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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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
“네.”
“어디 보자... 한국인?”
“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택시 운전사는 쾌활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짧게 물었다. 잔뜩 긴장한 최홍서는 짧게 대답했다.
외관 이곳저곳이 찌그러진 택시는 실내 역시 처참했다. 좌석의 쿠션이 군데군데 터져있고, 오랫동안 청소를 해주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으며 시트는 담배 냄새에 찌들어 있었다. 그 상황에 대항해 최홍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반쯤 열린 창문을 더 내리는 것뿐이었다.
한국의 봄, 가을을 떠오르게 하는 캘리포니아 남부의 11월 공기가 실내로 가득 들어찼다. 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쾌적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편안히 즐기기에는 긴장감이 극심했다.
등을 좌석에 기대지도 못한 채 가슴 앞을 가로지른 가방끈을 꽉 붙들고 구글맵을 실행한 핸드폰만 내려다보았다.
“왜 시내 쪽에 묵지 않고 이런 외진 데에 왔어요? 후미진 호텔 카지노에 처박혀 슬롯머신이나 돌리는 중독자로는 안 보이는데. 아, 친척이라도 만나러 왔나?”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남자가 껌을 질겅거리며 뱉는 대부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영어를 잘 못해서요.”
더듬거리는 최홍서의 대답 뒤에 남자가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힐끔거렸다.
“투어, 투어 안 필요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할리우드, 코리아 타운, 유니버설 스튜디오. 투어. 싸게 해줄게요.”
최홍서의 영어 실력에 맞춰 단어 몇 개로만 얘기하면서, 기사는 내내 투어를 권유했다. 말이 권유지, 낯선 이국, 번화가도 아닌 한적한 변두리 도로 위를 달리면서 단둘뿐인 택시 안에서 계속되는 요청을 듣고 있자니 점점 강요로 느껴졌다.
호텔 내부로는 우버(Uber) 차량이 들어올 수 없다고 되어 있어서 호텔 측에 부탁해 부른 택시였다. 그래도 호텔에서 불러준 택시라면 믿을 만하겠지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던 모양이다. 터덜거리며 호텔 정문을 향해 진입하는 택시를 봤을 때부터 불안했는데 결국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최홍서를 태운 후, 기사가 도어맨에게 얼마쯤의 돈을 넘겨주며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을 봤는데, 그게 아마도 손님을 태우게 해준 것에 대한 수수료였던 것 같다.
“노 투어? 그럼 식당.”
“괜찮습니다. 호텔로 바로 돌아갈 겁니다.”
“베리 나이스 씨 푸드 레스토랑.”
5분 내내 투어를 강요하던 기사는 이제 방향을 틀어 식당을 추천하고 나섰다. 엄지를 연신 치켜 보이며 어떤 해산물 레스토랑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그곳에 손님을 데려가면 어느 정도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호텔에서 갤러리까지는 자동차로 고작 8분 거리였다. 그 8분 동안에 이렇게 진땀 빼는 일이 생기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택시는 파란색 차양을 단 어느 레스토랑 앞에서 멈춰 섰다.
“식당. 점심. 굿. 베리 굿.”
기사는 뒤를 돌아보고 식당을 가리키며 다시 또 엄지를 치켜세웠다. 최홍서는 핸드폰 액정 속의 목적지를 가리키며 간절한 표정으로 거의 애원했다.
“아니요. 저는 배고프지 않습니다. 이곳으로 가주세요. 부탁합니다.”
이미 초반의 쾌활했던 말투를 내버린 지 오래였던 기사는 이번엔 완전히 험악해진 말투로 핸들 위를 두드리며 화를 냈다.
“여봐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왜 굳이 호텔에 수수료까지 지불하면서 관광객을 태우는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재수가 없으려니까. 내려요! 그딴 앱 들이댈 거면 알아서 걸어가쇼!”
여기까지 달린 택시비뿐만 아니라 도어맨에게 지불한 수수료까지 물어내라고 기사는 펄펄 뛰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돈을 좀 줘서라도 빨리 기사와 헤어지고 싶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최홍서를 길 한가운데 내버려 두고 떠나면서도, 기사는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마지막까지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최홍서는 그가 가버렸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를 느꼈다.
구글맵의 안내대로라면 갤러리까지는 도보로 15분 정도였다. 길도 복잡하지 않아 충분히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전 일은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이동하면서도 일반 택시를 이용했었고, 그 기사는 아주 친절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의 최홍서는 이 정도 일로는 기가 죽지 않을 만큼 들떠 있었다. 정신이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으니 그 외의 다른 일들은 뭐가 됐든 크게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 것이다.
