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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25)화 (125/185)

125화

 “왜요? 내가 괜한 짓을 했습니까?”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의 어투와 표정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괜한 짓이 아니라는 대답 외에는 수용하지 않겠다는, 은근한 압박이 담긴 눈빛이었다. 이미 결정을 내렸고, 그것에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수용할 필요 없이 밀고 나갈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지배자의 얼굴. 과거의 최홍서는 이해성에게서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최홍서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요.”

 그의 머리가 살짝 기울어졌다.

 “뭘 말이죠?”

 “부사장님이랑 제가 뭔가 관계가 있다고...”

 “실제로 관계를 가졌죠.”

 겹쳐 꼰 다리 위에 한 손을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소서 위의 커피잔을 쥔 그의 자세는 흠잡을 데 없이 우아했다. 아름다운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는 간밤의 섹스를 건조할 만큼 담담하게 입에 올렸다. 다음 순간, 어깨에 힘을 빼면서 표정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야 그 나름대로의 작은 농담이었음을 알았다.

 “신경 쓰여요? 사람들 눈이나 말이?” 

 의외의 행동에 놀랐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이 갖게 될 의문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건 최홍서도 마찬가지였다.

 “윤ㅎ... 제가 과거 소문이 안 좋잖아요. 괜히 스폰서라거나 그런 소문이 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신경 쓰여요? 사람들이?”

 “......”

 다른 사람들이나 소문 같은 건 집어치우고, 네 마음에 대해서만 말하라고. 그러면 된다고. 그의 눈빛과 표정이 말보다 더 단단하게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최홍서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요.”

 마침내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었는지 그가 약간 턱을 치켜들면서 등받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댔다.

 소서 위에 올린 커피잔의 손잡이를 쥐고 잔 가장자리를 문지르는 엄지손가락의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이해성이 이상하게 자꾸 챙겨준다고. 부담스러울 정도라고. 사람들한텐 그렇게만 말해요.”

 “......”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가면서 그는 눈썹을 치떠 최홍서를 보았다.

 “마저 먹어요.”

 아주 간단한 일이라는 듯. 사람들의 시선이나 소문 따위는 주먹으로 마카롱을 으깨는 것보다 더 쉽게 처리해 버릴 수 있다는 듯.

 과거의 이해성은 부드럽고 젠틀한데다 상대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낮춰 장난기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이상적 재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 반해 지금의 그는 악당 역할의 재벌 같았다.

 “아까 보고도 그래요? 결국 나도 필요할 땐 내 위치를 이용해서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에요.”

 언젠가 그 스스로 했던 말처럼, 지금의 그는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위해 가진 것을 사용하고 휘두를 준비를 완전히 마친 사람 같았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홍서에게 그가 악당이 될 수는 없었다. 분위기가 그렇게 달라졌다는 의미였을 뿐.

 식사하는 내내 어젯밤의 일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천재 작곡가가 갑작스레 떠오른 악상을 잊지 않기 위해 함부로 휘갈긴 악보처럼, 그것은 최홍서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섹스 도중부터는 의식이 희미해지고 흩어져 그의 삽입을 견디며 헐떡거리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이전에 그가 던졌던 의미심장한 말들은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그래서, 사람들의 얘기는 신경 쓰지 말라고. 저런 말들을 하는 것일까. ‘윤혜안’을 위해서 이해성이 그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려 한다는 것은 이상했다.

 입 안에 밀어 넣는 전복죽의 고소한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북엇국의 시원함도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그저 기계적으로 수저를 움직이고 저작 운동을 할 뿐이었다.

 그것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대와 희망으로 인한 떨림이었다. 불안이나 공포 때문이 아닌.

 식사 후 이해성은 당연하다는 듯 최홍서를 데려다주려고 했다.

 집까지 그린 먼 거리도 아니니 택시를 타고 가면 된다고 하려던 최홍서는 그만두었다. 타협할 생각이 없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도리어 의도와 달리 귀찮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간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것도 재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생각에 깊이 잠긴 얼굴로 운전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11월이었다. 새벽 공기는 선선함을 넘어 어느새 싸늘하게 느껴졌다. 새벽은 더디게 흘러오고 있었다. 밤사이 퍼부었던 비는 세력이 약해졌지만, 여전히 와이퍼가 필요할 정도로는 내리긋고 있었다.

 침묵은 편안하면서도 조마조마했다. 최홍서는 가끔씩 그를 쳐다보았고, 그럴 때마다 그는 시선을 느끼는지 이쪽을 돌아보았다. 억지로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일 때마다 그는 아파 보였다.

 오피스텔 공동현관 앞에 내려주는 대신, 이해성은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최홍서와 함께 내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함께 걸었다.

 “들어...가실 거예요?”

 현관 앞에서야 최홍서는 겨우 용기를 내 물었다.

 팬츠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그가 빨리 문을 열라고 재촉하듯 최홍서의 등 뒤로 바짝 다가왔다.

