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컴백 (110)화 (110/185)

110화

 “누구세요?”

 문 안쪽에서 물어온 사람의 목소리가 뜻밖이었는지, 문 너머 방문객은 답변하기를 주저했다. 망설임 끝에 간결한 대답이 돌아온 건 잠시 뒤였다.

 “이해성입니다.”

 가윤은 최홍서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다시금 문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여기 5층이에요.”

 “누나.”

 “어?”

 “잘못 찾아오신 거 아니야. 아는... 분이셔.”

 “아는 분?”

 가윤은 의아해하면서도 방문자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가을용 긴 외투를 걸친 커다란 신장과 체격의 이해성이 문틈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흠칫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난 가윤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방문자의 얼굴을 향했다. 그녀는 이해성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목을 한껏 뒤로 젖혀야만 했다.

 최홍서가 혼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해성 역시 예상치 못한 등장인물인 가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최홍서 씨를 좀 만났으면 하...”

 가윤의 어깨너머로 최홍서를 발견한 그는 도중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최홍서에게 직접 말했다.

 “많이 아프다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더 아파 보였다.

 가윤을 지나쳐 성큼성큼 현관 안으로 들어선 이해성은 현관과 실내를 잇는 중문 앞에 서 있던 최홍서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 가지고 있던 검은색 가방을 내려놓고는 망설임 없이 최홍서의 얼굴에 손을 댔다.

 “열이 이렇게 심한데 누워있어야지.”

 그는 최홍서의 양 뺨과 이마, 목덜미를 오가며 체온을 가늠했다. 가윤이 있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윤이 아닌 누가 있었더라도 같은 행동을 했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반면, 가윤은 현관 한쪽에 비켜서서 이해성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은?”

 “다녀왔... 흠, 다녀왔어요. 주사도 맞고, 처방 약도 먹었어요.”

 잠긴 목을 풀고 대답하면서, 최홍서는 그의 손목을 감싸 슬그머니 끌어 내렸다.

 가윤이 ARA의 이해성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워낙 주식 투자나 경제 뉴스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어지간히 재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국인이라면 이해성을 모르기는 어려웠다. 단지, 자신이 알고 있는 뉴스 속 그 이해성과 눈앞에 현실로 나타난 인물을 동일인으로 인지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누구지? 분명 아는 얼굴인데... 미간을 좁히고 이해성의 옆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가윤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바뀌어 갔다.

 “혼자 있다고 들어서 죽을 좀 가져왔는데...”

 얼굴을 만지는 것을 저지당한 이해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가윤을 돌아보고 살짝 목례했다.

 “스, 스타일리스트 누나예요. 의상 체크할 게 있어서... 안 그래도 누나는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이해성과 최홍서를 번갈아 쳐다보느라 가윤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누나... 저기, 그럼 잘 가.”

 “어? 어... 그래. 푹 쉬어.”

 이해성과도 말없이 곁눈질로 인사를 나눈 가윤은 허둥거리며 현관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얼굴에 놀람과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가윤이라면 이상한 소문을 흘리고 다닐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소문이 돈다 하더라도, 모든 소문이 가십이 되고 뉴스거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연예계, 그리고 정재계에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야깃거리가 얼마든지 넘쳐났다.

 가윤이 있을 때 이해성이 나타나서 곤란하지는 않았다. ARA 이해성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관심, ARA 이해성과 어떻게 그렇게 친근한 사이가 됐는지에 대한 관심이 부담스럽기는 해도 동성 관계였기에 오히려 바로 연애 관계로 연결해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ARA의 이해성이 아닌 자신의 연인 이해성을 사람들 앞에 보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이 닫히고 나자, 이해성이 최홍서의 손끝을 가만히 쥐었다. 최홍서가 한 단 위에 서 있음에도 여전히 이해성의 눈높이가 더 높았다. 그래도 평소보다는 좀 더 가까워진 눈높이가 신기해서 자꾸 그의 눈을 쳐다보게 됐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가 더 아파 보였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잡은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내려놓았던 가방을 어깨에 걸친 이해성은 본인 소유의 맨션임에도 처음 와보는 곳인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최홍서를 뒤따랐다.

 “방... 지저분한데.”

 침실 앞에서 최홍서가 머뭇거리자, 그는 바로 등 뒤에 다가와 손잡이를 붙잡은 최홍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이 안에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어도 절대로 흉보지 않을게.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서 눕자. 응? 애기 지금 불덩어리야.”

 관자놀이와 귓가에 입을 맞추며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최홍서는 가벼운 떨림, 성적인 오싹함을 느꼈다.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런 때에도 그와의 스킨십에서 짜릿함을 발견하는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무슨 짓을 해도 성감을 느끼지 못하던 몸이었는데.

 손잡이를 아래로 밀어 그를 방으로 초대했다.

 “이리 와. 우선 눕자.”

 그는 방을 둘러보기도 전에 이불을 걷어 최홍서를 침대에 눕혔다. 모처럼 혼자 있는 숙소에 그가 왔는데, 손님 대접도 하고 얘기도 나누고 싶었지만 이미 가윤이 있는 동안 너무 진을 뺀 상태였다. 느릿느릿 침대에 눕자, 그는 이불을 덮어주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세상에 이보다 가여운 대상은 없다는, 그런 표정으로 이해성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정수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좀 어때?”

