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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08)화 (108/185)

108화

 “내가 언제든 이 추억들을 부사장님에게 전송하거나 유튜브에 뿌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거. 홍서는 아마 잘 알 거야. 그치?” 

 머리 위에서 그렇게 얘기한 이서경이 최홍서의 머리채를 잡아 상체를 들어 올렸다. 파충류의 섬뜩한 서늘함을 연상시키는 미소를 띤 이서경이 최홍서를 내려다보며 싱글거렸다.

 “사람들이 이걸 보면 홍서를 어떤 애라고 생각할까? 이걸 보고 나서도 뭐든지 열심히 하는 성실하고 상쾌한 ‘레이어드’의 리더라고 생각해 줄까?”

 “흐으흑... 당신이... 당신이 한 짓이잖아! 난 피해자인데... 내가 왜 욕을 먹어야 되는데?!”

 생리적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최홍서는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다고, 내가 너한테 그렇게 가르쳤어?”

 쯧쯧쯧쯧. 이서경은 진심으로 딱하다는 듯 측은하게 최홍서를 내려다보았다.

 “이것만 봐서는 네가 피해자인지 뭔지 알 수도 없지만... 네가 피해자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거에 관심 없어, 홍서야. 사람들 머릿속에 남는 건 이 사진뿐이야. 이 사진이 곧 최홍서가 되는 거지.”

 이서경은 최홍서의 얼굴 옆에 핸드폰을 나란히 붙여 놓았다. 비교하듯 최홍서의 얼굴과 액정 속 사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눈엔 예쁘기만 한데, 흠... 아무래도 사람들은 예쁘게 안 봐주겠지?”

 “......”

 “우리 홍서가 어떤 애인지, 이 사진이랑 영상으로 소개 좀 하고... 그다음엔 이 집이 누구 집인지... 뭐, 그 정도 정보만 살짝 흘려도 유튜브에선 금방 소금 후추 뿌려서 소설 한 편 뚝딱 나오는 거니까. 이런 애랑 놀아났다고 하면... 재벌 3세 모범생 이해성 부사장 이미지에 사알짝 금 좀 가겠어.”

 안타깝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이서경의 가슴팍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붙잡혀 있던 머리카락이 몇 가닥 뽑혀 나가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몇 걸음 뒤로 밀려 나간 이서경은 불쾌하다기보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히죽거리며 최홍서를 보았다.

 최홍서는 전에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독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서경을 노려보았다.

 “부사장님 건드리지 마.”

 “......”

 “부사장님한테 네 그 더러운 똥물 한 방울이라도 튀기면, 그땐 나도 찌그러져 있지 않을 거니까.”

 풉, 푸흡. 푸하하하... 웃음을 참으려 버티던 이서경은 곧 허리까지 꺾어가면서 폭소했다.

 “아... 우리 홍서가 개소리가 한창이네. 나를 너무 오랜만에 봤지? 뭐? 찌그러져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자폭할 거야.”

 “자폭?”

 “지금까지는 그래도 어떻게 숨만 쉬고 살아만 보겠다고 당신들 그 짓거리에 쥐 죽은 듯 질질 끌려왔지만...”

 “왔지만?”

 “부사장님한테 똥물 튀기면, 그냥, 나 죽고 너 죽는 거야.”

 이서경이 이해성과 자기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를 하고 왔다면 부정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 집이 이해성의 소유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실로 조합해낼 수 있는 끔찍한 거짓들이 무서웠다. 이해성에게 튈지 모르는 이서경의 똥물이 무서웠다.

 한 번도 이서경에게는 대든 적이 없었다. 이십 대 초반 시절에는 무릎이 덜덜 떨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이서경 앞에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을 정도로 무서웠었다.

 하지만 힘없는 쥐새끼라 해도 등 뒤에 절벽뿐임을 알게 되면 고양이에게 이를 세울 수 있었다.

 아무리 힘없는 쥐새끼라 해도, 정말 소중한 것을 해하려고 하면 제힘의 경중도 잊고, 고양이가 아니라 사자에게라도 덤벼드는 것이었다. 이서경이 그것을 알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영상? 그래, 뿌리고 싶으면 다 뿌려. 그렇게 되면 나...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는 거잖아? 니들이 7년 동안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나도 하나하나 다 까발릴 거라고.”

 그러나 물론 당연하게도, 이서경은 전혀 타격을 받는 느낌이 아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이서경이 가까이 다가와 최홍서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쿡쿡 밀어댔다.

 “이건 뭐... 소설을 너무 본 거야, 드라마를 너무 본 거야?”

