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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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층 스위트 객실의 마스터룸에서는 ‘겔로라 붕 카르노 단지’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야구장, 테니스장, 축구장, 양궁장, 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인 스타디움까지 갖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가장 큰 종합 스포츠 단지였다.
고급 호텔들과 쇼핑몰 등의 고층 건물들이 단지의 드넓은 부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레이어드’가 투숙 중인 호텔도 역시 그중 하나였다.
최홍서는 커다란 통창 앞 안락의자에 앉아 자카르타 도심의 환상적인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으로는 무릎 위에 올려둔 카메라를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부연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번진 도시의 불빛은 신비롭고 이국적이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물질로 쌓아 올린 풍요로움의 천국 같았다.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 객실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고,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최홍서는 쓰게 웃었다.
그런 산전수전을 겪고도 너 아직도 그렇게 순진하냐, 홍서야? 어?
이서경의 그 비아냥거림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홍서의 얼굴이 한층 더 강하게 일그러졌다.
의자에서 일어난 최홍서는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일명, X군 스캔들.
그 때문에 지금 한국은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며칠 전만 해도 명도훈은 ‘한서 그룹에서 방콕에 있는 호텔을 인수하는 문제로 이서경이 그쪽에 정신 팔려있다. 워낙 변덕도 심한 인간이니 조금만 더 해외에서 버티면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해 왔었다.
그러나 미친놈의 행보를 추측하기란 불가능했다. 명도훈의 순진한 예측, 혹은 희망은 보기 좋게 박살 나 버렸으니까.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다는 ‘X군 스캔들’의 진짜 출처가 어디인지, 최홍서와 명도훈은 알고 있었다.
아름답게 흔들리는 불빛 위로 겹쳐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최홍서는 조소했다.
호스트바 출신이라고? 지금까지 몸 로비로 일을 따왔다고?
전부 진실을 교묘하게 비껴가거나, 의도적으로 진실을 탈락시킨, 아무리 좋게 말해줘도 진실의 부스러기일 뿐인 말들이었다. 게다가, 대중들은 벌써부터 그 왜곡된 진실에 거짓을 보태 부풀리고 있었고, 아무 연관도 없는 고지운까지 X군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고지운이 정말 X군으로 몰린 것 때문에 자살 시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최홍서도 연락을 취해 보려 했지만, 고지운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하아...”
최홍서는 눈앞의 투명한 유리창에 툭, 이마를 박으며 한숨 쉬었다.
고지운이 X군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대중은 바로 다음 타깃을 물색하겠지.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이마를 창에 맞댄 탓에 시야가 아래를 향했다. 발끝 앞으로 내려다보이는 지상의 풍경이 까마득히 아찔했다.
똑똑.
무성의한 노크 소리 뒤에 곧바로 문이 열렸다. 매니저 중 한 명이었다.
“홍서, 진짜 안 먹어?”
열린 문틈으로 거실에 펼쳐놓은 음식 냄새가 새어 들었다. 역한 거부감을 느낀 최홍서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좀 더 직급이 높은 매니저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안 돼. 나와서 몇 숟가락이라도 먹어.”
단호한 명령에 최홍서는 어쩔 수 없이 거실로 나갔다. 소파 뒤쪽에 따로 마련된 넓은 식탁에서 멤버들과 매니저들이 저녁 식사 중이었다.
최홍서가 침실에서 나오자, 다들 알게 모르게 눈치를 살폈다. 그동안 연예계에 큰 뉴스가 터질 때마다 최홍서의 멘탈이 불안정해졌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자살 미수로 입원한 고지운이 ‘레이어드’의 공통된 지인이었던 탓에 분위기는 더욱 착잡했다.
그 때문에 최홍서와 몇몇 멤버는 인터넷 사용이 금지돼 있었다. 한마디로 핸드폰이나 태블릿PC를 압수당한 것이다. 걸려 오는 전화는 매니저가 선별해 바꿔주었다.
‘당근판매자님’에서 ‘투자자님’으로 바꾸어놓은 이해성의 저장명은 일단 통과 대상이긴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수시로 메신저를 주고받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어떤 말은 해도 되고, 어떤 말은 하면 안 되는 건지.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었으니까.
빈자리에 앉은 최홍서는 부드러워 보이는 수프를 몇 모금 삼켜 보았다.
