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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34)화 (134/185)

134화

 엄지가 광대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눈빛을 한참 들여다보던 이해성의 시선이 흘러내려 이번에는 최홍서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내리뜬 눈꺼풀 속에서 그의 눈빛이 촉촉해진다 느꼈다. 피로가 쌓여 거칠어진 입술이 달싹거리고 그 사이에서 달콤한 숨결이 새어 나와 최홍서의 피부 위에 닿아왔다. 예전처럼.

 최홍서는 저도 모르게 조심스레 숨을 들이마셨다. 차갑게 식은 그의 손에 가볍게 뺨을 비볐다. 아주 약간이지만,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며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

 그러나 노크 소리와 함께 그의 손도 입술도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 멀어져 갔다.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엉거주춤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스를 기대하지 않았다고. 이렇게 최홍서로서 그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넘치도록 행복하다고. 스스로에게 단호하게 말해보았다.

 죽은 사람이 돌아왔다. 그 자체만으로도 결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텐데. 왜 이렇게 보채는 건지. 자신에 대한 실망이 더 컸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따끔거리는 마음을 냉정하게 모르는 척했다.

 방문객은 객실부 매니저였다. 매니저는 갓 짠 듯한 과일 주스를 올린 쟁반을 든 다른 사원까지 대동하고 객실로 찾아왔다.

 일반 객실에서 1박 후 퇴실하면서도, 예약한 기간 동안의 숙박비를 스위트룸 요금으로 결제하는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매니저는 열심이었다.

 “LA에서 휴가를 보내실 계획이시라구요. 물론 너무나 훌륭한 곳에서 투숙하시겠지만, 저희 호텔에는 카지노도 마련되어 있어서요. 다른 호텔과 카지노에서도 당연히 VIP로 대우받으시겠지만, 저희 호텔 카지노를 찾아주신다면, 다른 VIP 고객과 어떤 동선이나 혜택도 겹치지 않도록 오직 고객님에게만 집중된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체크아웃이 이루어지는 동안 이해성은 얼음을 새로 바꾼 주머니로 최홍서의 눈을 찜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니저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고 시종일관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연인에게 얼음찜질을 받고 있는 이 상황의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은 최홍서뿐인 듯했다. 직접 하겠다고 반항을 해봤었지만, 소심한 반항은 이해성에 의해 간단히 제압되었다.

 “투숙하지 않으시더라도 카지노 이용만으로 제공받으실 수 있는 저희 호텔만의 특전이 소개된 브로슈어를 준비했습니다.”

 매니저는 이해성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중간중간 최홍서에게도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두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굉장히 부유한 남성과 그의 어린 동성 연인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해 최소한 겉으로는 어떠한 거북함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시종일관 친절하고 열정적인 그녀의 권유에 이해성은 얼음주머니를 거두고, 브로슈어를 슬쩍 살펴보는 정도의 성의라도 보여주었다.

 “제안은 감사한데, 준비해둔 숙소가 말리부에 있어서요. 카지노를 찾아오기엔 거리가 좀 머네요.”

 그러고는 최홍서의 손을 지그시 감싸 쥐면서 약간 쑥스럽다는 듯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모처럼 둘만의 휴가라 카지노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조용히 쉬고 싶어서요.”

 “네... 아무래도 그러시겠네요.”

 이해성의 거절에도 그녀는 조금도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라도 LA에 들르시면 꼭 다시 찾아주시길 기다리겠다, 두 분의 추억이 깃든 호텔이 되었기를 바란다... 나중에는 그녀의 멘트들이 거의 진심으로 느껴질 정도로 훌륭한 프로의 태도를 유지했다.

 결제를 모두 마친 후, 최홍서의 배낭을 한쪽 어깨에 걸친 이해성은 다른 손으로 최홍서의 손을 잡고 객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를 지날 때까지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SUV는 정문에서 정확히 대기하고 있었다.

 좀 전과는 다른 도어맨이 얼른 다가와 이해성에게서 배낭을 받아 뒷좌석에 실어 놓았고, 이해성은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두둑한 팁을 건넸다.

 매니저를 포함해 서너 명의 직원들이 손을 흔들며 배웅했고, 조수석에 앉아있던 최홍서는 얼떨결에 그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호텔 앞의 원형 도로를 빠져나가려 핸들을 돌리면서 이해성은 그 모습에 피식거렸다.

 도로에 합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전화가 울렸다.

 “쇼핑할 곳이 한 시간 뒤에 준비가 된다는데. 마침 내비게이션도 목적지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네. 음... 배고프지 않겠어?”

 짧은 통화를 마친 그가 옆좌석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많이 울어서 허기질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도 훌쩍 지나 있었다. 그런데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신기할 만큼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갤러리에서 그와 재회했고, 그 전시회 자체가 ‘최홍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그의 메시지였고... 그래서 지금은 정말 그가 자신을 최홍서로 바라봐 주고 있다는 것이, 적어도 그것을 인정했고,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오늘 벌어진 일들을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허기를 느낄 새가 없었다.

