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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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해성의 샤워 시간은 평소보다 더 길었다.
이미 샤워젤의 거품이 씻겨 내려간 지 오래인데, 물줄기 아래 한참을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눈을 가리지 않고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려 턱 끝에서 낙하했다.
전신에 남은 최홍서와의 정사의 흔적을 전부 훔쳐내 배수구를 향해 달아나는 물줄기의 흐름을 오래 응시했다.
연인의 몸속에 서너 시간이나 담그고 있었던 성기에는 여전히 그 촉감이 남아있는 듯했다. 그 뜨거움, 안에서 어느 입이 빨아당기는 것만 같은 흡입력, 구불구불하게 꿈틀거리며 음경의 벽에 촘촘히 달라붙어 오는 내장의 은밀한 신비로움... 그 모든 것에 실컷 성기를 문지르며 도달했던 쾌감은 여전히 등허리 부근과 사타구니에 뻐근하게 남아 있었다.
게다가, 교제 상대를 이렇게나 사랑스럽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고작’ 몸살감기 따위에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약 잘 챙겨 먹고 잘 쉬고 컨디션이 좋아지면 그때 보자고 말하는 대신, 죽을 가지고 직접 찾아갔다. 최홍서가 자신을 얼마나 좋게 생각해 주고 있든, 지금까지의 자신은 그렇게 다정하게, 몰두해서 연애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열에 절여진 무거운 몸으로 자신에게 안겨 의지하고 있는 상대를 보면서 독점욕을 채우는, 어두운 만족감을 추구하는 인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누군가를 독점하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독점되어줄 수도 없는 환경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최홍서에게는 다를까.
무대 위에서든, 드라마 속에서든, 사생활에서 자신과 함께 있을 때든... 최홍서의 몸짓 하나하나는 최선을 다한 절규 같았다. 대충이란 없었고, 정성과 진심만이 가득했다. 그것은 평균의 열심마저도 넘어선 절박함이었다. 제 온몸을 던져 사랑받고자 하는 몸부림이 시선과 함께 마음까지 붙들어 놓았다.
최홍서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보내오는 맹목적인 애정의 시선도, 그 맹목을 들킬까 봐 귀퉁이만을 슬쩍 내보이는 조심스러움도, 그런데도 이쪽에서는 전부 다 보이는 영악하지 못함까지... 어디 하나 빠짐없이 죄다 사랑스러웠다. 이해성 스스로도 자신을 팔불출이라고 긍정할 정도였다.
그런 귀한 연인이 보여주었던 반응 하나하나를, 이해성은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되새기고 있었다.
해성... 씨?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놓고는 저도 쑥스러운지 피식 눈을 피하던,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발기될 것 같았다.
내일, 다 나아도, 연습 못 할 만큼... 해성 씨 자지로... 전부 긁어줘요.
오랫동안 못 해도, 여전히... 자기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흠... 이해성은 넓게 벌어진 두꺼운 어깨를 부풀렸다가 천천히 꺼뜨리며 심호흡했다. 시야에 내려다보이는 묵직한 물건을 두어 번 스윽 훑어내렸다. 흥분한 짐승을 진정시키려 쓰다듬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스물일곱 살이 아주 어린 나이가 아니라는 건 안다. 통상적으로는 ‘애기’라고 불릴 나이가 지났다는 것도.
하지만 이해성에게 최홍서는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 아닌, 열두 살 연하의 연인이었다. 그 아이가 서른이 된다 해도, 마흔이 된다 해도, 영원히 자신보다는 열두 살 연하였고, 영원히 자신의 눈에는 온갖 어리광을 다 받아주고 싶은 ‘애기’일 것 같았다.
세상의 오물과 그 오물에서 풍기는 악취 따위는 조금도 모른 채 꿈만 꾸었으면 하는 아기.
지금까지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앞으로는 최홍서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 정도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잠시 뒤, 이해성은 불길한 예감이라도 떨쳐내듯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눈을 감은 채 마지막으로 전신을 씻어낸 후 그는 샤워를 마쳤다.
습관대로, 습기를 피해 곧장 욕실을 빠져나갔다. 욕실 입구의 러그 위에서 물기를 훔쳐낸 후, 타월 한 장만 두르는 대신 가운을 택했다. 어차피 혼자만의 공간이었고, 실내는 충분히 따뜻했다. 가운의 앞자락을 여미지 않은 채 이해성은 파우더룸을 지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머리카락을 말리기 전에 위스키부터 찾았다.
