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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17)화 (117/185)

117화

 “별일 없는 거지? 왜 이렇게 너랑 길게 얘기할 시간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

 “그러게, 누가 일부러 방해라도 하고 있나 봐.”

 최홍서는 일부러 장난기를 더해 정지인의 눈을 피하며 덧붙였다.

 “어쩔 수 없지. 형도 나도, 데뷔 후 제일 바쁜 시기잖아.”

 “그래... 그건 좋은 일인데...”

 화려한 메이크업과 의상, 그리고 그것들로 감춘 피로한 다크서클과 유난히 마른 몸을 차례대로 살피는 정지인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느껴졌다. 하지만 물론 최홍서는 그 다정한 관심을 모른 체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바라던 거 하나씩 다 이뤄가고 있잖아. 부탁이니까, 댓글만 제발 보지 마. 어?”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염려에 최홍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스듬히 시선을 꺾은 채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던 최홍서는 문득 어조를 바꾸어 힘준 목소리로 정지인을 불렀다.

 “형.”

 “......”

 “나 싱글 홍보 때문에 당분간 해외 스케줄 위주로 돌게 됐어. 국내에 잘 못 들어올 거야. 오더라도 잠깐 들르는 정도?”

 “해외에서도 음원 반응 좋다는 기사는 봤어.”

 “드라마 때문에 바쁜데 그런 것까지 챙겨봐 주고. 역시 형밖에 없다.”

 정지인에게라도 털어놓을까? 다 털어놓고 상담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보다 더 많이 배우고, 나보다 더 훌륭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형이라면... 나 같은 바보가 생각해 내지 못할 그런 지혜로운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한다는 게, 그것도 해본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슷한 처지인 현수와는 차라리 덤덤하게 공유할 수 있어도, 자기의 처지가 짐이 될 사람에게는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그건 너무... 염치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습관적으로 메이크업이 지워지지 않고, 헤어가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땀을 찍어 닦아내면서 최홍서는 양 입술 끝을 당겼다.

 “형이 찍은 광고 행사에 ‘레이어드’가 와서 게스트로 공연도 하고. 몇 개월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치?”

 두 사람 다 잘돼서 기쁘다는 듯 웃어 보이기 위해서는 창자까지 비틀어가며 애를 써야만 했다. 새 싱글이 이렇게 잘되고 있는데도 당분간 해외 스케줄이 주가 된 진짜 이유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해성에게도, 정지인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으니까.

 정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어주었다. 먼저 말하지 않는 부분을 파고들지 않아 줘서, 그러면서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대해줘서, 그래서 늘 정지인이 고맙고 편했었다. 그건 그 순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이라도 더 하고 싶은데,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음을 깨달았다. 정지인의 눈을 보지 못하고 시선은 자꾸만 무겁게 아래를 향했다.

 “홍서야, 주차장에서 기다리신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가 이쪽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공항으로 가기 전, 이해성과 잠깐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출국 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형, 미안.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어, 그래...”

 정지인 역시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성을 만나러 가기 위해 복도의 모퉁이를 꺾어 돌면서, 최홍서는 마지막으로 정지인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서 있던 정지인이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늘 같은 자리에서 편안히 웃어주는 사람. 최홍서가 아는 정지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행이었다. 모퉁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 최홍서는 한순간 정지인을 향해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이내 희미해졌다.

 꼬불꼬불한 관계자용 복도를 앞서가던 매니저가 뒤를 돌아 최홍서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사장님 전화.”

 납빛으로 창백해진 안색으로 최홍서가 전화를 받아 들었다.

 “...네.”

 [왜 아직도 행사장이야? 부사장님 기다리시는 거 몰라?]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시작부터 속을 긁어댔다.

 “지인이 형하고 잠깐 얘기했어요.”

 [지금 정지인 같은 게 문제냐? 넌 이서경 그 개새끼한테 그런 걸 받고도 정신 못 차리지? 어?]

