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컴백 (137)화 (137/185)
  • 137화

     타닥. 타닥. 타닥.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에서 불티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정이 지난 말리부의 깊은 밤, 섭씨 10도 아래로 기온이 내려가면서 제법 쌀쌀해졌고, 저녁 식사를 마친 이해성과 최홍서는 벽난로 앞에 앉아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파가 아닌 카펫 위에 앉아 화이트 와인을 홀짝거리며 예전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오래전 이별한 뒤 서로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우연한 재회를 계기로 다시 사랑을 이어가게 된 연인들처럼. 추억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왜 안 믿어주는 거지? 알수록 더 좋아하게 된 건 맞지만, 첫눈에 반한 것도 사실인데. ”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한 다리는 길게 뻗은 이해성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장난을 치는 과장된 표정에 최홍서는 실없이 웃음이 났다.

     “아웃포커싱 됐다고 얘기했었잖아. 주변이 다 흐릿해졌으면, 그럼 얘기 끝난 거 아닌가?”

     강우현 감독의 자택 2층 응접실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을 되짚어 보던 중, 서로의 첫인상에 대한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그거야, 나중에 덧붙인 얘기일 수도 있으니까...”

     최홍서는 와인잔을 입술로 가져가면서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럼 홍서는? 나를 과묵하고 무서워 보이는 VVIP라고 생각했다며. 그게 더 나쁜 첫인상인데?”

     “특이하다고도 했잖아요.”

     “음... 좋은 의미로 들리진 않던데. 그거, 이상하다는 뜻 아닌가?”

     혼잣말하듯 고개를 갸웃거린 이해성은 잔을 한 바퀴 빙글 돌린 뒤 와인을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최홍서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농담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서.

     그 미소에 미소로 마주 답한 최홍서는 막 비워낸 잔에 와인을 따르는 이해성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벽난로 안에서 타는 불길이 그의 얼굴 위에서 주황빛으로 일렁거렸다. 거실 한구석의 스탠드 조명에만 은은하게 불을 밝혀두어, 모닥불의 온기와 빛깔이 더욱 따스하게 부각되었다.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가.

     우주에서 육체와 목소리도 없이 무형으로 존재했던 기억보다 이 순간이 더 꿈결 같았다.

     그의 곁에서, 최홍서로 인정받으며, 둘만이 기억하는 예전 이야기들을 나누는 이 시간. 감히 기대하지도 못했고, 다시 돌아오지도 않을 시간이었다.

     3분의 1쯤 잔을 채우고 와인병을 다시 아이스버킷에 꽂아두는 그의 조용한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최홍서는 자신의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저씨는... 연기를 보자고 했으니까.”

     “응?”

     “다른 사람들처럼 섹시한 춤을 춰보라거나 술을 따르라고 하지 않고. 아저씨는 연기를 보자고 했잖아요.”

     “......”

     “그래서 기억에 남았어요. 나를 배우로 대우해 줘서.”

     최홍서 자신도, 그리고 이해성도, 단지 즐거웠던 추억에 젖고 싶은 것만이 아님을 알았다. 과거의 구석구석을 화제로 삼으면서도 두 사람 모두 불편한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 얘기들은 철저히 피하고 있었으니까.

     이서경이나 명도훈, X군 스캔들, 그리고 최홍서가 지나가야 했던 고통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소재들은 화제에서 철저히 제외되고 있었다.

     소월로를 걸었던 첫 데이트를 얘기하면서도 그날 재회했던 파티의 호스트였던 또 다른 재벌 얘기는 생략되었고, 첫 만남을 얘기하면서도 당시에 최홍서를 희롱했던 조 사장은 언급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최홍서의 발언은 암묵적으로 유지되고 있던 규칙을 깬 것처럼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야기 소리가 그치자, 말리부의 절벽으로 달려와 부딪치는 태평양의 웅장한 파도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밤에는 육풍이 불기 마련이라지만 바람이 강한 날에는 그런 공식이 소용없었다. 넓은 잔디와 인피니티 풀을 갖춘 앞마당과 이어지는 하얀 유리문이 사나운 바람에 덜컹거렸다.

     한순간 멈칫했던 이해성은 최홍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감하고 위로하듯 아프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어조를 바꾸어 화제를 전환했다.

     “좋아, 첫눈에 반한 게 아니라고 쳐도 상관없어.”

