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컴백 (136)화 (136/185)

136화

 “미스터 리의 오늘 쇼핑을 위해 특별히 유능한 스타일리스트를 급하게 모셨습니다.”

 정문 앞으로 마중을 나왔을 때부터 함께 있었던 까만 단발머리의 동양계 여성이 누구인지, 매니저는 야심 찬 표정으로 소개했다.

 “LA를 기반으로 전 세계적으로 활동 중인 스타일리스트로서, 미스터 리의 훌륭한 안목과 취향을 충분히 만족시켜...”

 “아니, 아니요.”

 이해성은 뭔가 거슬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찻잔을 소서 위에 내려놓았다. 야심 차게 스타일리스트를 소개하고 있던 매니저는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중단했다.

 “내가 아니라, 이쪽.”

 이해성은 곁에 앉은 최홍서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아까 소개를 하면서 분명히 해뒀다고 생각했는데, 내 표현이 부족했던 모양이네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그는 내 파트넙니다.12) 단순한 남자 친구도 아니고, 당신이 은근하게 배제해도 되는 존재는 더더욱 아니라는 거죠. 내가 아니라 그의 기분을 맞춰줘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혹시라도 이해성의 기분을 망치지는 않았을까, 빠르게 눈치를 살피면서 매니저는 이해성뿐만 아니라 최홍서에게도 거듭 사과를 해왔다. 알 수 없는 이해성의 농담을 들었을 때처럼 진땀을 빼는 표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소파에서 일어난 이해성은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고르는 것들을 몇 벌 보고 나면 취향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겠죠. 그는 쇼핑하는 데에 소극적인 편이니까 그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더라도 어울릴 만한 건 전부 포장해 줘요. 얼마가 되든 상관없습니다. 미리 약속했던 금액 이상이라도 얼마든지 지불하죠. 대신, 분명히 그가 마음에 들어 하고 기뻐할 만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유능한 스타일리스트라고 하니 믿고 맡기죠.”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의 말끝에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진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해성과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최홍서를 향하고 있었다. 꾸덕한 질감의 진한 초콜릿케이크를 떠올린 포크를 막 입에 넣고 있던 최홍서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슬그머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체형도 얼굴도 아름다우셔서 뭐든 잘 어울리시겠어요. 스타일링 해드리는 보람이 있을 것 같아서 저까지 기대되는데요?”

 스타일리스트의 그 말을 시작으로 그녀가 최홍서를 위해 미리 골라두었다는 옷과 신발, 소품들이 소개되었다. 직접 고른 것처럼 최홍서의 취향에 꼭 맞는 물건들이었다.

 어떤 물건들은 모델 같은 체형과 얼굴을 가진 남성 직원들이 직접 입고 나와 패션쇼처럼 보여주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 연출하면 좋은지 스타일리스트가 시연을 해주기도 했다. 최홍서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것 같은 물건들은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곧바로 무릎 위에 대령되었다.

 “지금까지 고르신 아이템들로 먼저 착장을 해보시겠어요? 미스터 최의 정확한 사이즈와 체형이 파악되면 훨씬 정확하게 추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스타일리스트와 매니저의 호응에 떠밀리듯 일어난 최홍서는 탈의실로 안내되었다. 옷을 갈아입는 일을 도와줄 직원을 붙여주려 하는 걸 겨우 거절하고 탈의실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벨벳을 씌운 화려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탈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어느 이국의 왕자가 가졌을 법한, 호화롭게 꾸며진 탈의실은 지금 최홍서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보다 더 널찍했다.

