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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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부
거실 쪽의 손님용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이해성은 가운의 매듭을 여미며 창가로 다가갔다. 습기를 피해 재빨리 욕실을 벗어난 탓에 가운 종아리를 타고 물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창밖에서는 도시의 검푸른 새벽 위로 여전히 빗줄기가 퍼붓고 있었다. 최홍서를 안았던 두 번째 밤처럼.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20층 아래 세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20층을 특별히 고층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남산에 지어진 호텔이었기에 한강과 그 너머 강남과 동작 일대까지 서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체감 높이는 40층을 넉넉히 웃돌았다.
입을 다문 채 무거운 한숨을 내쉰 이해성은 미니바 앞으로 가서 포트에 물을 데웠다. 다기를 꺼내 차를 마실 준비를 하며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창가의 둥근 식탁 위에는 이미 서너 잔의 차를 마신 흔적이 남아있었다.
실은 술을 좀 마시고 싶었지만, 곧 운전을 해야 했다. 점심 식사를 겸해 외국 언론사와의 인터뷰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 준비를 위해 몇 시간 내에 일단은 귀가를 해야 했다. 오늘 같은 날은 수행원을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미니바의 가장자리를 손으로 짚고 기대서서 이해성은 상체 전체를 이용해 한숨을 내쉬었다. 바를 장식한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수면 부족으로 꺼칠했다. 비서실의 잔소리를 좀 들을 것 같았다.
섹스 후, 눈을 좀 붙여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의 얼룩이 남은 얼굴로 쓰러지듯 잠든 지친 얼굴을 곁에서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잠 속에 빠진 후에도 그는 무엇이 서러운지 흐느끼듯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 얼굴에 달라붙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넘겨 주었었다.
콘돔을 갈아 끼워가면서 세 번이나 그 몸 안에서 절정에 달했으면서도, 그 얼굴을 쓰다듬는 것만큼은 허락된 일인지 자신이 없었다.
“저, 할 때... 잘 못 느낄지도 몰라요.”
그 말을 듣고 이미 놀라기는 했었지만 예상한 범위 내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된 애무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해성의 성기에 먼저 입을 대려 했고, 콘돔 없이 하자고 했다.
최홍서가 입었던 자신의 파자마를 입고, 최홍서와 공유했던 향기를 품은 채 엎드려 있던 그는 더 이상 이해성의 눈에 ‘윤혜안’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윤혜안이 아니면, 그럼 무엇인가?
“아저씨는... 흑, 이러흐, 이렇게 한 적, 없으니까... 그래서...”
그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그렇게 흐느꼈었다. 이해성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꾸며낸 어색함이나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이해성은 거기서 더 진행할 수가 없었다. 시험하듯,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최홍서처럼 안겨달라’고 했지만, 이러다가는 정말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상담을 받아야 할 건 ‘윤혜안’이 아니라 이해성 본인 같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자신이 믿고 있었던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광인이 돼버릴 것만 같아서.
그리고 자신의 맨 등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그 손끝이 움직이며 글자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을 때.
이해성은 머릿속 질문의 해답으로 제시되었던 1번부터 5번까지의 선택지에 전부 X를 그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올바른 이성과 객관성을 기반으로 작성했던 선택지들. 분명 답은 그중 하나여야만 했다.
우연이든, 어떤 노력에 의해서든, 윤혜안이 최홍서의 정보들을 손에 넣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흥미를 끌어 무언가를 얻어 내려고 한다는 것. 모든 답은 거기에서 조금씩 변형된 형태였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이해성은 6번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있을 수도 없고, 선택지에 존재하지도 않는 답.
“우리에 대해서 뭐든지 다 알고 있는, 윤혜안 씨 신 같은 사람이잖아요.”
