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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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 더 미열이 따라다니더니, 기어이 병이 끓었다.
그날 아침은 일어났을 때부터 몸 상태가 심상치 않다 싶었다. 하지만 신작 발표가 정말 코앞이고, 그 주 주말이 첫 방송인 상황이라 연습을 미룰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모처럼 스케줄이 비어있는 날이라 정말 오랜만에 정지인과 만나기 위해 서로 시간도 맞춰 놨었다. 새 숙소의 집들이 이후 단둘이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정지인이 새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면서 바빠지기도 했고, 그동안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이해성과 함께 보냈던 이유도 있었다.
이번엔 꼭 직접 만나서 이해성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정지인이라면, 그가 재벌이고 자신이 아이돌이라는 편견 없이, 자신이 느낀 이해성이라는 사람의 진심 그대로를 믿어줄 것 같았다. 말솜씨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이런 이야기를 전화로 잘 전달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오후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약 기운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
결국 최홍서는 연습실에서 실신하듯, 허리와 무릎에 힘이 꺾인 사람처럼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체온계 숫자가 40도에 육박했다. 그것을 보고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들어가서 쉬어, 제발. 우리 그렇게 못 믿어? 형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픈 티도 못 내고 버텼는데... 이걸 보고도 설마 우리가 농땡이 피우겠어?”
“그래, 형. 오늘은 단장 형도 있잖아. 어차피 농땡이 피우고 싶어도 못 피워.”
소파에 누워서 멤버들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최홍서는 눈을 감았다. 그날은 안무가이자 댄스팀의 단장이 최종 마무리를 위해 연습실에 나와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못 미더운 멤버들이라도 하루쯤은 단장에게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맡기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매니저와 함께 병원에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비까지 퍼붓고 있어서인지 더더욱 몸이 무거운 것처럼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하고 곧장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물 한 잔과 약을 방으로 가져다준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어차피 약 먹고 계속 잘 건데, 뭐.”
“좀 이따 가윤이 잠깐 올 거야. 오늘 첫 방송 의상 체크해야 된대. 도어록 열고 알아서 들어올 거긴 한데 잠깐 일어나서 의상은 입어 봐야 돼.”
“알았어. 지인이 형한테 대신 얘기나 좀 잘해줘.”
서너 알의 약을 삼킨 최홍서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다시 누웠다. 침대 아래에서 누군가 마구 몸을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매니저가 조용히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침대에 눕기만 하면 바로 잠이 들 것 같았는데, 혼자 남으니 오히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전에는 조금만 틈이 생기면 이해성을 생각했는데, 이젠 이서경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다.
이서경이 숙소까지 찾아왔던 걸 명 사장에게 얘기했고,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지도 얘기했다. 바짝 약이 오른 명 사장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고 부수면서 이서경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개새끼가 자기 인생을 망치고 있다며 펄펄 뛰었다.
오랫동안 명도훈은 말하자면, 이서경의 유흥을 관리해 주는 한국 지사 매니저 같은 존재였다. 이서경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새로운 얼굴들을 발굴하고, 경제적 지원을 받아 그 대상들을 화류계로 끌어들인다.
이서경이 납치나 폭력 같은 일차원적인 범죄 형식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건 우습게도 사실이었다. 폭력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약간의 시간과 돈만 더 들이면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명도훈은 그것을 돕는 대가로 이서경으로부터 좋은 돈벌이 기회를 제공받았고 상류층 손님들과의 연줄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명도훈에게도 이서경이란 존재는 자신을 좌지우지하려 하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뿐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쥐어왔던 것이다.
이해성이 최홍서에게 보이는 관심.
명도훈은 그것을 자신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겼다. 이서경에게서 벗어나려면, 이서경이 가진 힘과 맞먹거나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에게 다시 기생해야만 했고, 애석하게도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까.
이제 와 이서경에게 맞서려 기를 쓰는 명 사장이 최홍서의 눈에는 우습기만 했다. 이해성만 없었더라면, 갑자기 몇 년 만에 최홍서를 다시 찾는 이서경에게 최홍서를 내주지 않으려 애를 쓸 일도 없었을 테니까. 오히려 냉큼 대령시켰겠지...
