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동료가 달려와 시동이 켜진 자동차를 진입로에서 빼는 사이, 도어맨은 얼른 두 사람을 뒤쫓아왔다.
“체크아웃하실 거라면 짐은 제가 로비로 옮겨드리겠습니다.”
그는 최홍서가 이미 뻔히 알고 있는 길을 안내해 주면서 따라붙었다. 벨맨과 도어맨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 호텔이 아니긴 했지만, 어제 체크인했을 때도 룸까지 안내해 준 사람은 따로 없었기에 최홍서는 의아했다. 아마도 도어맨은 짐을 옮겨준 뒤 이해성에게 다시 받게 될지 모르는 넉넉한 팁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지나치게 굽실대는 태도가 최홍서를 부담스럽게 했지만, 이해성은 그의 존재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투숙하시는 층이 몇 층이셨죠? 분명 기억하고 있었는데 제가 깜빡 잊었네요.”
이보다 더 송구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 도어맨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물었으나, 최홍서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이해성을 쳐다보았고, 그가 통역을 해주었다.
“객실이 몇 층이냐고 묻는데.”
“5층이요.”
“5층이라고 하네요.”
“아, 그렇죠! 5층이었죠!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네요. 먼저 타시죠.”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을 붙잡은 도어맨은 두 사람이 먼저 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로비에서 어느 가족의 사진을 찍어주고 팁을 받던 때보다 훨씬 더 친절한 태도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5층 버튼을 누른 도어맨은 친근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스몰 토크를 건네왔다.
“묵으신 지 사흘 정도밖에 안 되신 것 같은데, 오늘 체크아웃을 하신다니 너무 아쉽네요. 아마 더 좋은 곳으로 옮기시는 거겠죠?”
도어맨의 등 뒤에서 이해성이 최홍서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며 한국어로 조용히 물었다.
“사흘 전에 왔었나?”
“아니요, 어제 왔어요.”
“아...”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어맨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그 일이 찝찝했는지, 거의 참담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최홍서를 살짝 돌아보았다.
“우버가 호텔 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호텔 방침이라서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버, 호텔, 언더스탠드... 그 정도의 단어밖에 듣지 못했지만, 도어맨의 표정이나 태도로 의미는 이해할 수가 있었다.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도어맨의 얼굴은 그제야 밝아졌다.
노. 노, 우버. 도어맨은 이미 도착한 우버 차량을 돌려보내라면서 손을 들어 최홍서의 면전에 거부의 표시를 해 보였었다.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는 최홍서에게서 아주 단호하게 등을 돌려버리기도 했었다. 어제의 도어맨과 지금의 그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손바닥 뒤집듯, 너무나 명료한 변화라 통쾌하기보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리 이해성이 두둑한 팁을 주었고, 또 더 많은 팁을 기대해 볼 수도 있는 손님이라지만, 몇백 달러의 돈에 저토록 간단히 태도를 바꾸는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기는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이해성은 객실 앞까지 따라온 도어맨이 문밖에서 기다리도록 지시했다. 최홍서와 달리 이해성은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대기하게 하고, 자신의 편의에 맞춰 움직이도록 하는 것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최홍서로 살아있었던 과거에는 좀처럼 볼 기회가 없었던 그의 다른 모습이었다.
“여기서 하룻밤 묵은 건가?”
우중충한 색의 카펫이 깔린 객실을 천천히 가로지르면서 이해성이 실내를 둘러보았다. 창가에 닿은 그는 크림색 커튼을 젖혀 밖을 내다보았다.
“전망이라고 할 것도 없군.”
그의 말대로였다. 창밖으로는 버스 회사의 차고지와 이동주택 주차장 따위가 펼쳐져 있을 뿐, 감상할 만한 아름다운 경치나 이국적인 풍경은 전혀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갤러리에서 돌아온 후에 바로 잠들었어요. 그래서 불편한 것도 없었고... 아, 조식도 꽤 맛있었어요. 가보지는 않았지만 수영장도 있고...”
시시한 풍경을 내다보던 이해성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객실의 입구 쪽에 서서 열심히 변명하던 최홍서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위에 걸친 얇은 점퍼 위로 팔을 쓸면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런 허름한 호텔에 묵어서 내가 속상해하는 것 같아?”
“......”
“맞아. 기분 별로야.”
직설적으로 인정한 그는 어젯밤 최홍서가 피곤한 몸을 눕히고 쓰러지듯 잠들었을 침대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허름한 호텔이라는 것보다도, 이런 곳에 혼자 있도록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고통스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얼른 짐 챙길게요. 얼마 안 돼요.”
이곳에서 빨리 그와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최홍서는 TV가 놓인 서랍장 위에 두었던 배낭을 집어 들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LA까지 배낭 하나 가지고 온 건가?”
“워낙 급하게 오기도 했고, 딱히 필요한 게 별로 없어서요.”
