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그의 니트가 늘어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보드라운 소매를 타고 올라가 팔의 더 위쪽을 잡아당겼다.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얼굴의 그가 구부정하게 상체를 숙이고, 최홍서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끌어당기는 힘은 미약하기만 할 텐데도 그는 최홍서가 당기는 대로 순순히 몸을 굽혔다. 그의 목을 꼭 끌어안자, 그제야 좀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 같았다. 그제야 좀 숨을 쉬는 것 같았고, 혈관으로 피가 도는 것 같았다.
“멤버들은 연습하다가 어차피 새벽에나 올 거예요.”
“......”
“가지 마세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연민과 사랑스러움을 담은 따스한 눈동자가 최홍서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스웨터로 감싸주었다던 예전의 그 강아지를 볼 때도 이런 눈빛이었을까.
다시는 이 눈빛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함에 가슴이 조여 숨이 가빠질 만큼 초조해졌다. 아프면 덩달아 마음도 약해진다고들 하니까, 아마 그래서겠지. 그와 떨어지면 안 될 것 같은 이런 유난스러운 불안함은...
“안 갈 거죠?”
‘가지 마세요’라는 적극적인 요구도 놀라웠지만 ‘안 갈 거죠?’라고 묻는 교묘함,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여우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더 놀랐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렇게까지 이해성에게 어리광을 부려본 일은 없었다.
마침내 그의 얼굴에서 고민의 흔적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크림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가겠어요. 우리 애기가 이렇게 내가 좋다는데.”
결국 그는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와 곁에 누웠다. 그가 이불 아래로 들어와 옆자리에 눕자마자 최홍서는 그의 몸에 꼭 달라붙었다. 그는 낮게 웃으면서 최홍서의 목뒤로 팔을 둘러 어깨를 안아주었다. 이마와 관자놀이, 머리카락 위에 여러 번의 키스가 내려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집으로 데려가서 며칠 푹 쉬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는 안 되니까.”
최홍서를 안은 커다란 손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마에 키스한 채로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새벽에 다들 잠들어 있을 때 몰래 빠져나갈 테니까. 푹 자고 얼른 낫자. 응?”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목덜미로 더 파고들었다. 두툼하고 단단한 상체에 팔을 감아 옆구리를 꼭 쥐었다.
잠들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하는 이 귀한 시간을 온전히 기억에 새기고 싶었다. 그런데도 육체의 고단함은 그에게서 최홍서를 분리시켜 미몽 속으로 떠밀었다. 창밖에서 비는 뇌우로 바뀌고 있었다. 하늘의 신이 땅 위 인간들의 타락을 무섭게 꾸짖는 것 같은 빛이 번쩍였다가 신의 진노와도 같은 천둥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러다 한순간 수십 톤의 모래를 한꺼번에 퍼붓는 것처럼 창문을 부술 듯 빗방울이 와르르르 부딪쳐왔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의 숨소리. 호흡에 따른 가슴팍의 편안한 오르내림. 힘찬 맥박. 그가 사용하는 클렌저와 애프터쉐이브와 스킨로션, 향수의 향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이해성만의 지문 같은 향기.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만질 수 있고, 안을 수 있고, 안길 수 있는데. 이 순간, 이보다 더 분명한 실존은 없을 것만 같은데, 이런 확실함이 파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 않아서, 잠든 척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체온만큼이나 뜨거운 눈물이 흘러 그의 피부와 뺨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가 모른 척해 주길 바랐고, 역시나 그는 이마 위에 입술을 묻을 뿐 어깨를 흔들어 눈물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빗소리가 멀어지는가 싶었고, 혼절에 가까운 잠 속으로 까무룩 끌려 들어갔다.
절벽에서 곤두박질치는 꿈을 꾼 것처럼 퍼뜩 몸을 떨며 눈을 떴을 때, 최홍서가 가장 먼저 이해성을 찾았다.
“......”
침대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웅크리고 누운 등이 보였다. 서로 하나가 된 듯이 꽉 끌어안고 있던 것이 잠들기 전 마지막 기억인데, 그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따로 떨어져 누워있었다.
그의 등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최홍서는 자신의 옷이 갈아입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가 도중에 한 번 더 몸을 닦아주고 땀에 젖은 옷도 갈아입혀 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깨지 않았을 만큼 열에 시달렸던 건가...
참을 수 없이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다른 누구와도 해본 적 없는 ‘평범한 방식’으로 그와 깊숙이 연결되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등에 가만히 손끝을 댔다. 자요, 그리고 물음표.
물음표의 마지막 점을 찍을 때쯤 넓은 등이 가볍게 떨리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벌써 일어나서 꼬물거려? 더 자.”
“왜... 흐흠, 흠, 왜, 그쪽 보고 누우신 거예요?”
열 때문에 최홍서의 목소리는 꽉 잠겨 갈라져 있었다. 그 목소리는 잔잔하고 고요하게 가라앉아있던 공기에 진동을, 떨림을 일으켰다. 둘 사이에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그가 대답했다.
“...딴생각이 자꾸 들어서.”
“......”
“자기혐오에 빠질 것 같았거든.”
최홍서는 그의 등에 무의미한 도형을 계속 그려 나갔다. 딴생각... 자기혐오... 그런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농담 아니야. 넌 아파서 정신도 못 차리는데... 하아... 내 자제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됐었나 자괴감 든다고. 처음 우리 집 게스트룸에서 홍서 자고 갔던, 그때의 내가 아니야.”
“......”