 새 싱글이 발표된 날, 이서경은 UB 사무실의 명도훈 앞으로 꽃다발을 보내왔었다. 상당히 값이 나가 보이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꽃다발의 카드 봉투에는 아무런 멘트도 보내는 사람 이름 한 줄도 없이 사진 두 장이 들어 있었다.

 ‘그날’ 촬영되었던, 최홍서의 얼굴을 잘라낸 사진 한 장과 당시 명도훈이 맡고 있었던 호스트바로 출근하는 명도훈의 옆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었다. 말하자면, 이서경이 보내온 경고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황 파악 그렇게 안 되냐? 대가리 꽃밭이야, 이 병신 새끼야? 네까짓 게 감히 누굴 기다리시게 해?]

 이해성에게 ‘예쁨받는다’는 이유로 한동안 최홍서의 비위를 맞추며 빌빌거렸던 명도훈은 다시 전처럼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이서경의 압박에 초조해진 것이다.

 최홍서가 별 반응을 하지 않아도, 전화 너머에서 혼자 열을 내던 명도훈은 그 후에는 저 혼자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잡았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알아봤는데... 이해성 그 인간, 희귀종 중의 희귀종이다. 연예인들 데리고 노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양반이라고. 뭐, 프로를 좋아하는 건지 일반인 수집이 취미인 건지 누구처럼 스튜어디스 페티시가 있는지 거기까진 몰라도... 아무리 뒤지고 다녀도 얼굴 팔린 애들 주무르고 다닌 냄새는 안 난다는 말이야.]

 거기까지 얘기한 명도훈은 흥, 쓰게 코웃음을 쳤다. 반대로, 이해성을 두고 더러운 표현들을 입에 올리는 명도훈의 말에 최홍서의 눈에는 살기가 서렸다.

 [우리한테는 다행이지 씨발. 그런 정보 쪽에는 기웃거리지도 않는 양반이라 네 얘길 누구한테 전해 들었을 리는 없으니까.]

 “......”

 [잘 들어. 최홍서. 그러니까, 부사장님은... 퓨어하고 상큼한 ‘레이어드’의 홍시를 예뻐하시는 거라고. 어? TV에서 보던 네 이미지를 그대로 보고 싶으신 거야. 방긋방긋 잘 웃어 드리고, 기본적으로는 순진한 컨셉으로 가면서 살짝씩 섹시하게. 어?]

 “......”

 [네가 여기저기 굴러먹던 몸뚱이인 거 부사장님이 지금 알았다가는 다 물거품이다.]

 “말은 똑바로 해야죠. 굴러먹던 몸뚱이가 아니라, 굴려졌던 몸뚱이지.”

 [네, 물론 그러시겠죠. 왜 아니시겠습니까? 야, 억울한 심정은 알겠는데, 지금 너하고 내가 그딴 문제로 실랑이할 때가 아니야. 이서경이 갖고 있는 그 사진들, 지금 부사장님 손에 들어갔다가는 씨발 죽도 밥도 안 되는 거라고. 너랑 나, 쌍으로 그냥 좆 돼서 이서경 그 씹새끼한테 또 질질 끌려다녀야 돼. 알아먹어?]

 다시 또 열이 올라 씩씩거리던 명도훈은 한 템포 쉬면서 숨을 골랐다.

 [한창 네가 이뻐 죽겠을 때 떨어져 있게 됐으니 이해성은 안달이 나겠지. 이런 놀이에 면역이 없는 양반이니 아주 죽을 맛일 거다. 그럴 때 네가 슬쩍 보고 싶다고 한번 당겨봐. 그 바쁜 스케줄 조정해 가면서 네 얼굴 보러 비행기 타겠다고 나선다? 거기까지 갔으면 거의 눈이 멀었다고 봐야지.]