옷장에 개켜 놓은 실내복과 핸드폰 충전기, 몇 가지 세면용품 등을 서둘러 배낭 안에 쑤셔 넣는 동안, 이해성은 조용했다. 욕실에서 돌아 나오던 최홍서는 멈칫 발을 세웠다.
침대 옆에 선 이해성이 협탁 위에 두었던 대본을 손에 들고 있었다. 색색의 인덱스 탭이 페이지 밖으로 삐죽 삐져나와 있고, 자주 들여다본 탓에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크림 맨션>의 시나리오였다.
집 안을 정리하다 오래 잊고 있었던 추억의 물건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는 망연히 서서 손안의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져오긴 했는데, 보지도 못하고 곯아떨어졌어요.”
너덜해진 시나리오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 괜히 유세를 떠는 것 같아서, 최홍서는 변명하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안을 좀 봐도 되나?”
“별거 없는데... 그냥 제가 떠오르는 대로 막 써놔서... 보셔도 되긴 한데 내용은 읽지 마세요.”
절대 읽지는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 페이지를 훌훌 넘겨보는 이해성 곁에 서서 감시를 했다. 혹시라도 어느 페이지에서 시선이 오래 머문다 싶으면 손으로 내용을 가리면서 페이지를 넘겨버렸다.
대본에 남은 고민의 흔적들은 지적이고 그럴듯한 말이 아닌 쉽고 단순한 단어들로 날것처럼 써놓은 일기에 가까웠다. 군데군데 맞춤법도 틀린 속마음 같은 것이라 보여주기가 창피했다.
“이, 이제 됐죠?”
아무래도 그가 내용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표지를 덮어버리고 시나리오를 가져오려 힘을 주어 당겼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장난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전히 성실하네.”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가 이 시나리오 속에서 윤혜안이 아닌 최홍서의 흔적을 또 하나 더 발견했다는 것을.
성실. 그건 첫 만남에서 최홍서가 내세웠던 자신의 장점이었고, 이해성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단어이기도 했다.
다시 또 감정이 크게 일렁거릴 것 같아서 시선을 내리깔면서 다시 한번 시나리오를 당겼다.
“타고난 재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는 걸 아니까요.”
순순히 시나리오를 놓아준 이해성의 손이 턱 끝을 가볍게 쥐고 들어 올렸다. 지그시 눈을 맞추고 있던 시선이 조금씩 초점을 비켜나더니, 조심스러운 손길이 다가와 눈가를 매만졌다.
“다들 내가 울렸다고 생각하겠어.”
“......”
“사실이 그렇긴 하지.”
씁쓸한 웃음이 자책하는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냥 운 거지 아저씨가 울린 거 아니에요.”
이해성이 허리를 굽혀 최홍서의 얼굴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한순간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저도 모르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멈추었다.
턱을 쥔 엄지가 피부 위를 살살 긁었다. 무표정할 때면 얼음 바위를 쪼아 만든 조각처럼 차가워 보이는 이목구비 위로 흐린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래, 강 감독의 응접실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이해성은 최홍서에게 무섭고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
“우는 걸 보는 건 마음 아프긴 해도, 울어야 한다면 나 때문이어야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이해성의 미소가 좀 더 진해지며 멀어져 갔다.
“너무 심하게 부었네. 좀 가라앉혀야겠어.”
턱을 놔준 이해성은 객실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최홍서는 조금 전 자신이 키스를 기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갤러리에서 그는 내내 안아주었고, 더 이상 윤혜안으로 보지 않겠다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최홍서도 달라진 태도를 확연하게 느꼈다. 하지만 아직 그의 입술이 닿는 일은 없었다.
괜찮다고 했으면서.
최홍서라고 생각하게 됐더라도, 당연히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거고. 몇 번이든 그가 완전히 확신하게 될 때까지 원하는 만큼 확인하라고 했으면서. 아직 키스를 해주지 않았다는 정도로 서운해하려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시나리오를 쥔 손으로 열없어진 입가를 훔쳐낸 최홍서는 손에 든 것을 배낭 안에 쑤셔 넣었다. 이제 이것이 마지막 짐이었다.
“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고작 배낭 하나뿐이었네요. 러기지를 옮겨줄 필요는 없으니, 객실에서 체크아웃할 수 있도록 컨시어지에 얘기해 주겠습니까?”
이해성이 문밖에 세워둔 도어맨에게 얘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숙 비용은 스위트 객실 요금으로 지불하죠.”
“물론 가능하십니다. 8층에 클럽 라운지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체크아웃하시는 게 어떨까요? 객실보다 훨씬 편하실 겁니다.”
“아... 고맙지만, 그보다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 곳을 선호해서요.”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최홍서는 배낭을 안고 침대 발치 쪽으로 걸어가 열린 문 앞에 선 두 남자를 기웃거렸다.
격의 없이 도어맨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이해성의 손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져 그의 손에 또 한 번의 팁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얼음 좀 먼저 부탁하죠.”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이해성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굽실거리면서, 도어맨은 휑하니 문 앞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