언젠가 비꼬듯 그렇게 말했었지만, 정말로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물이 끓으면서 포트의 전원이 자동으로 차단되었다. 이해성은 물을 부어 찻잔을 데운 뒤, 그 물을 버리고 다시 잔에 물을 따랐다. 뜨거운 물을 채운 잔의 가장자리를 따라 티백을 미끄러뜨려 잔 속에 살며시 빠뜨렸다. 지나치게 강렬했던 향기는 이내 훨씬 은은해진 여운으로 후각을 감돌았다.
시간이 약간 흐르기를 기다렸다가 티백을 꺼냈다. 소서에 올린 찻잔을 가지고 다시 창가로 이동했다. 차의 향을 깊숙이 들이마시며 아주 서서히 밝아오고 있는 새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침이 오는 것을 저지하려는 것처럼, 점점 더 영역을 넓혀가는 하늘의 파르스름한 가장자리를 밀어내듯 힘주어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신이거나, 혹은 최홍서 본인이거나. 그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스로 제시한 가능성이 기가 막혀서, 이해성은 어깨를 털면서 헛헛하게 자조했다.
내가 드디어 미쳤다고, 그렇게 인정할 것인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로 차가 식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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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다.
주변에는 바람의 숨결도 없고, 소리의 진동도 없다. ‘나의 손’도 없고, ‘나의 목소리’도 없다. 그저 무언가를 보고 있을 뿐이다.
이전에 느껴봤던 감각이었다. 이 적막을, 온 우주에 혼자뿐인 듯 사무치는 이 고독감을 최홍서는 알고 있었다.
공포에 압사되는 순간, 다른 장소가 펼쳐졌다.
이번에는 시야에 사람이 가득하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녀들이 밤하늘 아래 탁 트인 공간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든다. 주변에는 고층 건물들이 만들어 내는 화려한 야경이 펼쳐져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도 최홍서는 알고 있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지가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로 매니저와 멤버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인공을 찾아 공간 구석구석을 비추는 카메라처럼 어지럽게 뒤흔들리던 장면이 마침내 최홍서의 모습을 찾아냈다.
저쪽 세계의 최홍서는 테이블에서 떨어진 몇 계단 위의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다.
위스키를 바닥까지 비운 최홍서가 머리 위 하늘을 바라본다.
아니면, X군과 부사장님을 세트로 묶어서 제공할 수도 있고. 사랑하면 늘 함께여야지.
저쪽의 최홍서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이서경의 메일. 그것까지도 훤히 읽어 낼 수가 있었다.
이쪽의 최홍서는 저쪽의 최홍서를 막아보려 발악해보지만, 달려갈 수 있는 다리도, 끌어안고 막아설 두 팔과 손도, 안 된다고 고함을 지를 목소리도 없었다.
하나, 둘... 셋... 저쪽의 최홍서가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이쪽의 최홍서는 미칠 지경이 되어 발광을 해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어떤 자그마한 파동조차 만들어낼 수 없었다. 가느다란 바람 한 줄기 일으킬 수 없다.
펄펄 끓인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관자놀이로 흐른 순간... 이쪽의 최홍서와 저쪽의 최홍서는 하나가 되어, 드디어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허억, 헉... 허으... 흑...”
최홍서는 가슴을 튕기듯 크게 부풀리면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물속에 강제로 잠겨있다 겨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것 같았다.
“가위에 눌리기라도 했어요?”
“흐으흐... 흐...”
겨우 눈동자만 굴려 목소리의 방향을 좇았다. 옷을 완전히 다 차려입은 이해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어깨를 꽉 붙잡고 있었다. 그가 깨워준 것이다. 그 끔찍한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그가 막아주었다.
윤혜안의 몸으로 눈을 뜬 이후의 일들이 서서히 최홍서의 의식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최홍서는 손을 더듬어, 자신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 이해성의 손을 꽉 붙잡았다. 거부당할 것은 무섭지 않았다. 그저 이것이 현실임을 실감하고 싶었다.
“땀이 굉장한데, 아니면 몸이라도 안 좋아요?”
“아니요... 꿈, 꿈이...”
