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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33)화 (133/185)

133화

 “객실에서 체크아웃할 수 있도록 사람이 올 테니까, 그때까지 좀 기다릴까.”

 방 안으로 돌아온 이해성은 허리를 굽혀 작은 냉장고를 뒤졌다.

 “카지노 딸린 변두리 호텔이라 그런지 순 술밖에 없군.”

 생수 두 병을 꺼낸 그는 창가의 소파를 가리켰다. 창문을 등지고 길게 놓인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는 최홍서에게 뚜껑을 연 생수병을 건넸다.

 “피곤한가?”

 “어제 푹 자서 괜찮아요.”

 “그럼 말리부 들어가는 길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 좀 사러 갈까?”

 등받이에 팔을 걸친 이해성은 최홍서의 안색을 살피면서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사라락 들췄다.

 “며칠 더 있을 텐데 마땅히 갈아입을 옷도 없고, 수영복도 없고...”

 “......”

 “사람을 시켜도 되지만, 모처럼 휴가니까 느긋하게 쇼핑을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사실 전부터 신경 쓰였거든. 옷이... 전혀 네 취향이 아니잖아.”

 최홍서도 그의 눈길을 따라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윤혜안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덜 화려한 옷들을 골라서 입고 있었는데, 그렇더라도 한때 유행을 거쳐 간 옷들이라 지금은 상당히 촌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최홍서의 취향이 아니기도 했다.

 “윤혜안이 아니라 네 취향대로 입어야지.”

 최홍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소파와 침대 사이의 빈 공간을 서성거리면서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말리부로 들어가기 전에 쇼핑을 좀 하려고 하는데... 아니, 내 물건은 아니고. 20대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옷이나 소품들이 있는 편집숍으로 알아봐 줘요. 일상복도 여러 벌 필요하고 리조트룩, 수영복, 파자마... 흠, 뭐 그냥 아무것도 없다고 보면 되겠네.” 

 앉아있는 최홍서와 그 옆에 내려둔 조촐한 배낭을 번갈아 쳐다본 이해성은 쥐고 있는 생수병을 입술로 가져가며 빠르게 말했다.

 “여하튼 기본적인 건 전부 필요하니까 준비하도록 해줘요. 그리고.”

 생수를 한 모금 삼킨 뒤 곧바로 뒷말이 이어졌다.

 “조용히 쇼핑할 수 있도록... 그래요, 직원도 두세 명 정도로 최소한으로 해서. 두 시간? 세 시간 정도? 그렇게 해줘요.”

 통화를 마친 이해성이 소파로 다시 돌아오려 할 때 벨이 울렸다. 일어나 나가보려는 최홍서를 저지한 이해성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스버킷에 얼음을 한가득 가지고 온 도어맨이었다.

 다른 사람을 보냈어도 될 텐데 굳이 직접 가지고 온 이유가 뭔지 이제는 최홍서도 알 것 같았다. 후한 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도어맨이 소파 앞 테이블에 아이스버킷을 내려놓는 동안, 이해성은 욕실에서 타월을 가지고 돌아왔다.

 “곧 객실부 매니저가 올라와서 체크아웃 절차를 도와주실 겁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을까요?”

 소파에 앉은 이해성은 도어맨 쪽을 쳐다보지 않고 얼음 몇 개를 타월로 감싸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는데.”

 “......”

 “아까 그 얘기는 뭐죠? 엘리베이터에서 우버 얘기를 하던데.”

 그러고는 이쪽을 보도록 최홍서의 상체를 살짝 돌려놓고 눈가에서 먼 곳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얼음주머니를 갖다 대었다.

 우버 얘기를 꺼내자 도어맨은 연신 입맛을 다시면서 최홍서의 눈치를 살폈다.

 “아, 그건... 미스터 윤께서도 이해해 주신 것처럼, 호텔의 방침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미스터 윤?”

 그때까지 별다를 것 없었던 이해성의 목소리가 순간 날카로워졌다. 부어오른 최홍서의 눈두덩이 위에서 이리저리 얼음주머니를 움직이던 손도 멈췄다.

 최홍서의 객실 넘버는 물론이고 당연히 이름도 알지 못했던 도어맨은 그사이 투숙객 명을 확인하고 올라온 것 같았다. 최홍서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앞으로 한 발 나서면서 자신을 가지고 말했다.

 “네, 미스터 윤께서 너그럽게 이해를...”

 이해성이 최홍서의 눈에서 얼음주머니를 내리고,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도어맨의 말을 막았다. 바로 어제 도어맨이 최홍서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최홍서가 이해성에게 그 일을 말한 적도 없는데.

