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최홍서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통화를 연결했다.
“형.”
[...자고 있었어?]
“아니야. 그냥 누워만 있었어.”
[웬만큼 아파서는 연습 빠지거나 그러는 분 아니시잖아. 얼마나 아프길래 숙소에 들어간 건가 걱정돼서 전화했지.]
최홍서는 힘없이 웃었다. 주변 사람들은 다들 자기를 이런 독종으로 알고 있는데, 이해성 혼자만 가여운 새끼 강아지로 보고 있다는 게 웃음이 났다.
이불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면서 한 뼘쯤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숙소에 혼자 있지? 나라도 갈까?]
“괜찮아, 괜찮아. 병원도 갔다 왔어. 그냥 몸살이라니까 약 먹고 푹 자면 돼. 간호해 줄 그런 것도 아니야.”
간호해 주는 사람이 이미 와있는 사실에 괜히 제 발이 저려서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부정을 해버렸다. 멋쩍어진 최홍서는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몸이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열 오른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이해성과의 관계를 미리 말해둘 기회가 있었다면 좀 더 편했을 텐데.
사실은 아저씨가 지금 와있어. 죽도 가지고 와줘서 그거 먹고 자려고. ― 정지인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상상을 짧게 해보았다. 누군가에게 그를 연인으로 소개하는 것. 쑥스럽기는 해도 아주 행복한 순간이 될 것 같았다. 이불을 만지작거리던 최홍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밥이랑 약은? 죽이라도 배달시켜 줄까?]
“약은 먹었고, 죽도... 이제 먹으려고.”
슬리퍼를 끄는 조용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쟁반에 물 잔을 담아 온 이해성이 방으로 돌아왔다. 최홍서는 이해성과 눈짓을 나누면서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이해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쟁반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순서가 왜 거꾸로야, 인마?]
전화 너머에서 정지인이 귀엽다는 듯 픽 웃고는 덧붙였다.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 낫지. 잘했네.]
정지인을 따라 희미하게 웃으면서 최홍서는 눈으로는 이해성의 움직임을 좇았다.
침대 가장자리, 최홍서가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걸터앉은 그는 보온 백에서 죽을 꺼내고 있었다. 머그처럼 손잡이가 달린 스테인리스 그릇을 꺼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연 이해성이 최홍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새우죽의 고소하고 살짝 짭조름한 향기가 실내에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최홍서도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우는 것보다도 못한 웃는 얼굴일 게 틀림없었지만, 그 표정은 아프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질 터였다.
그를 바라보면서 전화 너머의 정지인에게 말했다.
“형, 오늘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아파서 그런 건데 뭐가 미안해. 별말을 다 한다.]
“그래도... 어렵게 시간 맞춘 거잖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중에 또 시간 내면 되지. 다시 못 볼 것도 아니고.]
“어.”
[우리 최홍서의 인기가 워낙 글로벌해져서 얼굴 보기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바빠진 건 좋은 거잖아. 그치, 홍서야?]
“어, 맞아.”
이불을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사람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 죽 먹고 푹 자. 나도 신곡 응원하고 기다리고 있을게. 스트레스받을 거 없어. 최홍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또 잘 해낼 거야.]
정지인과 통화를 끝내고 나자 한층 더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 마른침을 삼키며 정신을 다잡았다.
“정지인 배우?”
“네.”
그는 보온 백 속 포켓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수저 세트가 들어있는 케이스였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애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
“괜히 그러시는 거죠?”
“뭐가.”
“형 좋아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아시면서 괜히 그러시는 거잖아요.”
“무슨 죽으로 할까? 속을 다친 건 아니니까 새우죽으로 할까? 그래도 제일 맛이 날 텐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우선 물 잔부터 건네주었다. 최홍서가 물을 마시고 난 뒤에는 죽을 식히기 위해 숟가락으로 그릇 안을 천천히 저어주었다. 냄비에서 바로 꺼낸 것처럼 새우죽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뜨겁지 않도록 가장 표면에 있는 죽을 한 숟가락 떠올린 그는 최홍서의 입술 앞에 그것을 대령했다.
“혼자 먹을 수 있는데.”
“나도 먹여줄 수 있는데. 숟가락 들 힘도 없어 보이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 말을 듣는 게 어떨까.”
그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뺨을 감쌌다. 물을 가지러 갔을 때 손을 씻었는지, 그의 손은 아까보다 차게 식어 있었다. 그 시원한 느낌이 기분 좋아서 절로 스르륵 눈이 감겼다.
더 실랑이하지 않고 착하게 입을 벌렸다.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숟가락에 죽을 떴다. 누군가가 숟가락을 입에 넣어주는 느낌은 다른 세상처럼 낯설었다. 죽의 짭조름한 맛보다도 그가 먹여주는 달콤함이 훨씬 컸다.
“맛있어요.”
“김도 있는데 김도 같이 넣어서 줄까?”
“괜찮아요. 지금도 엄청 맛있어요.”
두 번째 숟가락이 다가왔다. 입을 벌리면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게, 마치 자신의 입에 숟가락을 넣는 것처럼 딱 알맞게 그가 죽을 넣어주었다.
아프다고 누가 이렇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면서 옆에 있어 주고, 음식을 떠먹여 주기까지 한 건 처음이라고.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은 그렇다고. 그에게 말해 볼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도 이렇게 해준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에, 아마도 그는 마음 아파할 테니까.