 “전 아직 식욕이 없는데, 아저씨 배고프면 뭔가 좀 먹으러 가요.”

 “실은 나도 뭘 먹고 싶은 생각은 안 들어.”

 갤러리에서 그에게 안겨 한참 울었던 일이 아주 오래전 기억 같아서, 운전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신을 최홍서로 바라봐 주는 그와 함께 있다는 실감을 더 느끼길 원했다.

 “왜 그렇게 봐? 표정이 안 좋네.”

 “아닌데...”

 “생각이 많은 표정인데, 뭘.”

 “그냥요.”

 “그냥?”

 “기분이 묘해서요.”

 “실망했나?”

 “......”

 “변두리 호텔의 도어맨이나 괴롭히는 재벌이라고, 실망했어?”

 이해성은 생각에 잠긴 최홍서의 표정을 오해하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는 최홍서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정면을 주시했다.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어. 그 사람이 너에게 지독하게 굴었으니까.”

 어조 역시 단호했다.

 “낯선 이국에 혼자 와서 모든 게 모르는 것투성이고 긴장했을 텐데. 게다가 자기보다 훨씬 연하인 사람에게 연민도 못 느끼는 건지. 투숙객에게 친절을 베풀기는커녕 더 곤란하게 만들 수가 있어?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은 피해자가 너라면, 앞으로는 그냥 넘어가지 않아.” 

 다시 곱씹어 봐도 화가 나는지 핸들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네 앞에서 무리해가며 좋은 사람인 척하는 것도 그만둘 거고.”

 “......”

 “열 개, 스무 개를 주고 싶으면 하나를 줬어. 그러면서도 부담스러울까, 나를 싫어하게 되진 않을까 고민했고...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거든.”

 자동차는 어느새 호텔에서 멀어져 공항 쪽으로, 바닷가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하는 최홍서를 힐끗 돌아본 이해성은 좀 전까지 거칠게 일어나 있었던 목소리를 정돈했다.

 “나, 그래야 해?”

 “......”

 “해주고 싶은 게 있어도 참고 아껴야 하나? 예전처럼?”

 “......아니요. 아니요.”

 최홍서는 여러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길게 정차한 자동차의 행렬 뒤에 속도를 낮춰 차를 멈추면서, 이해성은 질문을 후회하는 얼굴로 최홍서를 돌아보았다.

 “질문이 비겁했다는 거 알지만 어쩔 수 없어.”

 “비겁하지 않아요. 그리고 실망하지도 않았구요.”

 핸들을 쥔 그의 오른손 위에 최홍서는 자신의 손을 겹쳤다. 윤혜안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그의 앞에서 위축되게 만들었지만, 실망했다고, 이해성이 그런 오해를 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다시 후회하기 싫은 것들이 저한테도 많이 있으니까. 그게 뭔지 알아요.”

 “......”

 “아저씨가 하고 싶었던 대로 해요. 나도 그게 좋아요.”

 이해성이 좌석의 헤드레스트에 툭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최홍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 위에 겹쳐진 손가락 끝을 붙잡았다. 손톱 위를 문지르는 엄지의 움직임이 간지러웠지만, 최홍서는 손을 빼고 싶지 않았다.

 “나, 아저씨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늘어서 있던 차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차를 출발시키면서 이해성은 전방을 바라본 채 태연히 말했다.

 “음, 홍서는 나를 해성 씨라고 불렀었는데? 그러다 가끔 기분 좋으면 해성이 형이라고 하기도 하고. 싸울 때는 이해성, 이라면서 무섭게 굴기도 하고.”

 “그런 적 없어요.”

 “확실해?”

 핸들 위에서 붙잡고 있던 최홍서의 손끝을 마사지하듯 꾹꾹 누르면서, 그는 웃음기 하나 없이 말했다. 무표정으로 농담을 하면서 최홍서를 당황하게 만들던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자, 잠자리에서... 그런 적은 있긴 있지만...”

 최홍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놔주지 않으려 힘겨루기를 걸어왔다. 그에게는 반쯤 장난이었다.

 “그래도 우리 싸운 적도 없고... 그리고, 그거, 이... 이해성이라고 부르는 거... 그건 그냥 아저씨 희망이었잖아요.”

 그가 힘을 풀어주어 겨우 손을 빼낸 최홍서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진정시키려 연신 쓸어내렸다. 왼팔을 창틀에 걸친 이해성이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몰래 웃고 있었다. 아니, 헐겁게 가린 옆모습을 보면 몰래 웃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똑같네. 똑같아.”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매력적인 입술을 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최홍서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대로 뭐든 해주는 거 아니었나?”

 “그건... 그건 맞지만...”

 가방끈 대신 가슴 앞을 가로지른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면서, 최홍서는 여전히 붉은 기가 남아있는 얼굴을 푹 숙였다. 낮은 소리로 웃은 이해성이 팔을 길게 뻗어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미안. 내가 너무 놀렸다. 이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랬어.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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