파우더룸 한쪽의 안락의자에 앉은 이해성은 오토만 위에 길게 다리를 뻗고 뼈대가 두드러진 발목을 서로 겹쳐 교차했다. 그러고는 온더록스에 채운 위스키를 반 이상 비울 때까지,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굳힌 듯 소파 옆 테이블 위에서 내선 전화를 찾았다.
스피커폰 너머에서 강 실장이 곧 연결되었다.
“강 실장님.”
최홍서의 숙소에서 밤을 새우고 귀가한 이해성의 목소리는 칼칼하게 잠겨 있었다. 오토만에서 다리를 내리고 상체를 숙여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괴고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어냈다.
“홍서에게 사람을 하나 붙여 주세요.”
어조의 높낮이 없이 나른한 목소리였다.
“지난번 조 사장 같은 구더기들이 꼬이지 않는지, 멀리서 그 정도만 지켜보는 역할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나에게 얘기할 아이가 아니니까 걱정이 되네요.”
되돌아온 강 실장의 대답에 이해성은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그 외 다른 조사는 하실 것 없어요.”
밤새 이어진 정사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꺼칠해진 얼굴을 훑어낸 뒤, 면도를 생략한 턱 밑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나에게 아직 얘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파헤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건... 시간을 들여서라도 홍서에게 직접 들어야죠. 네... 그러니까 앞으로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는지, 지금은 그걸 지켜보는 정도로 충분합니다.”
까끌하게 돋은 수염을 쓸던 손으로 턱을 괴고는 신중하게 마무리했다.
“이번에 홍서 해외 출장에 다녀오고 나면, 그때부터 움직이는 걸로...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엄선해 주세요.”
호출을 끝낸 이해성은 오토만에 다시 다리를 올려놓으며 온더록스를 집어 들었다. 가운이 소파 아래로 흘러내려 넓게 벌어지면서, 근육질의 강인한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발목을 교차한 탓에 서로 맞붙은 허벅지의 접촉면 위로는 거뭇한 음경이 길게 누워있었다. 가운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고, 이해성은 묵묵히 남은 술을 비워나갔다.
“저, 할 때... 잘 못 느낄지도 몰라요.”
첫 관계 전에 최홍서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을 듣고 조금 놀라기는 했었지만, 최홍서에게 돌려줬던 말 그대로, 성감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었다. ‘잘 못 느낄지도 몰라요’라고 추측하듯 말했지만, 그때 최홍서의 표정이나 어조를 보면 스스로의 불감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실망시키기 싫어서 가진 모든 용기를 총동원해 그렇게 고백했던 것에 비해 시작부터 그 아이는 아주 민감했었다.
첫 관계 때만 해도 이해성은 단순하게 받아들였었다. 이전의 상대들과는 잘 못 느꼈었지만, 나와는 다르구나. 그렇게 여기면서 최홍서 모르게 은밀히 기뻐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두 번째 관계 후에는 약간의 의문이 남게 되었다.
스스로를 잘 못 느낀다고 판정했다는 건 어쨌든 경험이 있다는 의미였다. 경험이 없다면 그게 더 부자연스러운 나이이기도 했고. 하지만 성관계 경험이 있고, 그래서 그 경험을 토대로 자신을 잘 느끼지 못하는 체질이라고 이해하게 됐다 하기엔... 그런 것에 비해 이해성이 만져본 최홍서는 오히려 민감할 정도로, 지나치게 아주 잘 느끼는 편이었다.
단지, 이전의 남자들을 나만큼 사랑하지 않았다거나... 이전 남자친구들의 테크닉이 형편없었다거나... 그런 속 편한 이유가 아니라면? 그런 이유로 한 인간의 성감이 그 정도까지 차이가 벌어질 수 있나? 불감과 민감만큼의 차이가?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원하지 않는 상대와 잠자리를 가져야 했다거나, 불쾌한 경험으로 성관계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던 거라면?
탁.
고요하다 못해 스산할 정도로 조용했던 공간 속에 거슬리는 소음을 만들어 내면서 이해성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기우일 것이다.
홍서에게 스스럼없이 결혼을 외치는 팬에게도 질투하고, 꿈꾸는 것처럼 황홀한 얼굴로 무대 위 홍서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탐탁지 않아 할 만큼, 내가 홍서에 관해서는 제법 팔불출이니까. 과보호 때문에 괜한 걱정을 하는 거겠지.