무거운 몸을 움직여 모로 돌아누우면서 최홍서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우리 홍서가 어떤 애인지, 이 사진이랑 영상으로 소개 좀 하고... 그다음엔 이 집이 누구 집인지... 뭐, 그 정도 정보만 살짝 흘려도 유튜브에선 금방 소금 후추 뿌려서 소설 한 편 뚝딱 나오는 거니까. 이런 애랑 놀아났다고 하면... 재벌 3세 모범생 이해성 부사장 이미지에 사알짝 금 좀 가겠어.”
이불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이해성을 걸고넘어진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나까지 같이 사회에서 매장당하겠지만 그것까지 각오하고 모든 걸 폭로할 거라고. 이서경에게 아득바득 대항했지만,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이해성이 엮여버린 이후였다.
이해성을 걸고넘어지기 전에 폭로한다 해도, 앙심을 품은 이서경이 그 이후에 이해성을 엮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이서경의 목표물은 명확히 명도훈과 최홍서였다. 이해성은 최홍서를 ‘교육’시키기 위해 끌고 들어가는 도구일 뿐이었다. 최홍서가 이전처럼 말을 잘 들으면, 이서경으로서는 굳이 이해성을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이해성 같은 위치의 사람에게는 이런 스캔들이 엄청난 타격이 아니라는 건 안다. 몇 년 전, 현실 같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성 스캔들이 터졌던 다른 재벌도 지금까지와 다를 것 없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명예의 문제였다.
이서경 같은 돼지 새끼가 찍은 그날의 끔찍한 사진이 세상에 공개되고, 최홍서가 ‘그렇게 안 봤는데 난잡한 변태’로 찍히고, ARA의 이해성이 그런 최홍서와 놀아났다는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이서경이 저지른 일을 이해성이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돼... 진짜 어떻게 해야 되냐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코와 입에서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숨결보다 그 생각 때문에 더 머리가 뜨거웠다. 무력함과 막막함에 눈물이 흘렀다. 7년이나 좆같은 세월을 보내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감정적인 행동을 한 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아, 그렇게 부사장님 감싸고 싶으면 네 과거를 없애. 그러면 되겠네.”
마지막으로 그렇게 얘기하던 이서경의 얼굴이 감은 눈 안쪽에서 되풀이해 재생되었다.
최홍서는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오늘 일정은 연습, 그리고 정지인과의 약속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성도 알고 있었다. 두 시간쯤 전, 연습실 쉬는 시간에 그에게 보낸 게 마지막 발송 메시지였다. 연습실 거울을 통해 찍은 셀카를 보내줬었고, 그는 얼굴 주변으로 하트가 날아다니는 이모지를 남발했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 그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당근판매자님 : 비가 점점 많이 오네. 우리 홍서 오랜만에 형 만난다고 기대했는데 날씨가 안 도와준다 (오후 3:04)
당근판매자님 : 이따 귀가하는 길에 운전기사 필요하면 언제든 나 부르면 되는 거 알지? (오후 3:06)
당근판매자님 : 오늘 좀 일찍 퇴근하고 집에서 쉬고 있을 거라 몇 시든 상관없어. 미안해하지 말고 불러줘요 (오후 3:07)
당근판매자님 :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모처럼 스케줄 없는 귀한 날 내가 아니라 다른 형 만나는 거에 대해서 정말로 난 조금도 삐지지 않았거든 (오후 3:09)
당근판매자님 : 말 안 했었나? (오후 3:14)
당근판매자님 : 밖에서 다른 사람이랑 술 마시면서 재밌게 놀고 나서 살짝 취한 남자친구가 집에 데려다 달라고 전화해 주는 거 로망이야 (오후 3:15)
당근판매자님 : 그럴 때 내 남자친구는 평소보다 약간 혀 짧은 소리도 할 거 같고, 평소보다 왠지 애교도 넘칠 거 같아서 (오후 3:18)
당근판매자님 : 적극환영^^ (오후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