“널 눈으로 보면서... 야한 짓 하지 않을 자신 없으니까, 이렇게 누워있는 정도로 봐줘.”
수많은 사람들이 고깃덩이 취급했던 최홍서를 두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것이 사랑이구나. 지금이라도 배울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 행복을 후회할 리는 없었다. 어떠한, 그 무엇이 다가오더라도.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천둥과 번개는 멈춘 듯했지만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은 창문을 통해 빗줄기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돌아누워 웅크린 채로도 넓기만 한 그의 등은 무엇이든 써 내려갈 수 있도록 허락된 넉넉한 편지지 같았다.
나... 봐, 요.
“너 보면서 참을 자신 없다고 했잖아.”
이번에는 천천히, 손가락을 떼지 않고, 커다란 하트를 그려 넣었다.
“자극하지 말랬다?”
화가 난 것처럼 엄한 말투를 쓰는 그의 목소리에 오히려 웃음이 났다.
뽀, 뽀... 해주세. 요.
=3=
그 뒤에는 가끔 메시지에서만 애교를 부릴 때 사용하는 이모티콘도 그려 넣었다. 뽀뽀를 하는 입술 모양인데 그가 좋아하는 이모티콘 중 하나였다.
“아저씨 잘 자요? 어, 그래요, 우리 애기도 잘 자요. 자야지 얼른 나아요.”
일부러 틀린 답을 얘기하는 그의 딴청에 최홍서의 웃음소리가 좀 전보다 약간 더 커졌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다시금 이해성의 등 위에서 살금거렸다.
나... 아저씨, 랑... 자고 싶...
“아... 이것도 너무 쉽네.”
아직 문장을 다 쓰지도 못했는데 그는 답을 맞히겠다고 나섰다.
“아저씨, 사랑해요. 나랑 결혼해 주세요.”
마찬가지로 엉뚱한 오답이었지만 최홍서는 이번엔 웃을 수 없었다.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등을 간지럽게 긁어대던 손도 움직이지 않자, 그가 그제야 어깨너머로 최홍서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야? 틀렸어?”
창문으로 비쳐 드는 희미한 빛에 의존해 뚜렷한 각을 그리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못 하잖아요... 결혼.”
“......”
자기도 모르게 투정 부리는 것 같은 시무룩한 목소리를 내버렸다. 후회하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순간, 그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왜 못해? 네가 그랬잖아. 난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그의 목소리도 평온하지 않았다. 화를 억누르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건 물론 최홍서를 향한 화는 아니었다.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다른 곳을 보며 얼버무리던 최홍서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다시 그를 향했다.
유혹할 수 있는 다른 방법, 좀 더 세련되거나 더 순수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 시트 위를 짚은 그의 팔을, 니트의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 올린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다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이불을 걷어, 그가 닦아준 자신의 몸을 그의 앞에 드러냈다.
“결혼까지는, 그런 건 욕심 안 부릴 테니까...”
“너 진짜.”
미간을 찌푸린 그가 먹잇감에게 달려드는 날렵한 짐승처럼 최홍서의 몸 위에 올라탔다. 두 손목을 붙잡아 베개 위에 내리누르며 내려다보는 두 눈이 번들거렸다. 당장이라도 아래에 누운 대상을 원하는 대로 먹어 치울 듯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양심과 싸우고 있었다. 아파서 누워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을 댈 수는 없다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혐오’라는 양심과.
최홍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목을 내리누르는 그의 팔목 안쪽에 입을 맞췄다. 코끝을 비비고 뺨을 비볐다.
“아픈 거 알아요. 아픈데도... 나도... 아저씨가 옆에 있으면, 그런 생각이 나요. 아파서 열나는 것보다 더... 뜨거워진다구요. 나도.”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그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최홍서를 누르지 않고 공중에 몸을 띄우고 앉아있던 그는 상체를 서서히 아래로 기울였다. 이마와 코끝에 입을 맞추고 입술로 내려가 열을 재듯이 한동안 입을 맞춘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뜨거운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먼저 핥은 건 최홍서였다.
“이러다 너 아픈 채로 무대에 서야 하면... 나 진짜 그 자괴감을 어떻게 해야 되냐.”
“아픈데도 무대에 선 적은 많아요.”
말을 하면서도 그의 입술을 계속 핥았다. 겉잠을 자면서 간호한 탓인지 그의 입술이 거칠게 말라 있었다. 그는 내리뜬 눈꺼풀 안에서 그런 최홍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게 나 때문인 거 하고는 다르지.”
“난... 좋을 것 같은데.”
“......”
“아저씨 때문에 아픈 채로 무대에 서고, 그런 내 모습을 사람들이 다 보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 사이에서 나온 혀가 최홍서의 혀 뒤를 핥아 올리고 진하게, 달콤하게 속삭였다.
“최홍서가 누구 애인인지.”
“으음...”
“누구랑 자는지.”
“흐으, 응.”
“사람들이 다 보는 거야.”
그의 혀에 자신의 혀를 마주 비비고, 자신의 것에 비해 두툼한 그의 혀를 조금 머금어 빨기도 하면서 최홍서의 호흡이 다급해졌다.
“보여줄래요... 아저씨랑 자고 나서 아픈 거, 사람들이 다 봤으면 좋겠어.”
흐음... 깊은 상처로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그가 얼굴을 찌푸린 채 무겁게 신음했다. 마침내 최홍서의 아랫배 위를 지그시 내리누르는 그의 페니스 역시 불룩하게 묵직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