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꽉 틀어막혀 있던 숨을 겨우 토해내듯,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밖으로 말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
하얀 벽 위에 걸린 사진의 개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떤 사진들은 서로 한 묶음인 것처럼 나란히 걸려있기도 했고, 어떤 사진들은 위아래로 붙어 있기도 했다. 다른 사진들과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사진들도 있었다. 분명한 건, 양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그 사진들 중 절반 이상을 최홍서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긴 홀의 중앙에서 최홍서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몸을 돌려 다시 반대 방향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맹수에게 포위당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홀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루프톱 바로 떠나기 전.
태국 방콕의 호텔 객실에서, 최홍서 스스로 한 장씩 한 장씩 지워나갔던 사진들이었다. 삭제되었던 그 사진들이 되살아나 이곳에, 이 먼 곳에, ‘람파스’의 전시회에 걸려 있었다.
사진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인생, 존재를 지우는 것만 같았던 당시의 고통이 가슴속에 잠들어있다 사납게 깨어났다. 최홍서의 어깨가 불규칙하게 들썩거렸다. 어깨를 떨며 무너져 흐느꼈던 그때처럼. 그러나 울음은 아직이었다.
“......”
흐린 빈 하늘을 날아가는 새 사진에서 최홍서의 시선이 멈췄다.
자카르타에서 찍은 사진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장소를 특정할 만한 어떤 것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구름뿐인 하늘에 이름 모를 새가 홀로 날아간다. 그 새조차도 아주 작게 보일 뿐이었다.
사실 최홍서의 눈길을 진짜 잡아끈 것은, 그 사진과 나란히 꼭 붙은 다른 사진, 람파스의 사진이었다.
나무였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빈 나뭇가지. 나뭇잎은 거의 다 떨어져 헐벗었지만 여전히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나무의 팔과 품. 빈 하늘을 날고 또 나느라 지쳐버린 새에게, 이곳에 와서 날개를 쉬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새와 나무는 서로 연결된 하나의 작품처럼 나란히 함께였다.
그제야 뜨거운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흐르지 못하고 눈가에 맺혀 계속해서 몸집을 불린 눈물방울은 진주알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그것은 뺨을 거치지도 않고, 바닥을 향해 곧장 무겁게 낙하했다.
방콕 호텔 객실에서 스콜11)이 쏟아지는 창밖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그 객실이었다. 퍼붓는 빗줄기에 도시는 부옇게 가려져 있었고, 모든 불빛이 번져 있었다. 짙은 안개가 드리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람파스의 사진이 이번에는 그 아래에 나란히 함께였다.
거친 파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바다의 흑백 사진이었다. 집채만 한 격랑은 해변에서 이 사진을 찍고 있을 사람을 당장이라도 삼킬 것 같았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예술을 잘 모른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멋지게 감상할 줄은 모른다.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그저 전해지는 감정만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아주 큰 슬픔 속에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저 파도에 삼켜져 있다는 것을.
최홍서가 남긴 사진에 사진으로 화답하듯, 그렇게 짝을 이루고 있었다.
“이걸로 찍는 건 메신저로 공유하지 말고,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직접 보여 주는 걸로 하자. 응?”
“아니면, 나중에 같이 공동 전시회를 해도 좋고.”
‘람파스’의 전시회를 꼭 보러 가겠다던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생각만으로 이곳까지 달려왔는데. 그는 더 많은 약속의 실현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울음이 스콜처럼 시야를 흐려놓았다.
이것은 그의 사랑이었고, 약속의 실천이었다.
그의 사랑 속에 파묻혀 있음을 알았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시선으로 쓰다듬으며 오래 바라보았다. 핸드폰 카메라에 정성스럽게 담기도 했다. 그런 뒤에는 창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홀의 저쪽 구석까지 가득 채웠던 햇빛이 썰물처럼 서서히 밀려났다. 길게 뻗은 최홍서의 발끝까지 밀려난 햇빛이 무릎을 지나 허벅지까지 빠져나올 때까지. 그렇게 그곳에 앉아있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천국이고, 동화 세계이고, 이해성의 품속이었다. 그곳이 너무 좋아서, 자기의 무덤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해성이나 최홍서를 특정할 만한 사진은 어떤 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삭제한 메모리를 복구했다면 걱정할 거 없었다. 마지막까지 지우지 못해 망설였던 서로가 서로를 찍어 주었던 모습. 그 사진들도 무사히 전부 되살아났을 것이다.
사진을 지운다고 해서 그를 잊을 리는 없다고, 자신의 존재를 잊는다 해도 그를 잊을 리는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던 기억이 감정을 흔들었다.
고개를 들고, 등을 기댄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법 큰 규모의 상점 건물이 바로 길 건너에 내다보였고, 건물 주차장에 심어진 야자수 위로 태양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붉게 젖은 태양이 공기 전체를 주황빛으로 물들여가는 것을 바라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몇 시간이나 그곳에 그렇게 있었는지도 체감할 수가 없었다. 고작 십 분 정도였던 것 같기도 하고, 평생을 있었던 것 같기도 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갤러리를 지키는 그녀는 카운터 뒤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있었죠?”