 티셔츠와 후드 집업, 바지와 신발, 양말까지... 최홍서가 갈아입을 옷들이 행거와 선반에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태그의 가격을 확인해 보았다. 오버사이즈의 반소매 티셔츠가 1,200달러, 후드 집업이 2,800달러, 바지는 2,300달러, 신발은 그렇다 치고 양말마저 400달러대... 스트리트 무드에 얼핏 편해 보이는 한 벌 착장이 원화로 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직업 특성상 이런 옷들이 세상에 있다는 건 알았고, 화보 촬영에서 입어본 적은 있었지만, 소유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가격 운운하면서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한두 벌 신중하게 고르면 아마 그의 기분도 충족되겠지. 후우, 한숨을 크게 내쉰 뒤 그의 카디건부터 벗어 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갈아입느라 수고하셨어요. 역시! 예상대로 너무 잘 어울리네요! K팝 아이돌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매니저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이해성과 최홍서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짧게 웃었다. 최홍서로서든 윤혜안으로서든, 실제로 K팝 아이돌이었으니까.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이해성이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윤혜안의 옷에서 벗어나 최홍서의 취향대로 입은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감격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집업에 달린 커다란 후드를 씌워주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뺨을 넓게 감쌌다. 최홍서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자신은 고개를 숙였다. 애정이 흘러넘치는 눈빛으로 눈을 맞춰왔다. 주변에 누가 있든 말든, 공간 속에 둘뿐인 것처럼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예쁘네.”

 “......”

 “...우리 홍서.”

 우리 홍서. 그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감지하자마자 최홍서의 눈에 순식간에 물기가 돌았다.

 “예쁘다니까 왜 또 울려고 그래.”

 아니라고, 도리질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이후에는 옷을 입어볼 필요도 없었다. 안락한 소파에 앉아 커피와 마카롱을 먹으면서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만 말하면 그만이었다. 옷, 가방, 신발, 액세서리... 산더미 같은 물건들을 본 것 같았다. 그중에서 신중하게 두 벌 정도를 골랐을 무렵에는 최홍서는 완전히 진이 빠져 있었다.

 곁에 앉은 이해성이 시간을 확인하길래 이제 끝난 거구나, 반가워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제 시계를 좀 보죠. 너무 점잔 빼지 않는... 그에게 어울릴 만한 모델이 있으면 좋겠는데.”

 “마침 미스터 최의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빈티지 모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시되어 있지 않은 상품이고, 소수의 고객님께만 공개하는 아주 희귀한 빈티지죠.”

 시계라는 말에 매니저는 반색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직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잠시 후 직원은 디지털 잠금장치까지 설치된 튼튼해 보이는 작은 트렁크를 가지고 돌아왔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장갑까지 착용한 매니저는 이해성과 최홍서 앞에서 조심스럽게 트렁크를 열어 보였다.

 트렁크는 열 개 남짓한 손목시계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워치 와인더였다.

 “이 모델이 미스터 최의 이미지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떠세요?”

 “음... 난 이쪽이 어울릴 것 같은데.”

 매니저가 권유한 모델은 노란색 다이얼을 가진 시계였고, 이해성이 가리킨 것은 파란색 다이얼이었다.

 “직접 그에게 채워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최홍서의 왼쪽 손목과 오른쪽 손목에 각각 하나씩 손목시계를 채운 이해성은 신중한 표정으로 양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그는 진지했다.

 “두 모델 전부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미스터 최가 고르신 의상들이 대부분 무채색 계열이라 시계의 다이얼로 포인트를 주는 것도 아주 좋을 것 같아요.”

 “홍서는? 어떤 게 더 마음에 들어?”

 “......”

 자신이 사용할 시계를 고르는 건데도 제삼자처럼 한 발 빼고 있었던 최홍서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시계에는 옷처럼 태그가 부착되어 있지 않았지만, 양쪽 손목에 각각 최소한 고급 자동차 한 대의 가격을 차고 있다는 정도는 알았다.

 “아저씨가 하고 싶었던 대로 해요. 나도 그게 좋아요.”

