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최홍서는 눈물을 훔쳐낸 손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그리고 그 손을 슬며시 펼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손이 내려다보였다. 몸은 달라졌다. 사랑해. 그가 손끝으로 새겨주었던 예전의 그 몸이 아니었다.
그 몸은 생명을 잃고, 먼 이국땅에서 화장되어, 저 봉안당에 유골로 안치되어 있었다. 정신은 이토록 멀쩡히 이곳에 살아있는데도 말이다.
섬뜩함에 전신이 한번 크게 부르르 떨렸다.
최홍서였던 기억과 감정은 이 몸 안에서 그대로 연장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느 한 군데 빠진 부분 없이 전부 온전했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경험과 그 경험의 대상을 향한 마음과 의지도 여전했다. 오직, 정신을 감싼 이 껍데기만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최홍서는 왼손 손바닥을 다시 천천히 말아 쥐었다.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어떤 상황도, 그때만큼 처참할 수는 없으니까.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 분명한 나의 끔찍한 과거를 함께 나누자고, 사랑한다고 했으니 당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해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그 과거를 기획했던 악마의 복수심 때문에 과거는 당신에게도 얼룩을 남기겠지만, 그 역시도 감수해 달라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에게 무슨 말이든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솟구쳤다.
운전석에서 아마도 이쪽 벤치를 주시하고 있을 용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봉안당에서 조성해 놓은 공원에 잠시 산책을 하고 오겠다고 얘기한 뒤, 차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거의 자연 그대로 유지된 녹지에 조성된 산책로는 봉안당 뒤의 야트막한 산으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운동 삼아 나온 주민들이 몇몇 눈에 띄었었는데, 갑작스레 낮아진 기온 때문인지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공원으로 들어간 최홍서는 점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당근판매자님.
그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적은 있어도, 감히 ‘윤혜안’ 쪽에서 먼저 이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 적은 없었다.
‘최홍서’로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이 번호를 하나하나 눌러 나갔던 일을 기억한다. 결국은 끝까지 누르지 못한 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번호.
다섯까지 천천히 세면서 각오를 다진 것이 무색하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순간 낙담하기는 했지만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용기를 냈을 때 밀어붙여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준비해 주었던 뉴욕의 의사와 상담을 진행하면서, 일정이나 장소를 정하기 위해 강 실장과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그 번호가 아직 남아있었다. ‘강 실장님’이라고 저장된 번호를 연결했다. 어쩌면 최홍서에게는 이해성 부사장보다 더 어렵고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 윤...혜안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 짧은 인사말에서 ‘그런데 당신이 무슨 일로?’라는 의아함이 느껴졌다. 그것에 잠시 주춤했지만 주먹을 꽉 쥐고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실례되는 줄 알지만... 혹시, 부사장님과 얘기할 수 있을까 해서요.”
[무슨 일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부사장님께 꼭 드려야 하는 말씀이 있어요. 정말...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부사장님의 전화가 꺼져 있어서요.”
아무렇게나 귀찮게 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부사장님의 개인 연락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어필해 보았다.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걸려 온 전화를 부사장님께 연결해 드리거나 말씀을 전해드리는 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예상대로 무미건조한 기계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최홍서는 걸음을 멈췄다. 두 손으로 전화를 붙잡았다.
“어떻게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부사장님께서... 만나러 오라고... 직접 찾아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연락이 안 돼서 그래요. 정말입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의도도 아니긴 했지만, 강 실장의 동정심을 끌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목소리가 떨리든, 눈앞에서 상대가 죽어가든, 강 실장은 원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걸. 그 정도는 최홍서도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물러날 수 없었다. 직접 찾아오라고 했으면서, 이해성은 전화기를 꺼두었다. 그건 자신과 통화할 생각이 없다는 거부를 나타내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강 실장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믿어 주세요. 만날 약속을 정할 정도의 시간, 정말 잠깐이면 되니까, 아저... 어떻게 하면 부사장님 뵐 수 있는지, 그것만요. 부탁드립니다.”
단칼에 잘라내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강 실장이 변화 없는 목소리로 평이하게 말했다.
[부사장님께서 직접 찾아오라고 말씀하셨다면, 의미가 있겠죠. 그렇게 말씀하시고서 연락 수단을 차단해 두셨다면, 그 역시도 의미가 있을 테구요.]
“......”
[말씀을 뜻 없이 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 정도뿐입니다. 그럼.]
이해성과의 유일한 연결 끈으로 느껴졌던 강 실장과의 통화가 끊어져 버렸다.
직접 찾아오라고 했으면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전부 차단해 버리는 것은 언뜻 모순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강 실장의 말이 옳다. 이해성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기분 따라 지껄여놓고 사람을 곤란하게 할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의미... 의미...
낮은 경사의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면서, 그날 그가 했던 말들을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곱씹어 보았다.
“날 만나고 싶으면, 그럼 이번엔 직접 나를 찾아와요.”
“......”
“약속을 지켜요.”
약속. 어떤 약속을 말하는 걸까. 최홍서였던 과거의 약속?
“그러니까 구해줘요.”
“......”
“공주는 눈 감고 기다릴 테니까.”
어딘가에서, 약속의 장소에서 기다리겠다는 의미였을까?
가시덤불 너머 오래된 낡은 성의 꼭대기에서, 일곱 난쟁이들이 도시락을 가지고 일터로 떠난 작은 집에서, 혹은, 마을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폐허가 된 외딴 성에서, 마법에 걸린 야수의 모습으로. 긴 고독 속에서.
어디에 있어요? 어디로 찾아가면 돼요? 내가 바보인 거 알면서.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가 남긴 말의 ‘의미’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이 한심했다.
산책로는 산에서부터 내려온 좁은 실개천 위에서 다리로 이어졌다. 그곳에 잠시 멈춰 난간을 붙잡고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한강 위를 긁으며 지나가고, 강 너머에는 이쪽처럼 야트막한 산이 돋워져 있었다. 깨끗하게 닦인 하늘 위를 긴 꼬리구름, 비행운이 가로질렀다.비행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비스듬히 하늘의 옆구리를 갈라 상처를 낸 그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난간을 쥐고 있던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람파스.
혜성.
꼬리별.
전율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너무 흥분한 탓에 점퍼에서 다시 핸드폰을 꺼내다 두 번이나 단말기를 떨어뜨렸다.
여러 가지를 약속했었다. 전부 이루어지지 못한 약속들이었다. 하지만 이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나에게만 얘기해 주었던 비밀 중의 하나.
자꾸만 앞질러 가려 하는 호흡을 늦추려 애쓰면서, 인터넷 앱을 실행했다.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아기자기하게 정성을 쏟은 홈 화면은 눈에 익은 그것이었다. 느린 속도로 팝업 창이 나타났다.
람파스 개인 사진전
《Come Back》
20xx. 11. 5 ~ 1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