마른침을 삼키면서 최홍서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위에 심하게 눌렸던 몸은 아직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면서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지금 몇 시예요?”
“아직 한참 더 자도 됩니다.”
최홍서는 침대 곁에 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객실을 떠날 것 같은 완벽한 모습이었다.
“더 같이 있어 주고 싶지만... 오전에 일정이 있어요.”
미간을 좁힌 그의 얼굴을 보면, 더 같이 있어 주고 싶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단순한 립서비스로 그런 말을 덧붙일 사람도 아니었고.
“그럼 저도 그만 일어날게요.”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가장자리로 엉덩이를 끌며 이동했다. 이해성의 손이 그런 최홍서의 어깨를 붙잡아 저지했다.
“더 쉬었다 가지 그래요?”
“......”
“오랜만인 것 같던데. 무리가 갔을 겁니다.”
애널 섹스가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고.
그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3초가량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직접 삽입해 보았으니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홍서는 의지와 무관하게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려 다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괜찮습니다. 안에... 하신 것도 아니라서. 금방 샤워만 하고...”
말과는 달리 바닥을 디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가 재빨리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욕실 앞까지 다다랐을 때쯤에야 최홍서는 혼자 힘으로 제대로 설 수 있었다.
“도와줄까요?”
측은한 얼굴로 제안하는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대충 땀만 씻어내긴 할 건데, 시간 촉박하시면 먼저 나가 보셔도...”
이번에는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기다릴 여유는 됩니다. 거실에 있을 테니 천천히 해요.”
그는 천천히 하라고 했지만, 최홍서는 가능한 한 서둘렀다. 콘돔을 사용했어도 그가 세 번 사정할 때까지 섹스가 이어진 탓에 몸 구석구석 강한 여운이 남아있었다. 골반뼈가 벌려져 있는 것 같았고, 허리 아래는 전체적으로 노곤한데, 구멍과 그 안쪽은 얼얼했다. 상체를 곧게 세우는 것보다 약간 구부정하게 숙이는 것이 편안했다.
그의 성기가 배 속을 끊임없이 문지르던 느낌이 얼얼함과 홧홧함으로 엉덩이에 남아있었다. 어제의 모든 일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명 같아서, 그 흔적들이 싫지 않았다.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가니, 그사이 식탁에 간단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의 손짓을 따라 맞은편 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죽과 북엇국, 자극적이지 않은 몇 가지 반찬은 의외로 식욕을 자극했다. 한나절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더욱 배가 고팠다.
두어 숟가락 정도 따뜻한 국을 떠 마셨을 때, 그가 말했다.
“재킷 안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리더군요.”
“아, 네. 아마 회사일 거예요.”
“매니저인 것 같길래 내가 받았습니다.”
“...네?”
이번엔 죽을 먹어보려던 최홍서의 숟가락이 멈췄다.
“그러지 않으면 그쪽에서도 계속 걱정할 것 같아서요.”
정작 이해성의 표정과 목소리는 태연하기만 했다.
“이상한 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
“급격하게 몸이 안 좋아져서 내가 근처에서 쉬게 하고 있다고, 지금은 잠들어 있으니 일어나면 집까지 잘 데려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해 뒀어요.”
‘윤혜안’의 몸이 안 좋다고 해서, 그 자리에 있었던 제작사 관계자들을 모두 제쳐두고, 영화의 최대투자자인 ARA 이해성이 ‘윤혜안’을 챙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 소리였다.
그는 결코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상황 설명이 상대에게 어떤 의문을 살 수 있는지 예측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한 것이다. 상대가 가질 의문을 신경 쓰지 않았거나, 혹은 상대가 의문을 가지도록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 분명했다.
ARA의 이해성이 ‘윤혜안’을 신경 쓴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 감추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최홍서의 숟가락질이 계속 멈춰 있자, 커피를 마시던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이쪽을 보았다.
“왜요? 내가 괜한 짓을 했습니까?”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의 어투와 표정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