“우리 나가서 술이라도 마시자, 형. 진짜 꿀꿀해서 못 참겠다!”
멤버 하나가 꾸역꾸역 쑤셔 넣던 피자 조각을 접시 위에 팽개치며 매니저들을 향해 푸념했다.
“여기서 마셔. 마시고 싶은 술 있으면 나가서 사다 줄 테니까.”
“아, 뭐 술이 목적이야? 하도 답답하니까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다는 거지. 어차피 형들이 데리고 나가면 되잖아. 그럼 걱정할 거 뭐 있어?”
한국에서 터진 스캔들로 멤버들이 심란한 것을 이해하기는 하는지, 매니저들은 거기서 더 안 된다고 못을 박지는 않았다. 가장 직급이 높은 매니저의 입에서 어렵게 허락이 떨어졌고, 그렇지 않아도 입맛이 없었던 멤버들은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식탁을 떠났다.
“홍서는? 안 가?”
매니저의 물음에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나랑 호텔에 남아 있어.”
최홍서를 감시할 매니저 한 명만 남고 모두가 우르르 객실을 떠났다. 매니저가 거실 TV 앞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손에 쥐는 것을 보고, 최홍서는 일어나 침실로 돌아갔다.
안락의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카메라를 집어 들고, 별 뜻 없이 액정 속의 사진들을 넘겨 보았다. 자카르타에서 만난 방송국 스태프들과 팬들의 모습, 싱가포르에서 찍었던 사진들도 몇 장 담겨 있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이해성이 찍어준 최홍서의 모습과 최홍서가 찍었던 이해성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최홍서는 카메라를 가지고 침대 위에 모로 누웠다.
그에게 다 말해버리자고. 너그럽게 이해받든, 차갑게 경멸당하든, 도박을 해본다 생각하고 다 말해버리자고. 그렇게 결심하고는 현지 스태프들과의 뒤풀이에서 술을 진탕 마신 적도 있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최홍서에게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그에게 전화를 걸 용기조차도 나지 않았다. 핸드폰만 붙잡으면 눈앞과 머릿속에 또렷해졌다.
억울하고 분해도, 그것은 자신의 과거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과거를 일방적으로 그에게 공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끔찍한 어둠을 포함해 나를 계속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 사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는 희생이 사랑이라고, 누구는 공유가 사랑이라고 한다. 저마다 생각하는 사랑이 제각각 다 달랐다.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조차도, 사랑을 주고받아보는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최홍서는 처음으로 알았다.
그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 그것은 결국 스스로 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무엇이 가치 있는 사랑인지, 그 기준이 자기에게는 없었다.
그라면, 이해성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최홍서에게 사랑이란 이해성에게 배운 것이 전부였기에, 그 상상에 매달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똑똑.
등 뒤에서 다시 들려온 노크 소리에 최홍서는 누운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홍서, 전화. 지인이 형.”
정지인이라는 말에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대 앞까지 걸어온 매니저가 건네주는 핸드폰을 받아 통화를 연결했다.
“형.”
[어, 자카르타라며? 거긴 어때? 인도네시아는 처음이지 않아?]
“뭐야... 지운이 기사 보고 걱정돼서 전화했구나?”
억지로 꾸며낸 정지인의 명랑한 목소리에 최홍서는 기운 없이 픽 웃었다. 그제야 정지인도 구태여 빙빙 돌려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한숨을 훅 내쉬며 걱정스레 물었다.
[뭐 하고 있어? 호텔에 박혀 있는 거야?]
“그렇지, 뭐. 나 감시한다고 매니저 형들 번갈아 가면서 보초 서고 있어.”
걱정돼서 같이 있는 거지 감시는 무슨 감시냐고, 매니저가 곁에서 투덜거렸다. 최홍서는 실랑이 끝에 그를 방에서 내쫓았다. 문밖으로 밀려나면서도, 매니저는 통화가 끝나면 바로 전화를 가지고 나오라고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로소 혼자 남은 최홍서는 창문 앞 안락의자로 가서 푹 주저앉았다.
“아, 진짜... 원래는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오늘 기사 나오고부터 매니저 형들 오버가 심해. 멤버 애들도 슬금슬금 눈치나 보고. 내가 무슨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