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새와 나무의 사진 앞에서. 함께 남산을 걸었던 그날 입고 있었던 아이보리색 보트넥 니트를 입고. 계단에서 멈춰버린 최홍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사되는 빛 속에서, 그는 천사 같았다.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형체도 목소리도 없이 우주를 떠돌던 나를 이 땅으로 불러오신, 전지전능한 그분이 바로 눈앞의 그가 아닐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을 만큼.
이 마주침에 발이 굳어버린 최홍서와 달리, 물끄러미 이쪽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과 표정에는 의외라는 놀라움이 없었다. 그래서 알았다.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자세까지. 슈트 차림일 때보다 느슨하고 편안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이마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며칠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날카로워진 얼굴선, 약간은 꺼칠해 보이는 입술. 그리고 첫 데이트나 다름없었던 순간에 입었던 여름용 보트넥 니트.
최홍서의 시선이 움직인 자리를 알아챈 그가 이쪽을 향해 좀 더 몸을 틀었다. 팬츠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빛이 쏟아지는 창을 등지고 서서 그가 물었다.
“이 옷, 기억합니까.”
메마른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월로에서... 숙소에 데려다주셨을 때.”
목소리는 자기의 성대에서 나오는 것 같지가 않았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한 발을 떼어 다음의 계단 위에 올렸다.
“그게 우리 몇 번째 만남이었는지 알아요?”
“...두 번째요.”
우리. 지금 그가 말하는 우리는 그 자신과 눈앞의 나일까, 아니면 그 자신과 이곳에 없는 최홍서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발을 디딘 계단 위로 올라섰다. 그의 모습이 좀 더 가까워졌다.
“카메라 보관실을 보여줬을 때.”
“......”
“나에게 물었었죠. 내가 왜 좋냐고. 어떤 점이 좋냐고.”
“......”
“첫 번째 이유를 내가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기억합니까.”
“아웃포커싱.”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를 감싸고 있던 고요에 균열이 일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느라 그의 길고 탄탄한 목이 꿈틀거렸다.
가방끈을 꽉 쥐고, 최홍서는 다음 계단 위에 발을 올렸다. 하나의 퀴즈를 맞힐 때마다 한 계단 더 그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허락받은 것처럼.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미간을 좁혔다. 고요를 무너뜨린 그는 슬픔이나 서러움, 혹은 분노를 겨우 인내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언제 처음 같이 잤었어?”
“호찌민에서... 귀국했던 날.”
한 계단 또 올라섰다.
그는 주머니에서 한 손을 꺼내 하관을 틀어막고 짓이겼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곳.”
“녹스 호텔. 지하 주차장...”
그 대답과 함께 최홍서는 모든 계단을 다 올라 정상에 섰다. 그와의 거리는 불과 2~3미터였다.
처음 보는 미지의 생명체를 만난 듯 그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경이에 찬 눈길로 최홍서를 보았다. 너무 빨리 다가가면 겁을 먹고 도망갈까 걱정되고, 너무 느긋한 척 굴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사라져버릴까 조마조마한 것처럼.
입가를 가리고 있던 그의 손이 어느 순간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해성 부사장과 만나고 있냐고. 정지인이 그렇게 물었을 때.”
“......”
“뭐라고 대답했어? 나를... 뭐라고 했지?”
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건 이해성과 최홍서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가 그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정지인과의 마지막 통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부정해야만 했었다. 이서경에게서 새어 나온 오물이 그의 이름에 튀지 않도록. 최홍서에게서 멀리 밀어내야만 했었다. 어쩌면 그때 이미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무의식 속에서, 막연하게나마.
그의 사랑을 부정하던 순간의 고통이 왼쪽 가슴에서 되살아났다. 이해성은 그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모조리 눈에 담고 있었다.
가방끈을 생명줄처럼 쥐고 있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입술을 꾹 물었다 놓치면서 숨을 내뱉었다.
“그건... 그, 그때는...”
“알아. 날 감싸려고 그랬다는 거 알아. 뭐라고 했었는지, 그것만 대답해 주면 돼.”
스콜의 한가운데 있는 듯 순식간에 눈앞이 흐려졌다. 이유를 다 알고 있다는 그 말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한없이 미안해서, 고개를 숙이며 겨우 입술을 움직거렸다.
“로진...”
그새 무겁게 맺힌 눈물이 타일 바닥 위로 뚝 떨어졌다.
“일밖에 모르는, 순진한 아저씨라고... 로진이라고 했어요.”
“이 사진.”
격양된 그의 목소리에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이해성은 긴 팔을 뻗어 사진 하나를 정면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새를 찍은 사진이었다.
“누가 찍었어?”
“......”
그의 표정은 추궁이 아니라 간청을 하고 있었다. 제발 답을 말해 달라고. 그제야 최홍서는 그가 했던 말의 의미를 온전히 알 것 같았다. 지독한 마법에서 공주를 깨워달라던 말.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증거와 확신이 필요했다. 그는 이 상황을 믿고 싶었고, 그래서 증거와 확신이 너무도 절실했던 것이다.
파도가 밀려오듯 끝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아무렇게나 손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찍었어요. 자카르타에서. 아저씨가 준... 카메라로.”