 해주고 싶은 게 있어도 예전처럼 참아야 하냐는 그의 질문에 하고 싶었던 대로 하라고 대답한 건 최홍서 본인이었다. 거절할 명분을 스스로 제거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최홍서의 얼굴에서 그것을 전부 읽어낸 이해성은 웃어버렸다. 그 웃음마저도 즐거워 보였다.

 “못 고르는 것 같으니 그럼 둘 다...”

 “파랑! 파랑으로 할게요.”

 최홍서는 그의 팔을 꽉 붙잡으면서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그래? 추천해 주신 대로 노란색도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파랑, 파랑이 좋아요. 노랑은 별로예요.”

 최홍서는 고개까지 저어가면서 아주 단호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심지어 오른쪽에 차고 있었던 노란색 다이얼의 시계를 스스로 벗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는 파랑이 좋다고 하네요. 이 모델로 하죠.”

 최홍서가 아주 흐뭇하고 기특한 말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직원들에게 자랑하듯 얘기했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다른 직원들 모두 이해성의 말에 즐거운 듯 웃으며 리액션을 보였다. 이번에는 진땀을 빼는 사람이 최홍서뿐이었다.

 “괜찮아. 다들 네가 귀여워서 웃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해성뿐일 것 같았지만, 그런 실랑이를 벌일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드디어 쇼핑이 끝난 것 같았고, 이제 그만 조용한 곳에서 그와 단둘이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소파에 앉아 결제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드디어 차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가 배웅을 위해 뒤를 따랐다. 매장 안에서 몇 시간을 보냈는지 몰라도 그사이 해가 기울어 있었다.

 “어... 저... 이렇게 많이 고르지 않았는데.”

 이해성의 SUV에 쇼핑백을 싣는 직원들을 발견한 최홍서의 눈이 커졌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두세 명의 직원들이 끝없이 쇼핑백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트렁크 공간만으로는 부족해 그들은 뒷좌석까지 점령했다.

 “이상해요. 저 이렇게 많이 고르지 않았어요.”

 “괜찮아. 피곤한데 얼른 앉아서 쉬어.”

 어리둥절해하는 최홍서와 달리 이해성은 태연했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최홍서의 등을 떠밀었다.

 “이상해요. 뭔가 착오가 있는 거 같으니까 확인해 봐요. 응?”

 반쯤 강제로 조수석에 최홍서를 앉힌 이해성은 열린 문 앞에 서서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달칵, 버클을 채운 그는 뒤쪽에 서 있는 매니저에게 뭔가를 달라는 듯한 손짓을 해 보였다.

 “홍서야, 이거 봐. 말리부 들어가는 길에 눈부실 것 같아서 선글라스 하나 미리 빼놨는데. 잘했지? 자, 한 번 써보자.”

 “......”

 보채고 떼쓰는 어린아이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사람처럼 구는 이해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마 조금은 불퉁한 표정이었을 거다.

 선글라스를 씌워주려던 그가 손을 멈추고 물었다.

 “왜.”

 “나 진짜 애기 아닌데.”

 그제야 이해성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작전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열린 문틀의 위쪽을 붙잡고 차 실내로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그가 최홍서의 뺨을 검지로 콕 찍었다. 케이크의 생크림을 찍어 맛보듯이.

 “너에게 어울릴 만한 건 전부 챙겨달라고, 내가 부탁했어.”

 “그...”

 “필요한 건 많고 며칠 뒤엔 우리 귀국해야 하는데, 쇼핑만 하다가 시간 다 보낼 순 없잖아.”

 “그래도... 나, 열심히 골랐는데...”

 “해주고 싶은 게 있으면 참고 아끼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나? 난 분명히 들었던 거 같은데?”

 “......”

 눈썹을 치켜 보이며, 약간은 얄밉게 그렇게 얘기하는 그의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그의 미소를 또 하나 모았다는 사실이 기뻐서, 최홍서는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는 자신의 발언을 앞으로 그가 만능 방패처럼 사용할 것 같다는 약간의 두려운 예감과 함께, 자동차는 말리부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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