     선심 쓴다는 듯, 그는 혀를 차며 가볍게 굴었다. 그리고 상체를 기울여 최홍서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그럼 앞으로 예전 얼굴과 달라졌다는 이유로 내 앞에서 위축될 필요도 없는 거지?”

     “왜 얘기가 그렇게 돼요?”

     “얘기가 그렇게 되지. 내가 얼굴 때문에 홍서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는 증거일 테니까.”

     소파의 하단에 느슨하게 등을 기대면서 그는 와인을 좀 더 마셨다.

     최홍서는 기억을 더듬었다. 연습 후 땀을 잔뜩 흘린 꼬질한 모습을 보고도 귀엽다고 하거나, 무대에서의 모습을 멋있다고 하거나... 그는 그런 믿기지 않는 칭찬을 자주 했었다. 하지만 그러고 보면 어떤 외모이기 때문에 마음에 든다는 식의 얘기는 한 적이 없었다. 미소나 눈빛, 표정을 얘기할지언정 어떤 생김이 마음에 든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두 잔을 비울 동안 한 잔도 채 비우지 못한 와인 잔의 스템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최홍서는 맥주를 마시듯 서너 모금을 꿀꺽꿀꺽 삼켜냈다. 눈을 크게 뜨고 놀라서 쳐다보는 이해성을 마주 보면서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냈다.

     “원래 제 외모가 아저씨 이상형이 아닌 건 알아요.”

     “이건 또 무슨 모함일까?”

     “예전에 사귀었던 분... 저도 봤으니까.”

     “음?”

     그의 한쪽 눈썹이 삐죽 치켜 올라갔다.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영화 제작 결정되고 강 감독님 댁에서 파티했을 때요. 아저씨 턱시도 입고...”

     “......”

     “우리, 사, 사귀기로 했던 날요.”

     그 말 끝에는 와인을 좀 더 마셔야 했다. 사귄다, 연인, 남자 친구... 그런 표현들은 최홍서에게 키스나 다른 스킨십보다도 더 간지러운 감촉을 전해주었다.

     “아, 가스파르?”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이해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파르. 그래, 그런 이국적이고 어딘가 왕자님 같은 이름이었다.

     “그분은 키도 굉장히 크고, 화려한 금발에다... 아저씨보다 많이 어려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이해성이 카펫 위에 잔을 내려놓으며 가슴 앞에서 단단히 팔짱을 꼈다.

     “홍서가 질투했던 가스파르. 물론 기억하지.”

     “질투하지 않았는데요.”

     최홍서가 불퉁하게 부정하자, 그는 팔짱을 낀 채로 허리까지 꺾어가면서 웃었다. 적립 포인트에 충분히 포함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즐거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최홍서다운 모습을 또 하나 발견한 게 분명했다.

     “그랬어요? 질투 안 했어요?”

     “......”

     “가스파르랑 잤는지 안 잤는지, 그것까지 궁금해했으면서?”

     “어린애들도 아닌데, 사귀는 사이였으니까 잤을 거라는 정도는 저도 알아요.”

     짐짓 어른스러운 척, 그 정도는 이해한다는 척 얘기하면서 와인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하지만 물론 그 남자에게 질투했었다. 제대로 된 연애 경험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경험도, 그럴 여유도 없었던 최홍서에게는 처음 느껴본 질투의 감정이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두 사람은 키 차이도, 나이 차이도 이해성과 자기만큼 극심하지 않았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남자였다. 이해성과 동등해 보이는 그 분위기가 부러웠었다.

     자신의 연애 역사에서 최홍서는 특별하다고, 이해성이 여러 번 얘기했었던 데다가 직접 봤던 그의 엑스 보이프렌드도 자기와는 너무 다른 외형과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최홍서는 자신이 이해성의 이상형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왔었다.

     “참 이상하지.”

     소파의 좌석 위로 길게 팔을 걸친 이해성의 손이 최홍서의 어깨 끝에 얹어졌다. 손끝으로 턱선을 쓰다듬는 그와의 접촉에 온몸의 피부가 아프도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닌 척, 최홍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뭐가요.”

     “너와 윤혜안이 닮았다고.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 화가 났었거든.”

     “......”

     “내 눈엔 전혀 닮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일부 사람들이 윤혜안과 닮았다고 얘기한다는 것은 예전에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외모의 생김은 비슷할지 몰라도, 아이돌로서도 배우로서도 이미지는 겹쳐지지 않아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송현수가 그 얘기를 했을 때도 불쾌했었고.”

     현수의 이름이 나오자 최홍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