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방콕...에요?”
[아무리 출장이라지만 홍서 너무 일만 하고 있잖아. 쉬는 날에도 호텔에만 틀어박혀 있다며.]
“......”
[아무래도 내가 가서 좀 놀아줘야 할 것 같아서.]
보고 싶었다. 만나고 싶었다. 그의 품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은 만날 수 없었다. 숨겨달라고, 나의 짐을 대신 져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방콕에 같이 가면 홍서가 가이드 해주기로 했었잖아. 짜뚜짝 시장, 카오산 로드... 스카이 바였나? 전부 데리고 가줄 거지?]
“아, 그게 저... 출장 중에 휴일이 언제가 될지 몰라서...”
[방콕에서 이틀 정도 홍서 쉴 수 있게 스케줄 좀 조정해 달라고, 명 사장에게 내가 부탁해 놨어.]
그의 입에서 명도훈의 이름이 나오자, 27층에서 낙하하는 듯 한순간 심장이 아찔했다.
최홍서가 불편 없이 지낼 수 있게 신경 써 달라고. 이해성은 명도훈에게, UB에게, 투자금 명목으로 돈을 지불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UB가, 명도훈이, 그룹이 인기를 좀 얻었다고 이런 호텔을 내줄 리가 없었다. 최홍서는 알았다. 이런 쾌적한 환경마저도 분명 이해성의 배려이리라는 걸.
이해성의 의도대로 그 돈이 전부 자신에게 쓰인다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명도훈의 실체를 모른 채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눌 이해성을 상상하면 그를 속이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신제품 때문에 바쁘시잖아요. 괜히 무리해서 저 보러 오시는 거면...”
[오너 패밀리라 좋은 건 이럴 때뿐이잖아. 나 하나 이틀 자리 비운다고 큰일 날 회사면, 그럼 진짜 큰일이게?]
입술을 뜯으며 전면창을 마주하고 있던 최홍서의 시야에서 빼꼼히 방문이 열렸다. 매니저가 조심조심 문을 열고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혹시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최홍서는 아직 통화 중이라는 의미로 전화기를 가리키고는,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이렇게 길게 떨어져 있는 건 우리 처음이잖아. 도중에 한 번은 어떻게든 시간 만들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었어.]
다정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커다란 대리석 욕조의 가장자리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욕조의 맞은편은 전면창과 맞닿아 있어, 침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카르타의 야경을 즐길 수 있었다.
“고지운 소식 때문에 저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면... 다행히 미수에 그쳤고... 생각보다는 괜찮아요.”
[응, 그건 다행인데... 그런데 내가 생각보다 안 괜찮은가 봐.]
엷은, 그리고 씁쓸한 웃음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예전에야 연예계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젠 홍서가 몸담고 있는 곳이니까 나도 관련 뉴스를 유심히 보게 되더라고. 댓글이나 사람들 반응 보면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
[우리 홍서에게 사람들이 그런... 험한 말을 한다면, 난 못 견딜 것 같거든.]
최홍서는 욕조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리석 계단을 꽉 붙잡았다.
“저에게 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겠어요.”
그리고 태연을 가장하며 그를 위로했다.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감정 이입이 심하게 됐나 봐. 별의별 상상을 다 하게 되더라고.]
“뉴스랑 댓글을 그만 보세요. 그쪽 분야로는 제가 경험자잖아요. 경험자의 조언을 들으세요.”
농담이 효과가 있었는지, 다행히 그의 웃음이 좀 더 가벼워졌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최홍서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들이마신 숨을 나누어 내쉬었다.
[혹시 홍서한테 그런 일이 생기면.]
“......”
[같이 멀리 도망가 버리자.]
최홍서의 떨리던 호흡이 잠시 멈췄다.
[모리셔스섬이나 사모아나... 아니면 폴리네시아 섬 중에 하나, 직항도 없고, 경비행기만 두세 번씩 갈아타야 하는 그런 먼 곳으로 같이 도망가서 빵집이라도 하면서 살아야지. 그런 생각도 했다니까?]
“왜... 빵집이에요?”
그의 엉뚱한 상상이 재미있는 척, 웃음기를 묻혀 묻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어느새 막이 어려 눈앞의 풍경이 모두 흐릿했다.
[홍서가 좋아하니까. 마들렌, 마카롱, 피낭시에...]
“......”
[잠도 실컷 자게 해주고, 좋아하는 음식도 실컷 먹게 해줘야겠단 생각도 했지.]
최홍서는 무겁게 매달린 눈물을 깨끗하게 훔쳐 내면서 웃었다.
“그건 이미 거의 휴가잖아요.”
다행히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밝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실컷 울고 난 뒤처럼 오히려 무언가가 후련했다.
같이 멀리 도망가 버리자.
그건 사랑한다는 고백만큼이나 최홍서 인생의 고랑을 가득 메워주는 말이었다.
회사는 어떻게 할 거냐고, 의무를 저버릴 수 있겠냐고. 그런 질문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사랑에는 검증이 불필요했다.
[웃음소리 들으니까 좋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더 좋았다. 한결 마음이 놓였는지, 그는 만남을 기약하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카오산 로드, 짜뚜짝 시장. 기대하고 있을게?]
‘투자자님’과의 5분 남짓한 통화 내역이 핸드폰 액정에 찍혀 있었다. 잠시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최홍서는 눈가에 아직 맺혀 있었던 눈물의 여운까지 매몰차게 훔쳐 냈다.
즉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려던 최홍서는 알림을 하나 발견했다.
Destiny님에게서 ‘:)’라는 제목의 메일이 수신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이서경이었다.
손끝이 극심하게 떨려 알림을 클릭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두어 번 빗나간 후에야 겨우 메일을 열 수 있었다.
안녕.
우리 홍서, 그동안 멘탈에 굳은살 좀 박였나 봐? 스캔들 풀린 거 보고도 생각보다 꽤 오래 버티네? 아니면 아직도 부사장님 믿고 뻗대는 건가?
근데 홍서야, 알다시피 난 변태라서. 네가 버티면 버틸수록 후일을 기대하며 즐거워지는데. 어쩌지? 왜냐하면, 아무리 오래 버텨봤자 결국 넌 힘이 빠질 수밖에 없고, 게임은 늘 나의 승리거든.
날짜 맞춰서 상해로 와. 또 말 안 들으면... 이번엔 유튜브에 뭐가 풀리게 될지 나도 몰라. 카더라만으로 안 끝나고 X군의 시청각 자료가 첨부될지도? 얼굴은 삭제하더라도, 글쎄... 부사장님이라면 홍서라는 걸 바로 알아보시지 않을까? 아니면, X군과 부사장님을 세트로 묶어서 제공할 수도 있고. 사랑하면 늘 함께여야지.
개는 개답게 네발로 기면서 살아야지 두 발로 걸으려고 하면 자빠져, 홍서야.
티켓, 일등석이야. 해외 스케줄 핑계 더는 안 봐줘. 이게 내 마지막 아량이야. 홍서가 이번에도 버틸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