구글맵에 의지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도로가를 따라 차들이 주차되어 있을 뿐, 살짝 음산하게 느껴질 만큼 걸어 다니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거리 어느 곳을 보아도 관광객이 다닐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번화가는커녕 상점가조차도 아니었기에 거리에는 활기가 전혀 없었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문을 닫은 상점의 창문에 기대서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최홍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자기들끼리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저 그들이 자기에게 말을 걸거나 따라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비교적 밝은 분위기의 닭고기 요리 체인점 앞에서 길을 틀었다. 거기서부터는 쭉 직진하기만 하면 갤러리였다. 11월이라고는 해도 한낮의 볕을 쬐며 걷는 동안 반팔 티셔츠의 등이 축축해졌다. 앞만 보고 계속 걸어 나갔다.
드디어 눈에 익은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홍서로 살아있었던 시절부터 구글맵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해 찾아보았던 덕에, 갤러리 주변 한 블록 이내의 건물들은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거의 반쯤은 달리다시피 걸음이 계속 빨라졌다.
패스트푸드 식당을 오른쪽에 두고 마지막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멕시칸 식당의 주차장 너머로 드디어, 붉은 흙을 덧바른 아담한 2층 건물이 눈에 보였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단순히 뛴다기보다는 벅차올랐다. 심장이 너무 부풀어 위로 밀려 올라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실제로 존재할 리가 없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 장소를 직접 눈으로 본 것 같은, 그런 기적적인 감동이었다.
긴장도 피로도 불안함도 그 순간 모두 사라졌다.
신호등의 불빛을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 천천히, 갤러리로 다가갔다.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모든 창문에 시트지를 발라놓은 멕시칸 식당 앞을 지나, 창문마다 빽빽한 철창을 매단 빨래방 앞을 지난다. 삭막하게 느껴지는 거리의 분위기와 동떨어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남부를 연상하게 하는 사랑스러운 2층 건물 앞에서 마침내 걸음을 멈춘다. 이 순간을, 이 길을 걷는 내 모습을, 얼마나 여러 번 상상했던가.
“......”
아치형의 갤러리 창문에도 역시 철창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창문에 붙은 포스터 한 장이 최홍서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컴백.
람파스의 사진전 일정을 알리는 간단한 포스터였다. 보통의 전시회 포스터가 그렇듯 대표 작품이라도 한 장 포함되어 있을 법도 한데. 일정을 알려주는 안내문에 가까운 포스터였다. 그러나 최홍서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포스터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확인 도장 같은 것이었다. 약속을, 이전 삶에서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드디어 완성할 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포스터를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창문 안쪽에서 시선이 느껴져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미소와 함께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짧게 고개를 숙인 후, 하얗게 칠해진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코끝에 걸친 돋보기 너머로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그녀의 모습 역시 방문객들이 구글맵에 등록해둔 사진 속에서 보아왔던 그대로였다. 황량한 바깥 풍경과 달리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갤러리 실내는 동화 속 세상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천천히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람파스의 사진전을 보러 왔는데요.”
“지나가다 들른 손님은... 아닌 것 같고.”
그녀가 안경을 벗어 카운터 위에 내려놓으며 곧바로 이어 말했다.
“하긴, 우리 갤러리를 지나가다 들른다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안경을 벗은 맑은 회색 눈동자가 미소를 머금고 최홍서를 깊이 살폈다. 그리고 안경을 쥔 손으로 위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시는 2층에 준비되어 있어요. 올라가서 천천히 둘러봐요.”
“저, 입장료나 그런 건...”
“그런 건 없어. 얼마든지 편하게 봐요.”
“감사합니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려던 손을 거두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2층으로 이어진 좁고 가파른 계단을 느릿느릿 오르기 시작했다. 난간이 없는, 양쪽이 벽으로 막힌 형식의 계단이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몸으로는 갈 수 없는 곳, 천상으로 이어지는 비밀의 계단이라도 만난 것처럼. 기분은 거의 성스러웠다. 가방끈이 비틀리도록 꽉 쥐었다. 서서히 2층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좁고 긴 복도처럼 생긴 홀 끝의 커다란 창으로 햇살이 풍부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온통 하얀 벽에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계단의 정상에 올라서서도 최홍서는 단번에 작품들에 눈길을 주지 못했다. 유행에 한참이나 뒤처진 오래된 회색 타일을 내려다보며 홀의 정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각오를 했었다. 각오를 해도 눈물을 참지 못하리라는 각오까지도 했었다. 그러나 각오의 각오의 각오도 소용없었다.
꽉 틀어막혀 있던 숨을 겨우 토해내듯,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밖으로 말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