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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31)화 (131/185)

131화

 “얼굴이... 다르죠?”

 그는 최홍서의 턱 끝을 쥐고 살짝 들어 올려 눈을 피하지 못하게 했다.

 “숨기지 마.”

 다시 마주한 그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리고 잠시간의 눈 맞춤 뒤에 다시 눈빛은 물러졌다. 턱 끝을 쥐고 있던 엄지가 피부 위를 살살 긁었다.

 “서초동 집에서 네가 쓰러졌던 날. 그날부터였을 거야.”

 “......”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던 게.”

 턱을 만지던 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최홍서를 사이에 가둔 다리의 오른쪽 무릎을 세운 그는 그 위에 팔을 걸쳤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얇은 커튼 너머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부사장님에게 나쁜 말은 절대 안 한다고. 홍서가 했던 말을 드러내놓고 똑같이 했었지. 의심하고 추궁하는 나를 도발하듯이. 내 눈을 피하지 않고.”

 그의 시선이 창밖에서 이쪽으로, 다시 최홍서를 향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내가 최홍서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 시작점이었어.”

 “음...”

 최홍서의 입술에서 신음을 닮은 무거운 감탄이 새어 나왔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했었지. 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만 끄덕였었는데, 고집을 부리듯이... 부사장님은 좋은 사람이라고.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나에게 나쁜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추억을 더듬으며 그는 흐리게 웃었다.

 “그때의 너는 절대로 약해 보이지 않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을 지킬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 예를 들면, 내가 더 이상 ARA의 이해성이 아니게 되더라도... 혹은, 말 그대로,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이 사람은 이 말을 지킬 거라고.”

 “......”

 “그 맹목적인 순수함에 결정적으로 반했던 거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면서, 그는 최홍서의 코끝을 검지로 톡 두드렸다.

 “그런데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한 거지. 나를 반하게 했던 똑같은 눈빛으로.”

 그의 손끝이 물결치듯 얼굴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부은 눈두덩이를 두드리고, 광대 위를 더듬고, 입가를 매만졌다.

 “이목구비는 다른데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똑같아서...”

 “......”

 “목소리는 달라도, 나를 향한 말투가 똑같아서...”

 “......”

 “정교하게 흉내 내는 것뿐이라고 냉소하면서도, 떨쳐내지 못했어.”

 얼굴의 이곳저곳을 손끝으로 점검하기를 마친 그가 최홍서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울 것 같은 그런 웃음이 아니었다.

 “네가 나를 볼 때 어떤 표정인지, 그건 나밖에 모를 거야. 너조차도 모르는 거지.”

 “......”

 “옛날이야기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귀 기울여 듣느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잊고 집중해 있는 어린아이 같은, 그런 얼굴... 지금처럼.”

 그가 그런 생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게 되자, 최홍서는 문득 쑥스러웠다. 마음을 그렇게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시선을 내리깔자, 그는 다시 또 턱 끝을 들어 눈을 맞추게 했다.

 “얼굴이나 목소리 때문에 너를 좋아했던 게 아니야. 나를 바라보던 표정, 나에게 해주던 말들이 좋았던 거지.”

 “......”

 “그러니까 감추지 마. 더 많이 나를 봐주고, 더 많이 말해주면 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울어서, 이제는 눈물만이 아니라 입안도 다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다시 또 눈물이 고여 들었다. 그가 티슈를 뽑아 눈가를 가볍게 눌러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 이제 그만. 이젠 진짜 그만 울어야 돼. 이러다 너 탈진해서 쓰러지겠어.”

 눈물을 삼키려 입가에 힘을 줬다.

 “앞으로 천천히 다 얘기하자. 응?”

 다정한 목소리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해성이 최홍서의 손을 잡아끌었다. 앉은 채로 잠시 망설이던 최홍서는 끌어당기는 그의 팔에 의지해 무릎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꼭 해두고 싶은 말이 있었다. 바닥에서 최홍서의 가방을 주워 올려 먼지를 털어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숨을 들이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때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 둘 모두가 알아버렸다. ‘그때’가 언제를 가리키는 것인지.

 가방을 털던 그가 허리를 펴고 눈을 맞춰왔다.

 그건 둘 모두에게 아직 피가 흐르고 있는 상처를 건드리는 꼴이 될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최홍서는 지금 그 말을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것을 덮어둔 채로 그의 손을 잡고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멀쩡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기엔 내 생각이나 결정이 한심하고 어리석겠지만... 그때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울지 않고 말하고 싶었기에 절로 속도가 느려졌다.

 “버티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 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는 이미 오래전에 넘어버렸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곧바로 그가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괴로우면 얘기하지 마. 나중에 해도 돼.”

 “지금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

 “여기서. 이 사진전에서.”

 어깨를 쥔 그의 손에 힘이 실렸다.

 “그렇게 사라져버릴 것처럼 얘기하지 마. 앞으로도 시간은 많아.”

 조급하고 거칠어진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말일 뿐 그 역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 이 기묘한 현상이 제자리로 돌아가 버릴지 알 수 없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는 그것을 외면하려 하고 있었다.