“이리 와서 차 한잔 마시고 가요.”
그녀는 아무 상관 없다는 얼굴로 웃으면서 카운터 앞의 소파를 가리켰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알고 배려해 준 건지, 최홍서가 차를 마시는 동안 그녀는 말을 걸지 않았다. 아마도 판매된 작품들인지, 이런저런 그림을 차례대로 포장해 나갈 뿐이었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허브차는 눈물을 흘리느라 빠져나간 수분을 채워주고, 격렬하게 일어났던 감정도 가라앉혀 주었다. 이곳에 찾아오기까지 느꼈던 불안과 긴장은 어느덧 사라지고, 오히려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편안했다.
그녀가 포장을 마친 작품들을 카운터 밖으로 옮기려 하기에 최홍서는 거의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고 얼른 일어났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고마워라.”
예닐곱 개의 작품을 출입문 옆쪽에 잘 세워두고 나자, 이제는 정말 노을이 진하게 지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내일도 또 와도 될까요?”
“미셸.”
“......”
“미셸이라고 불러요.”
“내일도 또 와도 될까요, 미셸?”
“물론이죠. 보시다시피 우리 갤러리는 아주 한가하거든. 관람객은 언제든 환영이에요. 특히나 먼 곳에서 온 귀한 손님이라면 더더욱.”
“감사합니다.”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표정과 말투, 몇 개의 단어로 미루어 자신을 환영한다는 의미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며칠 더 시간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매일 찾아올 생각이었다.
“우버?”
“아니요. 호텔, 우버, 노.”
짧은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뜻을 알아들은 그녀는 고맙게도 전화로 택시를 불러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우버가 아닌 다른 택시 앱도 소개해 주었다.
호텔 로비에서는 역시나 누구도 최홍서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도어맨이 있다고는 해도 호텔에 도착하는 모든 방문객을 정중히 환영하는 그런 오성급 호텔이 아니었다. 최홍서에게 단호하게 우버는 안 된다며 택시를 불러주었던 도어맨은 로비에서 어느 가족 투숙객의 기념사진을 촬영해 주고 있었다. 최홍서에게 하던 것과는 다른 사람처럼 친절한 모습이었다. 팁을 받은 그는 멀어지는 가족의 꽁무니에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최홍서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별 감흥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낡고 우중충한 객실로 돌아가 곧장 침대 위에 쓰러졌다.
장거리 비행에 종일 잔뜩 긴장해 있었던 데다, 20시간 이내에 먹은 음식이라곤 약간의 기내식뿐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식욕이 없는 것이 아니라 허기를 느낄 수 없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이불도 덮지 않은 채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빨리 내일이 되어서 다시 또 람파스의 전시에 가고 싶다는 기대감뿐이었다. 내일은 좀 더 여유를 갖고 기념품도 둘러봐야지. 차를 마시면서 보니까 머그컵도 있는 것 같던데...
그런 생각으로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은 전날보다 좀 더 일찍 호텔을 나섰다. 식사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으로 해결했고, 숙면을 취한 뒤라 그런지 피로도 한결 덜했다.
호텔 뒤의 쇼핑몰까지 걸어가서 미셸에게 줄 작은 꽃다발을 산 다음, 앱을 이용해 택시를 호출했다. 어제와 달리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갤러리까지 가는 동안 택시 안에서 시트에 등을 기대고 바깥 풍경을 구경할 정도의 여유도 생겼다. 사람들이 흔히 LA 하면 떠올리는 그런 아름다운 경치는 아니었지만, 목적지가 아름다우니 여정은 상관없었다.
다행히 미셸은 소박한 선물을 아주 기뻐해 주었다.
“어제 너무 감사했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받아주세요.”
미리 번역기로 찾아보고 연습한 대로 더듬더듬 얘기했다. 보라색, 주황색, 노란색 각양각색의 국화에 코를 묻고 향기를 맡던 그녀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생각을 다 했을까. 선물도 받았으니까 오늘도 얼마든지 천천히 있다가 가요.”
할머니 댁에 놀러 와서 자신의 아지트인 다락방으로 달려가는 손자처럼. 최홍서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어제만큼 떨리고 설레는 건 똑같은데, 어제처럼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있었으니까. 숫자를 셀 필요도 없었다. 얼른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계단을 예닐곱 개 정도 남겨두고, 최홍서는 다음 계단을 밟지 못했다. 가볍게 쥐고 있었던 가방끈도 손마디가 노랗게 질릴 만큼 꽉 틀어쥐었다.
어제처럼 햇살이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온통 하얀 공간 속에 그가 서 있었다.
새와 나무의 사진 앞에서. 함께 남산을 걸었던 그날 입고 있었던 아이보리색 보트넥 니트를 입고. 계단에서 멈춰버린 최홍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사되는 빛 속에서, 그는 천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