혹시 어떤 과거가 있었더라도, 그 일로 최홍서를 다시 보게 될 일은 없었다. 어떤 과거가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사랑했던 최홍서의 면면들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단지,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유쾌하지 않은 일들만이라도 막아줄 수 있기를 바랐을 뿐.
잔을 비운 이해성은 가운의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레이어드’의 숙소를 빠져나와 이해성이 자신의 침대에 들었을 때는 암막 커튼 밖으로 보랏빛 하늘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여전히 내리긋는 빗줄기로 인해 밖은 평소보다 어두웠다. 아침이 아주 더디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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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어드’의 신곡 싱글은 반응이 좋았다.
앨범 선주문량과 음원 차트에서의 순위 등에서 모두 자신들의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방송이든 행사든 찾는 곳도 많아졌다.
한서 그룹 계열의 녹스 호텔 서울에서 열린 녹스 호텔 & 리조트 社 최초의 TV 광고 공개 행사에도 메인 게스트로 초청되었다. 이전에도 녹스 호텔에서 열린 행사의 무대에 선 적은 있었지만, 이전과는 대우가 전혀 달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최홍서를 떨리게 만든 변화는 관객들이었다.
뒤에 나올 대형 스타들을 위한 분위기 띄우기 용이었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랐다. 모든 관객들의 핸드폰이 무대 위 ‘레이어드’를 향해 집중되었고, 신곡만이 아니라 이전 곡까지도 흔히 말하는 떼창을 들을 수가 있었다. ‘레이어드’의 팬들만이 모인 장소가 아닌데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최홍서에게는 각별했다.
음악 방송 1위나 음원 차트 1위에 비할 만큼, 관객과 교감하는 그 순간이 지난날에 대한 또 하나의 보상처럼 느껴졌다. 신곡에 비해 잔잔한 멜로디를 가진 예전 곡을 부르는 동안, 관객들은 멜로디를 따라 불을 밝힌 핸드폰을 좌우로 흔들며 따라불러 주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그 불빛들을 바라보면서, 최홍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말 대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떠올렸다.
과거를 보상받는 듯한 이 기분을 밝은 미래를 향한 신호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상황은 그렇게 순탄하지가 않았다.
“다들 수고했어. 녹스 측에서 대기실에 도시락 준비해 주셨으니까 잠깐 쉬다가 공항으로 출발하자.”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한눈을 팔 새도 없이 매니저가 멤버들을 인솔했다. 얼마 전부터 ‘레이어드’의 스케줄에 실장급 매니저가 거의 반드시 동행하게 됐다는 점도 달라진 것 중 하나였다.
“바로 출발 안 해요?”
“바로는 안 해도 돼. 좀 쉬고, 옷도 여기서 갈아입고, 세수하고 싶은 사람들은 세수하고.”
“옷은요? 공항패션 따로 협찬 없어요? 가져온 사복 입어요?”
땀을 닦으며 정신없이 질문 세례를 퍼붓는 멤버들의 어깨 사이로, 반가운 사람의 얼굴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무대 위에서와는 달리 무표정하게 땀을 찍어내고 있던 최홍서의 얼굴이 한순간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 최홍서를 발견한 정지인도 마주 미소를 보내왔다.
“어? 지인이 형! 안녕하세요! 형, 광고 잘 봤어요!”
“진짜 왕자님 같던데요? 형이 녹스 아들인 줄 알았어요!”
정지인을 발견한 다른 멤버들이 한차례 요란한 인사를 한 뒤 먼저 대기실로 움직였고, 그제야 최홍서와 정지인은 인적이 드문 복도 한쪽으로 이동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팠던 것 때문인가, 살이 더 빠졌어.”
“일부러 뺀 거야. 다이어트 성공이네.”
“이렇게까지 빼야 한다고?”
“더 예뻐졌다고 반응이 좋던데?”
“......그 사람이?”
“아니, 팬들이.”
몇 번 전화로 상담을 했기 때문에, 정지인도 최홍서가 연애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고민의 대상이 이해성이라는 것은 아직 밝히지 못했지만.
‘그 사람’이라고, 정확히 이해성을 가리키지도 않는 대명사만으로도 최홍서는 얼굴이 붉어졌다. 피식 웃으며 정지인의 어깨를 툭 밀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생수를 괜히 몇 모금 더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