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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35)화 (135/185)

135화

 최홍서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이해성과 가장 닮은 미소였다. 알 것 같았다. 이 모습이란, 이해성이 기억하고 있는 최홍서의 모습이었고. 그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가 보여주는 이 미소를 더 많이 모을수록 그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에게 자신이 단지 윤혜안이었을 때.

 그때는 윤혜안에게서 발견되는 최홍서의 모습이 그에게 의심과 불쾌를 일으킬 뿐이었다.

 그 시기를 지나 한동안은, 그리움의 갈증으로 타는 혀를 잠시나마 겨우 축이는 대체품이었다. 최홍서를 대하듯 윤혜안을 대하면서, 그는 윤혜안 안에서 끊임없이 최홍서를 찾아 헤맸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발견하는 최홍서의 모습은 더 이상 의심도 아니고 대체도 아니었다.

 그것을 하나씩 발견해 나갈 때마다 그의 영혼이 떨리고,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최홍서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를 떠올렸다. 그가 자신을 최홍서로 봐주고,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려 노력해 주고 있다는 사실. 윤혜안의 얼굴을 거울 속에서 발견한 순간부터 조금도 기대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나는 윤혜안의 껍질 안에 갇혀 있어도 나 자신을 아주 쉽게 최홍서로 인식할 수 있지만, 그는 그렇지 않으니까.

 “확인해도 돼요. 아저씨 원하는 만큼.”

 “응?”

 “저 진짜 상처 안 받으니까.”

 “......”

 “시험해도 되고, 얼마든지 퀴즈를 내도 되니까. 아저씨 안에서 납득할 때까지... 미안해하지 말고 계속 확인해요.”

 실은, 스스럼없이 내게 키스할 수 있을 때까지,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런 표현은 그를 더 미안하게 만들 것 같았으니까.

 복잡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그는 두어 번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 근처를 벗어나자 도로는 좀 뚫리기 시작했다. 매체에서만 봤던, LA 하면 떠오르는 그런 풍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야자수 가로수가 줄을 선 도로를 달리고, 잘 다듬어진 잔디가 딸린 주택들이 모인 마을을 가로질렀다. 북쪽으로 향할수록 점점 더 번화한 풍경이 나타났다. 세련된 건물과 상점들이 많이 보였고, 거리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최홍서가 묵었던 낡은 호텔과 갤러리가 있던 지역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여기 이 부근이 베벌리힐스야.”

 “아...”

 여기가 말로만 듣던 베벌리힐스구나. 최홍서는 차창 밖에 늘어선 호화로운 아웃테리어의 상점, 카페, 레스토랑들과 그 앞에 주차되어 있는 고급 자동차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관광은... 당연히 전혀 못 했겠지?”

 “괜찮아요. 관광하러 온 게 아니니까.”

 “가보고 싶었던 곳 없어? 하루 정도는 관광을 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냥... 관광지보다는. 아저씨가 좋아하는 곳, 그런 데 가보고 싶어요.”

 “나도 거의 출장으로 온 경험이 더 많거든. 업무 후에 2~3일 여유 있을 때는 하이킹하거나, 요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실컷 말을 타거나... 그런 것밖에 없어서.”

 “그럼 저도 하이킹이 좋아요.”

 “숙소 바로 뒤가 산타모니카 마운틴인데. 내일쯤 하이킹 가볼까?”

 반쯤 열어둔 차창으로 불어 들어온 11월 캘리포니아의 건조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이마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이해성이 이쪽을 보았다.

 최홍서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고, 그는 한 번 더 미소를 보여주었다.

 편안해 보이면서도 근사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테라스 좌석에 잔뜩 앉아있는 한 카페를 지나쳐 좌회전한 이해성의 차는 한 커다란 단층 건물로 진입했다.

 발레파킹을 사양한 이해성은 거의 텅 비어 있는 주차장 한쪽에 차를 세웠다. 안전벨트의 잠금을 해제한 그는 뒷좌석으로 길게 팔을 뻗었다.

 “그건 벗어두고 이걸 걸치는 게 어때?”

 그가 손에 든 것은 LA의 11월 날씨에 어울리는 얇은 카디건이었다. 최홍서는 자신이 입은 윤혜안의 번들거리는 점퍼를 내려다보았다. 그나마 무난한 것으로 고른 게 이 정도였다. 확실히 최홍서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옷을 받아 들어 갈아입었다.

 “음, 훨씬 낫네. 조금 낙낙하긴 해도 너 원래 약간 크게 입는 거 좋아하니까.”

 티셔츠 위에 자신의 카디건을 걸친 모습을 바라본 이해성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엔 최홍서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얼음찜질이 그래도 좀 효과가 있었나 봐. 나아졌어.”

 최홍서가 느끼기에도 눈두덩이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손바닥이 뺨에 툭 닿았다 떨어졌다. 가볍고 짧은 웃음과 함께.

 먼저 차에서 내리는 그를 뒤따라 내리면서 최홍서는 카디건의 앞섶 오른쪽을 당겨 섬유 속에 코를 묻었다. 과하게 뿌리지 않은 향수의 잔향과 애프터쉐이브, 바디로션, 그리고 이해성만의 체취가 조화롭게 어울린 특유의 향기가 후각을 물들였다. 순간적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그리운 향기였다.

 “......”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어느새 차의 앞쪽으로 걸어온 그가 멈춰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홍서는 죄라도 지은 양 슬그머니 옷을 놓았다. 하지만 이해성은 꾸짖거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렇구나. 이제 진짜 최홍서로 봐주고 있는 거니까.