 전화 너머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해외로 도는 동안, 씹새끼는 내가 다른 뉴 페이스들로 잘 구슬려 볼 테니까... 너는, 어? 너는 그사이에 부사장님이 너한테 아주 정신 못 차리게 만들면 되는 거야. 어?]

 입술에 담배를 문 채 얘기하느라 어눌해진 말투로 명도훈은 잘도 지껄여댔다.

 [그 사진들, 그게 이해성 손에 들어가더라도, 이해성이 그 사진이 아니라 널 믿을 만큼 홀려 놓으란 말이야. 이서경한테 억지로 당했던 거고, 협박당해서 끌려다닌 거예요, 이서경 혼내 주세요 부사장님... 그런 말까지 다 믿게 만들라고!]

 이서경에게 끔찍하게 강간당했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강간 경험이 오히려 이서경이 나를 협박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악순환인 줄 알면서도 이서경과 명도훈의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돼버렸다. ― 그것이 사건의 진실이었다. 그럼에도 명도훈은 마치 그것이 꾸며낸 이야기이며, 이해성이 거짓을 진실로 믿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듯 떠들고 있었다.

 [우리한테 이해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야. 알겠어? 그게 썩은 동아줄이라도 거기에 매달려보는 수밖에 없다고. 최홍서 경력이 몇 년인데, 씨발 그 범생이 좆 하나 붙잡아 놓는 건 일도 아니지. 안 그래?]

 공포감을 떨치려 억지로 웃어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최홍서는 소리 없이 조소했다.

 “주차장 다 왔어요. 끊을게요.”

 최홍서의 태도에 명도훈이 욕지거리를 뱉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고 통화를 끝내버렸다. 지금껏 실컷 이서경에게 기생해 콩고물을 받아먹으며 살아왔으면서, 이해성이라는 더 강한 숙주가 등장하자마자 포주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배를 갈아타려 하는 명도훈의 태도에 진저리가 났다.

 명도훈이 원하는 대로 일이 돌아간다면, 이해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명도훈에게 이용당하는 게 된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거기에 자신이 가담할 수는 없었다.

 명도훈에 대한 분노를 얼굴에서 털어내기 위해 최홍서는 서너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화기를 꽉 움켜쥔 채 매니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 전화를 넘겨주었다.

 이해성은 ‘레이어드’의 스프린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만 있게 해달라고 따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명도훈에게서 무슨 명령을 들었는지 실장은 최홍서에게 차 문을 열어주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몇 칸 떨어진 자리에 주차된 UB 소유의 다른 차량으로 사라졌다.

 문 바로 앞의 2열에 그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좌석은 비어있었다. 최홍서는 허리를 펴고 차 안을 둘러보았다.

 이해성이 맨 뒤의 4열 구석 자리에 앉아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엉덩이를 쭉 빼고 허리를 낮춰 앉은 자세로 봐서는 일부러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즐거워하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웃음을 숨기려 하는 그의 표정이 장난기 많은 소년 같았다.

 분노를 털어내려 할 필요도 없이, 그를 보자마자 최홍서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같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이쪽뿐이라.”

 뒷자리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홍서의 손목을 당겼다. 자신이 앉아있던 창가 좌석에 최홍서를 앉히고는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체격을 이용해 최홍서를 자꾸만 차창 쪽으로 밀어붙이면서, 그는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

 “아이돌하고 연애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스릴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꽤... 짜릿하긴 하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랑데부9).”

 “......”

 “밀회잖아. 로맨틱해서 좋은데?”

 그는 평소보다 장난기가 강했고, 어딘가 들떠 보였다. 이유는 말하지 않고 몸을 계속 밀기만 하면서 웃음을 참으려 하는 모습이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의 왼쪽 어깻죽지와 차창 사이에 지그시 눌린 최홍서는 가슴 위에 겹쳐진 그의 왼팔에 손을 올렸다.

 “왜 그래요?”

 “뭐가?”

 “말은 안 하고... 계속 웃기만 하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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