽게 여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가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성욕이 강했던 건지.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아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그의 팔을 살짝 들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새벽에 그랬던 것처럼 저택은 조용했고,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파자마 위에 두툼한 카디건을 걸친 최홍서는 조용히 앞마당으로 나가보았다.
“하아...”
어젯밤의 강풍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세상은 평화롭고 온통 눈부셨다.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고, 잘게 부순 유리 조각처럼 빛났다.
인피니티 풀 너머 넓게 펼쳐진 잔디밭을 가로질러 해변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어제 빌라에 도착한 뒤, 이해성과 함께 짧게 산책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
베벌리힐스에서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말리부 비치나 푸에르코 비치와 달리, 폭이 좁은 해변은 절벽과 면해 있었다. 요새처럼 오목하게 들어간 해변을 걸으면서 상쾌한 아침 바람에 머리를 비워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해변이 끝나는 곳까지 걸을 생각이었다.
“최홍서, 최홍서!!”
너무나 명확하게 귀에 꽂히는 자신의 이름에 최홍서는 걸음을 멈췄다.
“최홍서!”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자, 가파른 계단을 한 번에 몇 개씩 달려 내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곧 고꾸라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그는 서두르고 있었다.
게다가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벗은 상체에 가운 하나 걸치지 않고, 파자마 팬츠만 입고 있었다. 실내에서는 편하게 있더라도 저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으로 밖을 나올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최홍서의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되돌아가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최홍서!”
최홍서의 모습을 이미 발견했으면서도, 계단을 전부 내려온 그는 성대를 찢을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 단지 멀리 있는 사람의 주의를 끌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 정도가 아니었다.
최홍서는 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반대로 그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다가오는 최홍서를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터덜터덜 내딛는 그의 얼굴은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열 발자국 정도를 남겨두고 다시 걸음을 늦춘 최홍서는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을 구석구석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까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
두 걸음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그가 팔을 뻗어왔다. 최홍서의 어깨 뒤쪽을 붙든 손이 낚아채듯 자신의 품속으로 확 끌어당겼다. 다른 한 팔이 숨통을 끊을 것처럼 몸을 꽈악 조였다. 펄떡거리며 뛰는 가슴과 가슴이 꽉 맞닿았다.
“네가 없어서...”
“......”
“내가 눈을 떼서, 잠들어서, 그래서 네가 없어진 줄 알고...”
“......”
“다, 다 끝난 줄 알아서...”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횡설수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