 “뭘 잘못 아신 것 같은데, 미스터 최겠죠.”

 “...네?”

 어리둥절해하는 도어맨을 바라보면서, 이해성은 최홍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미스터 최. 최홍서라고 말했습니다.”

 “아... 투숙객 카드와 여권 카피본에는 분명히...”

 “정정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도어맨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얼른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투숙객의 이름 따위가 무엇이든 도어맨에게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마 데스크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스터 최, 미스터 최께서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는 것처럼...”

 “그러니까 뭘 이해해 준다는 겁니까.”

 “아... 그게...”

 이해성이 전혀 봐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자, 도어맨은 본능적으로 좀 더 상대하기 쉬워 보이는 최홍서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러나 최홍서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3분의 1도 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해성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건 분위기와 어조로 짐작할 수 있긴 했다. 처음에는 우버 때문에 화를 내시는구나 싶었는데, 자신의 이름이 몇 번 거론되는 것을 듣고 이후부터는 명확히 확신할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하나 더. 이해성이 자신을 윤혜안이 아닌 최홍서라고 정정하려 한다는 사실만큼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도와달라고, 최홍서를 힐끔거리는 도어맨의 시선을 눈치챈 이해성은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렸다.

 “내 파트너가 직접 말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에게 들을 생각이었다면 단둘이었을 때 이미 물었겠죠.”

 “죄송합니다. 우버 차량은 호텔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는 게 관례 같은 거라... 하, 하지만 제가 다른 택시를 불러드렸습니다!”

 도어맨은 적극적으로 자기변호를 하고 나섰지만, 이해성은 다른 택시를 불러줬다는 말에 속지 않았다. 속세가 돌아가는 사정에 그렇게까지 눈이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을 통해 일이 어떻게 돌아갔던 건지 대강 추측이 가능해졌다. 불쾌함을 드러내며 이해성의 입매가 강하게 비틀렸다.

 “아, 투숙객이 이미 부른 우버를 돌려보내게 했다는 거군요. 택시를 불러주고 수수료 몇 푼 챙기기 위해서. 혼자 몸으로 이 먼 타국에 와서 언어도 익숙지 않아 고생하는 외국인에게.”

 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해도, 한 자 한 자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에서 노기가 극에 달했음을 알 것 같았다.

 “호텔 방침이...”

 “호텔 방침, 호텔 방침... 무슨 기계도 아니고.”

 이해성은 거칠게 코웃음을 치면서 얼음주머니를 손으로 눌러댔다. 달그락거리며 얼음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뒤에, 그가 냉정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호텔 방침이 그렇다면, 나와 함께 투숙했더라도 똑같이 행동했겠죠?”

 “......”

 “안 그렇습니까?”

 그쯤에서 도어맨은 변명을 더 잇지 못했다. 마침내 시선을 내리깔면서 항복하듯 사과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해성은 얼음주머니를 만지느라 물이 흥건하게 묻은 손을 툭툭 털어내고는 그 손으로 최홍서의 부은 눈가를 훑으며 말했다.

 “사과는 내 파트너에게 해야 하지 않나?”

 “죄송합니다, 미스터 최. 불편을 드렸습니다.”

 최홍서는 얼떨결에 마주 고개를 숙였다. 편안해 보이지 않는 최홍서의 표정을 살핀 이해성은 못마땅하게 혀를 찬 뒤 도어맨을 돌려보냈다.

 얼음주머니가 다시 최홍서의 눈두덩이에 지그시 닿아왔다.

 “갤러리에 찾아오게 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을 쓸 걸 그랬어.”

 한쪽 눈으로 바라본 이해성의 얼굴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LA까지 찾아오게 해서 낡은 변두리 호텔에 묵게 하고 도어맨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게 하고... 그 모두를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한쪽 눈만으로도 계속 그를 바라보면서, 최홍서는 그의 팔을 가만히 쥐었다.

 “저는 <컴백>이 좋았어요.”

 부기를 빼고 있는 눈두덩이만 바라보던 이해성의 눈이 최홍서의 다른 한 눈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얼음주머니를 쥔 그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거두어졌다.

 확신을 담아서, 최홍서는 그를 붙잡은 손과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장소는 그곳뿐이었어요. 아저씨도 알잖아요.”

 얼음의 한기가 차갑게 묻은 커다란 손바닥이 다가와 뺨과 귓가를 온통 감쌌다. 그의 손은 정갈한 생김을 가졌지만 아주 커다래서, 뺨을 감싸줄 때면 늘 귀 주변까지 충분하게 뒤덮었었다. 세상의 모든 잡음을 차단해 주듯이. 지금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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