 “현관 안까지만.”

 블라인드를 내리고 살을 비스듬히 열어둔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티파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최홍서가 귀가했다고 해서 마중을 나오는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좁은 현관에 선 채 서로 마주 보았다. 최홍서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못마땅했다. 가볍게 혀를 차고는 오른손으로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울어서 엉망이네.”

 “괜찮아요. 특별히 스케줄 없어서.”

 최홍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씩씩한 말투였다. 차분하다 못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순간 튀게 느껴졌을 정도로. 그래도 열심히 눈을 맞추고 피하지 않았다. 이제 곧 그는 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부은 눈가를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최홍서의 얼굴을 구석구석 꼼꼼히 살피던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짧게 웃었다.

 “할 말 있으면 해요.”

 “다음 대본 스터디 때... 오실 거예요?”

 하고 싶은 말이 겨우 그거였냐고, 그는 헛헛하게 웃었다.

 “내가 갔으면 좋겠어요?”

 최홍서는 진지함을 담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성은 말없이 그런 최홍서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았다. 머리 위의 센서가 꺼질 때까지.

 더욱 짙어진 어스름 속에서 그의 눈빛이 빛나고 입술이 움직였다.

 “사람마다 말투란 게 있죠.”

 “......”

 “말투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에는 각 개인 특유의 ‘투’가 있어요. 걸음걸이도 제각각이고, 당황했을 때 짓는 표정, 불만스러울 때 입술이 삐죽 올라가는 각도, 감정을 인내할 때 턱이 단단해지는 정도... 그런 미세한 특징 하나하나가 모여서 그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한 사람의 ‘투’를 만들어 내죠.”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허스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풀어가는 이야기는 듣기 좋았다.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본가에서 지낼 때는 복도에서 슬리퍼를 끄는 소리만 듣고도 그게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 아니면 고용인인지를 구별할 수 있었어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이해성이 준비해 준 새 숙소로 옮기기 전, 예전 숙소에서 최홍서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만 듣고도, 매니저인지 정지인인지 현수인지, 아니면 위층의 주인 할머니인지 다 구분할 수가 있었다.

 “특징적인 몇 가지 말투나 표정, 습관은 모사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 고유의 미세한 ‘투’를 전부 베낀다는 건, 그런 건 불가능해요.”

 그의 목소리는 순간적으로 매우 조심스러워졌다. 울창하고 적막한 숲에서 맑고 귀한 물을 두 손으로 살며시 떠 올리듯이.

 “예를 들면, 조금 전에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나, 지금 이렇게... 맹목적인 애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표정... 그런 거 말입니다.”

 말끝에 그는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웃으며 검지와 엄지로 최홍서의 코끝을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구부정하게 상체를 숙였다. 커다란 벽이 눈앞으로 스윽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움직임에 머리 위에서 주황색 센서가 다시 불을 밝혔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 위에서 음영이 더욱 진해졌다.

 “날 만나고 싶으면, 그럼 이번엔 직접 나를 찾아와요.”

 “......”

 “약속을 지켜요.”

 “약속이요?”

 그가 늘어놓는 암호 같고 비밀 같은 말들에 최홍서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당장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눈을 빛내고 마른침을 삼키고, 그를 따라 덩달아 목소리를 잔뜩 낮추면서... 황홀하고 신비로운 요정의 모험 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언변에 끌려 들어갔다.

 다시금 허리를 세우면서 그의 얼굴이 멀어져 갔다.

 “지독한 마법에서 공주를 깨우려면 결정적인 퍼포먼스가 필요하니까.”

 “......”

 “가시덤불을 헤치든, 높은 성을 기어오르든... 용과 싸워서라도, 공주를 포기하지 않고 뭔가 보여줘야죠.”

 “......”

 “자신이 왕자라는 걸.”

 그는 그 부분에서 약간 힘주어 말했다. 센서 불빛이 만들어 낸 그늘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유난히 슬퍼 보였다.

 다시 또 센서가 꺼질 때까지. 그대로 어둠 속에 마주 서서 서로를 올려다보고 내려다보았다. 논리로 그의 암호를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눈빛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그의 감정과 사고가 있는 그대로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최홍서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그에게 집중했다.

 공주를 포기하지 않고 뭔가 보여줘야죠.

 무슨 의미인지 아직 잘 모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를 포기하지 않고 뭔가 보여줄, 그런 의지가 있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최홍서를 내려다보며, 그가 또 아프게 웃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다가와 뺨과 귓가를 전부 뒤덮었다. 예전처럼.

 “그러니까 구해줘요.”

 “......”

 “공주는 눈 감고 기다릴 테니까.”

 귀를 덮은 그의 손바닥 안에서 공기가 흐르는 소리 위로 그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물속에 잠겨 그의 구조 요청을 듣는 것 같았다. 멀게 들리는 대신, 더 진한 울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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