“네가... 누군데.”
그의 목소리는 꽉 조인 틈 사이로 겨우 새어 나온 유령의 비명처럼 창백했다.
“네가 누군데.”
그가 반복해서 물었다. 그의 질문보다도, 그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는 사실이 최홍서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대답을 하려고 입술을 벙긋거리기는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억누르려 잔뜩 굳어진 턱 근육을 최소한으로 움직이면서, 그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네가 최홍서라고 말하기만 하면, 나는...”
“......”
“믿을 테니까.”
기어이 그가 울었다. 눈의 앞머리를 따라 높은 콧대의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입술을 적셨다. 신을 울린 것 같았다.
망설임 없이 곧장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혼자 울고 있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두 팔을 그의 등에 두르고 자신의 가슴을 그의 가슴에 틈 없이 꽉 맞붙였다. 거부당할 수 있다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상관없었다.
“홍서예요. 최홍서 맞아요. 나 정말 홍서 맞아요, 아저씨... 다 말할 수 있어요. 나 다 기억해요. 다 물어봐요. 내가 다 맞힐게요.”
그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았던, 한때 도시와 세상의 주인처럼 보였던 견고한 기둥이 지금은 자기에게 기대어 오직 그 힘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온기가 느껴지는 그의 살아있는 몸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뺨을 비비면서 최홍서는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연인이고, 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흐, 흑... 흐윽...”
망연히 늘어져 있던 그의 두 팔이 움직였다. 울음을 터뜨린 최홍서의 뒷머리를 가만히 쓰다듬고, 스치듯 살며시 어깨를 감쌌다.
“알아.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
“......”
“알아. 다 알아.”
그의 팔과 손에 서서히 강한 힘이 실렸다. 품속의 육체를 자신의 가슴 안에 새겨 넣을 것처럼 봐주지 않고 힘껏 조여 안았다.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의 압력이었다. 그러나 숨이 막히더라도 절대로 거부하고 싶지 않은 포옹이었다.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익숙한 향수의 향기 속에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오늘이 최홍서의 기일이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나 울었던 건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창밖에서 서너 명의 사내아이들이 낄낄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멀리에서부터 차츰차츰 가까워졌다.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인데도 그들이 고운 말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두 명이 갑작스럽게 다투기 시작하더니, 언성이 높아졌다.
이해성은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느 순간 등 뒤의 가슴이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내쉬었다.
최홍서는 자신의 아랫배를 안은 그의 팔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제 오후, 혼자 기대어 앉아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그와 함께였다. 그의 가슴에 등과 어깨를 기대고, 그의 팔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평생 동안의 울음을 다 울어버린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필요한 순간에도 울 수가 없을 것 같을 정도였다.
가슴 속 바닥에 들러붙은 과거의 어둠까지 토해내는 것 같은 울음을 우는 동안, 그는 그만 울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껴안고, 쓰다듬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면서, 그 울음을 다 귀 기울여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예전처럼.
울음이 완전히 잦아든 후에도 한동안 그대로 말없이 이렇게 서로 앉아있었다. 시간을 무한대로 가진 사람들처럼.
최홍서가 그의 품에서 먼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닥까지 닿아있는 커다란 창에 뒷머리를 기댄 그가 떨어지지 말라고, 상박을 당겼다. 멀리 떨어질 생각도 없었던 최홍서는 그에게 붙잡힌 채로 어정쩡하게 돌아앉았다.
한눈에 보아도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니트의 가슴과 팔 부분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젖은 부위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옷, 다 더러워졌겠어요.”
“그러게. 콧물, 눈물 다 묻어서 이건 이제 못 쓰겠네.”
그 역시도 많이 지쳤는지, 농담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최홍서도 힘없이 웃었다.
그가 최홍서의 가방에서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던 티슈 봉투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거기서 몇 장을 새로 뽑아 그의 니트 위를 문질렀다.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그가 최홍서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네가 홍서라고 생각하면서도... 한동안은 계속 그걸 확인하려고 들 텐데. 괜찮겠어?”
창문에 뒷머리를 기댄 자세 그대로라 눈꺼풀을 내리뜨고 바라보는 시선이 그윽했다. 손안에서 휴지를 뭉치면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그를 마주했다.
“그게 왜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필요한 거잖아요.”
“......”
“저라도 못 믿었을 테니까.”
손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이번에는 얼굴로 다가와 눈물의 흔적 위를 더듬었다. 살이 붓다 못해 짓무를 정도로 울었으니 얼굴이 엉망일 게 뻔했다.
“몇 번이든, 얼마든지 괜찮으니까... 아저씨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확인해 줘요. 아저씨가 나를 최홍서라고 확신해 주는 거, 저도 그걸 원해요.”
눈가를 가만히 쓸던 그의 손끝이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천천히 더듬어나갔다. 문득 그 시선이 두려워져서, 최홍서의 얼굴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서워져서, 시선을 피했다.
“얼굴이... 다르죠?”
그는 최홍서의 턱 끝을 쥐고 살짝 들어 올려 눈을 피하지 못하게 했다.
“숨기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