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아, 진짜... 원래는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오늘 기사 나오고부터 매니저 형들 오버가 심해. 멤버 애들도 슬금슬금 눈치나 보고. 내가 무슨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냐고.”
얼굴을 마구 짓이겨 문지르면서 최홍서는 지친 목소리로 드물게 푸념했다.
그러나 실은 매니저들의 감시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자신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맞는 것 같았으니까.
정지인은 최홍서의 기분을 환기할 만한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그의 노력은 고마웠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오래전, 연습생이었을 때부터 단골이었던 분식집 할머니 얘기를 들으면서도 최홍서는 그리운 감상에 젖는 대신 딴생각에 깊이 빠져있었다. 도무지 다른 이야기에는 의식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형은... 너무 후회되는 일이 있을 땐 어떻게 해?”
불쑥 던져놓은 그 질문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최홍서는 싱겁게 웃으며 자답했다.
“형은 후회되는 일 같은 게 아예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런 게 없는 사람이 어딨어.]
“우리끼리는 형 보고 잘생기기도 했는데, 되게 귀티 난다고... 그런데도 숙소 생활하는 거 보면 원래 잘살았었는데 집이 망했나 보다, 뭐 그런 헛소리도 하고 그랬는데.”
정지인은 최홍서 주변에서 가장 점잖은 사람이었다. 서로가 자기 얘기를 잘 안 하는 사람들이라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그에게서는 가정 교육을 잘 받고 반듯하게 자란 사람의 품위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최홍서도 송현수도 어린애 같은 심정으로 정지인을 부러워하곤 했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정지인이라면 명도훈 같은 인간에게 잘못 걸려 신세를 망치는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기와는 달리 배운 것도 많고, 똑똑하고, 집도 부유한 정지인 같은 사람은 아무런 약점도 없이 원하는 곳에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자고 싶지 않은 상대와는 잘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게 부러웠었다.
“난 사실 형이 되게 부러웠어.”
[뭐가.]
“난 빨리 떠서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하는 톱이 되고 싶다는 독기만 가득했는데... 형은 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런 사람이었잖아.”
안락의자에 숨듯이 몸을 구기고 앉아, 최홍서는 힘없이 웃었다. 정지인도 함께 웃었고, 두 사람의 웃음소리는 곧 무거운 침묵 속에 서서히 가라앉았다.
침묵 속에서 최홍서의 마음에 잠시 동요가 일었다. 지금 정지인에게 고마움을 꼭 전해야만 할 것 같았다. 다시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함이 마음을 흔들었다.
“형은 나한테 해독제 같은 사람이었다는 거야. 알지?”
정지인은 말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전화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리라는 걸 최홍서는 알 수 있었다.
핵심을 숨긴, 뜬구름 같은 대화가 몇 번 더 오갔다. 최선을 다해 힘을 실어주려는 정지인의 노력은 물론 고마웠다. 그러나 이쪽에서 진실의 핵을 얘기하지 않는 한, 위로 역시 겉돌 수밖에는 없었다.
[홍서야.]
정지인이 문득 어조를 바꾸어 의미심장하게 최홍서를 불렀다. 멍한 눈으로 창밖의 야경에 시선을 주면서, 최홍서는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어.”
[너 만나고 있다는 사람... 혹시, 이해성 부사장이야?]
“......어?”
소파에 파묻혀 축 늘어져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무표정했던 최홍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긴장이 가득 들어찼다.
[우연히 뵐 기회가 있었는데, 만나고 있는 사람 얘기를 언뜻 흘리셨거든. 그게 왠지 너인 것 같아서.]
수십 가지 추측이 머릿속에서 들썩거렸다. 정지인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님을 안다. 정지인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저, 지금 자기의 대답 한마디가 어떤 식으로든 이해성에게 똥물을 튀길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극렬한 공포감에 오한이 끼쳤을 뿐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막연한 상상 속 공포가 아닌 바로 앞에 닥쳐온 생생한 현실이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최홍서는 웃기 시작했다. 목소리만 웃는 게 아니라, 얼굴 전체를 이용해 크게 웃었다.
“아, 그 아저씨 진짜... 강 감독님 영화 투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몇 번 식사 자리 갖고 그런 건 맞는데... 내가 좀 웃어주고 싹싹하게 굴었더니, 혼자 우리가 연애하는 줄 알더라고.”
연기를 좀 더 실감 나게 포장하려 최홍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파 주변을 빙빙 돌면서 초조함에 입술을 잡아 뜯으며 다소 과장되게 느껴질 정도로 목소리 톤을 높였다. 목소리는 가장할 수 있어도, 핸드폰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높은 분들이고, 영화 투자자들이잖아. 그럼 내가 거기서 인상 쓰고 있어? 아... 아저씨 완전 로진이야, 로진.”
[오진?]
전화 너머에서 정지인이 되물었다. 로진. 화류계에서 쓰는 은어이니 정지인 같은 사람은 알 리가 없는 단어였던 것이다.
최홍서는 전면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깊이 숙였다. 힘없이 떨구어진 손을, 그가 ‘사랑해’라고 새겨준 손을, 꽉 쥐었다.