세 번째 죽을 받아먹은 최홍서를 기특하게 바라보던 그가 시치미를 뗀 무표정으로 말했다.
“정지인 배우가 아니면, 그럼 홍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군데?”
그 얘기는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최홍서의 입술 사이에서 웃음이 새었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 이해성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맞아. 그 얘기가 듣고 싶어서 괜히 그랬어.”
귀여운 말을 해놓고 그는 어른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최홍서는 알 것 같았다. 아픈 사람의 기분을 달래주고 웃게 해주려고 그가 일부러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다는 걸.
네 번째 숟가락이 다가오고, 착하게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홍서 아픈 건 정말 속상한데, 이렇게 같이 있는 건 또 좋아서 좀 들떴나 봐. 남자 친구가 뭐 이래. 그치?”
“제 남자 친구... 욕하지 마세요.”
“......”
다가오던 다섯 번째 숟가락이 도중에 멈췄다. 그리고 모든 것을 녹여낼 것 같은 금빛 미소와 함께 다시 움직였다.
“네, 안 할게요.”
아플 때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곁을 지켜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줄 몰랐다. 누구에게 기댈 수 있는 기회가 자기에게도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자기가 가진 짐과 어둠은 너무 무겁고 너무 짙어서, 함께 나누어 달라고 말하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해야 소중한 이를 지킬 수 있는 건지도 어렵기만 했다.
그래서 일단은 그가 주는 대로 열심히 죽을 받아먹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에. 음식이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것 마냥 행복해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온몸을 잡아끄는 나른함도, 머리와 눈가에 몰리는 뜨끈한 열도... 심지어 이서경까지도 잊을 수 있는 힘이 솟았다.
죽 그릇을 반 이상 비운 후, 그는 남은 죽을 주방에 정리해두기 위해 방을 나갔다. 그 틈을 타 최홍서는 화장실로 향했다. 이런 상황에 낯 뜨거운 김칫국일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키스를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칫솔질을 하고 싶었다.
세면대 거울 속 얼굴이 오래 울고 난 뒤처럼 엉망인 것을 확인하고 기분이 저조해졌지만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방안을 서성거리며 최홍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 벽이 너무 휑한데?”
벽에 걸어둔 포스터 옆의 빈 공간을 가리키며 그가 웃었다. 그때껏 두 사람이 함께 봤던 영화의 포스터들이었고, 이해성의 선물이기도 했다. 최홍서는 그것을 방문 옆의 벽에 나란히 걸어두었다. 서로 간격을 좁게 해서 걸어둔 탓에 오른쪽으로는 공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건 앞으로 그와 함께 보낼 시간을 기대하는 최홍서의 마음이 시각화된 것과도 같았다. 그래서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닌데도, 그에게 마음을 그대로 들킨 것 같아 쑥스러웠다.
뒷목을 쓸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설명했다.
“이, 일부러 그렇게 한 거예요. 포스터 더 걸어두려면... 공간이 필요하니까.”
태연해 보이는 데에는 실패한 것 같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감돌았다. 최홍서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온 그가 뒤에서부터 앞으로 최홍서의 어깨를 감쌌다.
“우리 앞으로 영화 더 열심히 봐야겠다.”
“......”
“더 이상 걸어둘 공간이 없을 만큼. 음?”
동의를 구하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쇄골을 가로지른 그의 손목을 감쌌다. 평소의 습관과는 다르게 한 번만 끄덕이지 않고 여러 번 끄덕였다. 이 벽을 다 채우고 더 이상 걸어둘 곳이 없을 만큼 많은 영화를 그와 함께 보겠다고...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이 그렇게 했다.
침대로 돌아가 누우려던 최홍서는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주방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볼이 협탁에 올려져 있었다.
“미지근한 물이야. 타월에 적셔서 몸을 닦아주면 체온이 좀 내려갈 거야.”
“직접... 해주시려구요?”
“당연하지. 남자 친구는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최홍서를 침대에 눕힌 그는 눈이 편안하도록 조명을 꺼주었다. 그리고 곁에 앉아서 최홍서의 얼굴과 목, 팔을 차례대로 천천히 쓸듯이 닦아내 주었다. 물이 증발하면서 열을 가지고 가는지 적당히 서늘하게 기분이 좋았다.
“잠드는 거 보고 갈 테니까 잠 오면 그대로 푹 자.”
최홍서는 나른하게 자꾸 감기던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그때껏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퍼붓는 빗소리가 불길한 예언처럼 창밖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열 때문에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안 가시면 안 돼요?”
물에 적신 타월로 최홍서의 왼팔을 쓸어주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개를 좀 더 숙이고 눈썹을 까딱이면서 그가 물었다.
“옆에 있을까?”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조금도 아프지 않게 뺨을 꼬집었다.
“아프니까 나랑 있고 싶은가 봐?”
끄덕.
이번에도 솔직한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그의 눈이 커졌다. 최홍서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님을 알아챈 그의 얼굴이 곧 진지해졌다. 망설이는 표정과 어조로 그가 말했다.
“나야 당연히 그러고 싶은데, 멤버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홍서, 신경 안 쓰이겠어?”
이해성의 소매를 더 바짝 쥐면서 최홍서는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요.”
“정말?”
끄덕.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프다는 얘기도 어차피 명 사장이 그에게 떠들어 댔을 테고, 이해성이 이 숙소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도 마음대로 하시라고 할 명 사장이었다. 아니, 명 사장이 당장 쳐들어와 경을 친다고 해도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보내면...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