 “그냥 몸살이래요. 주사 맞고 약도 먹었으니까 자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열이 이 정도인데 하루 쉰다고 나을 게 아니잖아.”

 겉옷도 벗지 않은 이해성이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머리를 만지던 손이 흐르듯 아래로 내려가 엄지로 뺨을 쓸었다. 피부 위를 스치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숙소에 혼자뿐이라고 들어서 귀찮게 안 하려고 바로 올라왔는데. 누가 있을 줄 몰랐네.”

 “누나는 괜찮아요. 괜한 얘기 퍼뜨리거나 이것저것 물어볼 사람도 아니고.”

 이해성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홍서는 오지 말라고 할 거잖아. 그래서 허락 안 받고 그냥 왔어.”

 “......”

 “아픈 채로 숙소에 혼자 있다는데... 그때부턴 일도 손에 안 잡히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이해성을 보고 있으니까 그냥 좋았다. 어쩌면 그가 너무 커다란 존재라서 다른 모든 문제들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버리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해결이 아닌 마비, 망각일 뿐임을 알아도 이서경이든 지난 7년의 시간이든 전부 그의 커다란 어깨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안심이 되고 불안은 희미해진다.

 사랑을 할 때 세상에 단둘만이 된 것 같다는 그 상투적 표현을 이제 최홍서는 누구보다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다들 그렇듯이 나도 강아지를 기르고 싶었어.”

 얼굴을 만져주는 손길을 가만히 느끼면서 최홍서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원하는 건 뭐든 다 손에 넣는 삶을 살아왔을 거라고,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알지만 부모님은 실내에서 반려동물 기르는 걸 절대 허락 안 해주셨지.”

 위키백과에서는 이해성의 사촌들인 이우열 회장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꽤 상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이해성과 그 형제들은 상대적으로 노출이 적은 편이었다.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하는 자질구레한 소문의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성이 직접 해주는 그 자신에 관한 얘기들은 최홍서에게 많이 소중했다.

 “정원에서 중대형견 기르는 걸 겨우 허락받아서 새끼 비글 한 마리를 데려왔는데, 실내 출입은 당연히 절대 금지였지.”

 “......”

 “근데 이 녀석이 하루 종일 자기 집 구석에 엎드려서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거야. 추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아직 환경이 낯설어서 불안해서 그런 거라고, 저절로 좋아질 거라면서 고용인들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얘기했지만 어린 내 눈에는 심각한 일이었거든. 포근한 캐시미어 스웨터를 가져가서 둘둘 감싸줘도 떨기만 하는 녀석을 도저히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어. 결국 부모님 몰래, 고용인들도 모르게 그 녀석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지. 그 나이 때의 내가 고용인들 모르게 집안에서 뭔가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는데도.”

 스웨터로 폭 감싼 강아지를 품에 안고 커다란 저택 안에 몰래 숨어드는 어린 이해성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흐뭇하고 사랑스러운 장면인데 어째서 눈가가 뜨거워지는지 알 수 없었다. 물기가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최홍서는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내 방에 데려가서도 한참 방구석에서 벌벌 떨기만 했는데, 옆에 꼭 붙어서 계속 만져주고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니까 몇 시간 뒤에는 킁킁거리면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내 얼굴을 핥기도 하면서 제법 활발하게 움직이더라고.”

 기억을 더듬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얼굴 곳곳에 닿아오는 손길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였다.

 “죽어가는 녀석을 내가 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찌나 행복하던지. 반나절 만에 발각돼서 결국 제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제가... 그때의 강아지 같아요?”

 “그래, 비슷해. 어떻게든 해줘야 할 것 같고, 잘못될까 봐 안절부절못하겠어.”

 최홍서를 그런 식으로 바라본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었고, 강인하게 버텨야 하는 사람이었고, 우는소리는 용납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해성처럼 가여운 강아지로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정말... 이상하고 특별한 아저씨였다.

 “그 강아지는 어떻게 됐어요?”

 그가 어릴 때부터 길렀던 강아지라면 건강한 수명을 다 누렸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는 없었다. 최홍서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의 미소가 좀 더 깊어졌다. 따뜻하게 눈을 맞춘 채 그가 최홍서의 눈썹 위를 쓰다듬었다.

 “......건강하게 살다가 편안히 떠났어.”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에게 차마 나쁜 얘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왜인지 최홍서는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그가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사소한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자기 역시 그가 지키고 싶어 하는 그 무언가를 지키고 싶었다.

 최홍서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일어난 그는 겉옷을 벗어 책상 앞 의자에 걸쳐두었다.

 “죽을 몇 가지 가지고 왔는데, 우리 집에서 만든 거라 먹을 만할 거야.”

 “몇 가지나요?”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직접 만든 게 아니라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는 바닥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가방은 보온 백 같았다.

 “그냥 미음도 있고, 야채죽도 있고, 짭짤하게 먹고 싶으면 새우죽도 있는데. 자고 일어나서 먹을래?”

 “지금 조금이라도 먹을게요.”

 입맛은 없었지만 죽을 몇 가지나 준비해온 그의 정성을 생각해 몇 술이라도 뜨고 싶었다. 먹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가 조금이라도 안심할 것 같았다. 최홍서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물을 가져오겠다며 그가 방을 나선 사이, 정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몸이 안 좋아서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는 얘기는 매니저에게 들었을 테고, 아마 걱정이 돼서 전화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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