 이쪽으로 오라고, 손을 잡으라고. 그가 오른손을 내밀어 보였다. 반쯤 달리듯 걸음을 재촉해 다가가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겹쳤다. 힘주어 손을 감싸며 단단히 붙잡은 그가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세 명의 직원이 건물 입구까지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 쇼핑을 도와드릴 매니저 벤자민입니다. 편하게 벤이라고 불러주세요. 저희 숍을 선택해 주셔서 굉장히 영광입니다, 미스터 리... 그리고...”

 이해성의 이름만 미리 안내받았는지, 매니저는 동반한 최홍서를 바라보면서 미소와 함께 살짝 얼굴을 기울였다.

 “제가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최홍서는 자신의 옷차림과 태도, 그리고 그것들 속에 감춰져 있는 ‘출신’을 읽어내는 그 남자의 눈빛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남자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이미 머릿속에서는 이해성과 최홍서를 VVIP 고객과 그가 데려온 어린 놀이 상대쯤으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저렇게 친절하게 웃고 있어도 그런 생각이 명백하게 전해져온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최홍서는 주춤, 뒤로 물러나면서 이해성의 어깨 뒤로 반쯤 몸을 숨겼다. 붙잡은 손을 툭툭 당기면서 이해성이 그런 최홍서를 내려다보았다.

 “이름 얘기해 드려야지.”

 “아저씨가 대신 얘기해 줘요.”

 “다 큰 성인이 그 정도도 직접 못하면 어떡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얼굴은 즐거워 보기만 했다. 자신의 어깨 너머에서 얼굴을 반쯤 감추고 낯을 가리는 최홍서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더 깊이 숙여 이마를 맞대었다.

 “아기죠. 아기. (He’s my baby, baby.)”

 “......”

 “......”

 이해성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물론 농담이었고, 그리고 물론 최홍서를 포함해 그 자리의 누구도 웃지 않았다. 매니저와 직원들은 순간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최홍서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웃을 수가 없었다.

 애기.

 그건 이해성이 최홍서에게 붙여주었던 애칭이었으니까.

 뜻은 같더라도 베이비라고 영어로 듣는 것은 감상이 약간 다르기는 했다. 어쩌면 그는 예전의 애칭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지 놀리고 싶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my baby라고 발음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마카롱처럼 감미로웠다.

 부끄러움은 그 감미로움과는 별개의 일이었지만.

 잡은 손을 당기면서 그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하지 마요.”

 “왜? 자기 이름도 스스로 소개 못하니까 애기라고 했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그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 거의 검붉을 정도로 빨개진 최홍서의 귓바퀴를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입니다. 그가 너무 수줍음을 타니까 좀 놀리고 싶어져서요. 이쪽은 미스터 최. 내 파트너인 최홍서입니다.”

 “아, 네! 미스터 리 앤 최.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편안한 쇼핑이 되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농담이라는 이해성의 말에 매니저와 직원들은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고객의 애매한 농담에도 웃어 주면서 진땀을 빼야 하는 건 이곳도 한국과 다름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일반 고객이 아닐 테니까.

 내부로 안내된 두 사람은 매장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첫 방문인 이해성에게 매니저는 열정적으로 숍을 소개했다.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빠르고 긴 영어였기에, 최홍서는 넓은 매장 안을 두리번거리면서 뒤따라 걷기만 했다.

 두 걸음 정도 뒤처져 따라오는 최홍서를 돌아본 이해성은 잡은 손을 가까이 당겨 거리를 좁혔다.

 “마음에 드는 거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사람이 너무 없어서요.”

 “미리 부탁했거든. 손님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편하게 있어도 돼.”

 호텔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면서 조용히 쇼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던 말이 그 뜻이었구나. 이 넓은 매장을 전부 비워놓게 하려면 대체 여기서 쇼핑을 얼마나 해야 하는 걸까.

 최홍서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값비싼 상품만 모아놓은 숍이니 고작 1~2만 달러를 위해 숍을 비워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해성을 따라가는 걸음이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느려졌다. 쇼핑을 아주 즐기는 편도 아니었지만, 두렵기는 처음이었다.

 안쪽에는 이해성과 최홍서 두 사람만을 위한 쇼핑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중앙에 널찍한 소파가 놓여 있고 그 앞 테이블에는 다과도 준비되어 있었다. 구색만 갖춘 것이 아니라, 어느 고급 호텔의 애프터눈 티 세트처럼 아름답게 차려진 테이블이었다.

 “잘됐네. 좋아하잖아.”

 3단 트레이 위 색색의 마카롱과 먹기 아까울 만큼 앙증맞은 베이커리들을 가리키면서 이해성이 최홍서를 보고 웃었다. 이제부터 엄청난 돈을 쓰려고 하면서도, 그는 마치 운 좋게 이 다과상을 대접받게 되어 행운이라는 듯 얘기했다. 부모의 지루한 쇼핑에 끌려온 아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달래는 것 같은 말투였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한 마음으로 그와 함께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커피, 주스, 차, 샴페인... 원하는 음료는 뭐든 주문할 수 있었다. 최홍서는 어떤 옵션이든 그의 선택을 따라 했다.

 “난 운전을 해야 해서 못 마시지만, 샴페인 정도는 마시지 그랬어? 긴장도 풀 겸.”

 “그냥... 아저씨가 고른 차는 어떤 맛인지 궁금해서요.”

 그가 친절하고 다정하게 통역을 해주었기에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뭐든지 그와 똑같은 게 좋았다. 그리고 아닌 척하면서도, 똑같은 걸 고를 때마다 그의 얼굴에서 진해지는 표정이 즐거워 보여서, 그걸 바라보는 것도 좋았고.

 그 미소를 더 많이, 더 충분히 모으면, 그만큼 더 빨리 그에게서 키스를 받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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