 어깨를 붙잡은 이해성의 손 위에 최홍서는 제 손을 겹쳤다.

 “아저씨 이름만이라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맞아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끊어졌다.

 “하지만... 나를...”

 “......”

 “이렇게 계속 기억하면서 괴로워하고 사랑하고... 그럴 거라고는...”

 눈물로 감정적 호소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멈추고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고인이 된 최홍서를 흥밋거리 삼아 씹어대던 사람들을 무섭게 몰아붙이던 이해성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의 눈을 보며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미안해요.”

 그의 발끝이 내려다보였다.

 “그래서는 안 됐어요. 내가 이기적이었...”

 양 뺨을 감싸오는 두 손의 감촉에 최홍서의 말이 멈췄다. 그는 최홍서의 얼굴을 들어 올리는 대신 자신의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췄다.

 “우리 처음 같이 봤던 영화가 뭐야?”

 “러브 스토리...”

 갑작스럽게 다시 시작된 퀴즈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최홍서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제니와 올리버가 크게 싸우고, 올리버가 종일 제니를 찾아다니지. 열쇠를 잃어버린 제니가 집 앞에 앉아있는 줄도 모르고.”

 “......”

 “미안하다고 말한 올리버에게 제니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

 “아...”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

 그의 감상실에서 <러브 스토리>를 함께 봤던 당시에는 그 대사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저 막연히 멋있는 말이라고 감탄하기는 했어도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은 최홍서의 가슴 안에서 태어난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쓴 대본인 것처럼 그것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상대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결코 행복하지 않다.

 게다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감정과 사고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상대의 진심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을 아프게 하는 미안하다는 말은 불필요했다. 적어도, 불필요한 순간이 존재했다.

 그가 그대로 가까이 다가와 최홍서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숨결이 드나드는 그의 입술이 바로 귓가에 닿았다. 예전처럼. 그 순간만큼은 비슷한 신장을 가진 윤혜안에게 고마웠다.

 “나에게 나쁜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네가 그랬었잖아.”

 “......”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한 그 말을 지키려고 너는... 그랬던 거야.”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안았다. 니트를 두 손에 그러쥐었다. 이 순간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어서, 눈을 감지 않기로 했다. 이 되살림이 형벌이 아닐지 모른다고. 신께 감사드렸다.

 그의 차는 길 건너 상점의 넓은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마치 고급 세단처럼 유려한 디자인을 가진 럭셔리 SUV 차량이었다. 조수석의 문을 열어준 그는 최홍서가 무사히 타는 것까지 지켜본 후에야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돌아가는 비행 편이 언제지?”

 “사흘 후요.”

 “그럼 그 티켓은 취소하고 나랑 며칠만 더 쉬다가 돌아가.”

 “......”

 “우리 할 얘기도 너무 많잖아.”

 “회사는 괜찮아요?”

 “될 대로 되라지, 뭐.”

 으쓱이며 얘기한 그는 시동을 걸었다.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그런 것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분위기 자체는 농담처럼 여겨지지가 않았다.

 “어디에 묵고 있어? 호텔에 들러서 짐 가지고 가자.”

 “이 호텔이에요. 근데... 우리 어디로 가요?”

 최홍서가 보여준 구글맵의 화면을 확대해 호텔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그가 대답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갤러리로 바로 온 건데, 짐은 말리부에 가 있을 거야. 그쪽에 빌라를 빌려놨거든.”

 “......”

 “왜?”

 반응이 없자, 그가 액정에서 눈을 떼고 최홍서를 보았다.

 “그냥... 아저씨도 뭔가를 빌린다는 게 신기해서요.”

 그가 팔을 뻗어 아프지 않게 뺨을 꼬집으며 웃었다.

 “LA에 가지고 있는 부동산들은 투자용이라. 렌트를 주고 있어서.”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간 자동차는 황량한 풍경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가는 빌라는 강 실장이 준비했는데, 나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 어떨지 모르겠네.”

 호텔은 갤러리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몇 분 달리자마자 프리웨이 오른쪽으로 호텔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에 단층 건물이 대부분이라 겨우 7~8층 규모의 호텔임에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칠이 벗겨진 누런색 호텔 건물을 힐끔 쳐다보는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갤러리에서 가까운 호텔로 잡다 보니까... 오래되긴 했는데, 그래도 깔끔해요. 객실도 넓고.”

 “그래. 빨리 체크아웃하고 돌아가자.”

 그를 안심시키려 열심히 설명했고, 그 역시 최홍서에게 웃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속상한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관광지에서 거리가 먼 변두리 호텔에는 좀처럼 나타날 일이 없는 호화 SUV가 정문 쪽으로 진입하자, 보이지도 않았던 도어맨이 어디선가 재빨리 나타났다.

 시동을 그대로 둔 채 운전석에서 내린 이해성은 도어맨에게 후한 팁을 건넸다.

 “투숙객인데 바로 짐만 챙겨서 체크아웃할 겁니다. 근처에 대기시켜 둬요.”

 “네, 알겠습니다.”

 시원하게 대답한 도어맨은 다른 동료에게 재빨리 손짓을 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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