“아니... 로진이라고... 로맨스 진상... 이쪽에선 그냥 일이니까 친절하게 대한 건데... 혼자 연애하는 줄 알고 착각하는 진상이라고.”
이유가 뭐가 됐든, 이해성을, 그의 사랑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의 존재가 텅 비는 것만 같았다. 이서경에게 개 같은 꼴을 당했던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갈가리 찢긴 가슴을 불로 태워버리기까지 하는 듯했다. 뜨거운 눈물이 끝없이 샘솟아 턱 끝에 고여 떨어져 내렸다.
왼손을 더,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안에 든 것을 절대로 뺏기지 않겠다는 듯이.
울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더 작아진 목소리로 최홍서는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아무튼, 그 아저씨는 아무 상관 없어. 그냥... 일밖에 모르는... 순진한 아저씨야.”
말아 쥔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고개를 들어 눈앞의 밤을 마주했다.
처음부터, 단 한 순간도, 이해성은 자신의 유리한 위치나 돈 따위로 나를 쉽게 어떻게 해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다. 장난기를 섞은 말투나 능청스러운 표정도 실은 그의 평소 모습이 아니라는 걸 안다. ARA의 이해성이니까, 갑 중의 갑이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덜 어려워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다. 나에게만 보여준 그의 배려고 사랑이었다.
그런 사람의 이름이 X군과 함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할 수는 없었다. 대중은 어차피 진실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최홍서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았다. 한 번 X군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면, 그 뒤에 숨겨진 더 어마어마한 진실이 드러난다 해도 사람들은 X군을 피해자가 아닌, 더러운 섹스 스캔들에 연루되었던 아이돌로밖에 기억하지 않으리라는 걸.
최홍서의 말을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깊은 한숨을 내쉰 정지인이 차분해진 말투로 말했다.
[11월 초에 윤주호 중국 출장 가.]
윤주호는 정지인이 한창 촬영 중이었던 드라마의 주연 배우였다. 그가 출장 가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만 나오는 씬을 바짝 당겨 찍고, 그 덕에 윤주호가 돌아오면 정지인의 촬영은 느슨해진다는 얘기가 이어졌다.
[그때 맞춰서 너 보러 갈게. 오래는 못 있어도 하루 이틀은 뺄 수 있어.]
“됐어. 그때쯤엔 나 방콕일 거고... 하루 이틀 있겠다고 뭐 하러 왕복 12시간을 비행기에서 보내.”
[나도 휴가 삼아 짧게라도 머리 좀 식히려고 그런다.]
“그러면 뭐... 매니저 형들한테 얘기해서 스케줄 알려 줄게.”
[그리고... 너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때 같이 보자.]
소개해 준다는 사람은 연인이 분명했다. 그동안 무미건조하게 살아왔던 정지인을 알기에 최홍서는 그 점이 순수하게 반갑고 기뻤다. 잘됐다 싶었고, 마음이 놓였다. 그 정지인의 연인이 누구인지, 정말 만나보고 싶었다.
나도 형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 얘기하려던 최홍서는 생각을 고쳐먹고 입술을 꾹 다물어버렸다.
[홍서야, 버티자. 시간이 지나면 상황도 바뀌고, 그러다 보면 지금은 답이 없어 보이는 일들도 틈이 생길 수 있으니까... 버텨야 기회도 잡는 거니까. 우리 버티자. 응?]
최홍서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저 아래 까마득히 작아 보이는 자동차와 가로수 따위를 내려다보며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
정지인과의 통화를 끝내자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티셔츠의 등이 축축하게 젖을 만큼 진땀을 흘렸다는 것도 그제야 인식했다. 최홍서는 문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기회를 틈타 X군 스캔들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포털 사이트의 앱을 켜자마자 손안에서 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이 밝아지면서 ‘투자자님’이라는 저장명이 떠올랐다.
영상통화도 아닌데,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차창에 비춰보았다. 눈물을 흘렸던 흔적을 손으로 마구 지워냈다. 심호흡을 깊게 내쉬면서 하나, 둘, 셋... 손가락을 접으며 다섯까지 숫자를 셌다. 그와의 통화 전에 숫자를 센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설레는 긴장 때문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공포 때문인 건 처음이었고.
“여보세요.”
[어? 연결됐네. 계속 통화 중이던데.]
“아, 지인이 형 전화가 와서요.”
[걱정돼서 연락 주셨나 보구나.]
“네... 그랬나 봐요.”
고지운의 자살 시도 기사가 풀린 후, 이해성과도 물론 통화를 했었다. 그는 X군 스캔들이 최홍서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고지운 일로 최홍서가 받았을 충격을 세심하게 염려했었다.
“저 방콕에 있을 때 형이 잠깐 오겠다고 하더라구요. 그 얘기 했어요.”
우울하게 틀어박혀 있기만 하는 건 아니라고, 그를 안심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밝은 화제를 꺼냈다.
[그랬어?]
약간 놀란 목소리 뒤에는 들뜬 목소리가 이어졌다.
[실은 나도 방콕에서 홍서 만나려고 물밑작업을 좀 하고 있었거든.]
전면창 앞을 천천히 서성거리던 최홍서의 걸음이 뚝 멈췄다.
“방콕...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