 최홍서는 고개를 흔들어 이서경의 손을 쳐내고 턱을 들어 그 역겨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몰라, 씨발. 그래, 나 배운 거 없고 무식해. 그래서 당신이 무서웠고, 아무 방법도 없다고 생각해서 죽은 듯이 하라는 대로 했어. 당신 같은 사람은... 법도 건드릴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산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나 그런 곳에 사는 거 맞아. 우리 홍서 배운 거 없어도 충분히 똑똑하네. 근데 갑자기 멍청하게 왜 이럴까.”

 “법으로는 못 건드려도, 그래도 아이돌 ‘최홍서’가 한서 그룹 이서경한테 강간당하고 7년이나 협박당하면서 성매매까지 강요당했다고 폭로하면, 적어도... 자극적이어서라도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겠어? 얼마나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재미있어 할 얘기야, 안 그래?”

 사람들이 재미있어 할 얘기... 바락바락 악을 쓰는 최홍서의 눈에 다시 한번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래, 결국 내가 피해자든 뭐든 그 사람들은 관심 없을 거고, 나까지 같이 매장되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당신 바짓가랑이에 귀찮은 똥물 한 방울 정도는 나도 튀길 수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같이 죽자는 거야.”

 “이게 진짜 미쳤나?”

 그제야, 최홍서는 자신이 처음으로 이서경을 제대로 분노하게 한 것을 보았다. 아슬아슬하게 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 미쳤다. 사람을 이 지경까지 내모는데, 안 미치고 배기겠어? 그러니까... 떠돌이 미친개밖에 안 되는 놈한테 물어뜯겨서 그 비싼 바지 망치고 싶지 않으면...”

 “......”

 “부사장님 건드리지 마.”

 눈물이 넘쳐흘러 시야가 흐릿해져 이서경의 이목구비가 보지 않음에도,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이서경의 눈이 있다고 생각하는 곳을 힘주어 노려보았다.

 “감히... 너 같은 개 잡종 새끼가 입에 담을 분이 아니... 윽!”

 이서경의 무거운 주먹이 최홍서의 배를 강타했다. 호신을 위해 여러 무술을 수련한 인간이라 가까운 거리에서 날린 주먹임에도 묵직했다. 순간적으로 최홍서는 창자가 뒤틀리고 숨이 턱 막히는 고통을 느끼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럴 때조차도 얼굴은 때리지 않는 것조차 너무나 이서경답다는 생각에, 쇼핑백을 끌어안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으면서도 씁쓸한 웃음이 흘렀다.

 얼굴로 일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 따위가 아니라, 이서경은 그런 돼지 새끼였다. 마구잡이로, 규칙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단순한 다혈질들과는 급이 다른 변태.

 손목 위, 발목 위, 목 아래. 옷에 감싸인 이서경의 전신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던 온갖 종류의 흉터들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최홍서가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역겨운 장면이었다.

 이서경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무너진 최홍서 앞에 쭈그리고 마주 앉았다. 삐딱하게 얼굴을 기울이고는 턱을 괸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홍서야, 너는 나한테 똥물 한 방울 튕기려고 온몸을 내던져야 하지만, 나는 그 바지 버리고 새 바지 입으면 돼. 그걸 아직도 모르겠어? 너와 나의 근본적인 차이를?”

 “흐윽, 흐...”

 통증으로 신음하면서 최홍서는 잊지 않도록 기억에 깊이 새겨두려는 것처럼 이서경을 계속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요즘 비즈니스로 스트레스가 많아. 너처럼 말 안 듣는 애들이 좀 있거든. 오늘은 홍서가 여러 가지로 재미있게 해주기도 했고, 일이 바빠서 그만 가보겠는데...”

 거기까지 얘기한 이서경은 핸드폰 액정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이어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태도면 나 손가락 근질거린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슈트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명 사장한테도 전해. 나 왔다 갔다고.”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손목시계의 위치를 바로잡은 이서경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꾹 눌렀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어깨를 들썩이는 최홍서를 차갑게 내리깐 눈이 무심히 바라보았다.

 “근데 우리 홍서 어떡하냐.”

 “......”

 “이해성한테 똥물이 튄다면, 그건 네 과거가 튀긴 똥물일 텐데.”

 “......”

 “아, 그렇게 부사장님 감싸고 싶으면 네 과거를 없애. 그러면 되겠네.”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이서경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복부의 통증 때문에 숨소리를 씨근거리면서, 최홍서는 한동안 엘리베이터 홀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센서의 불이 자동으로 꺼질 때까지.

 가장 무서운 일.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나는 일.

 그것은 이서경이야말로 진짜 미친놈, 태어날 때부터 미쳐있던 놈이라는 사실이었다. 진짜 미친놈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무슨 짓을 벌일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

 “흐으으... 흐... 후으으...”

 만약 조금이라도 이해성을 걸고넘어진다면, ‘한국에서 얼굴 들고 살 수 없게 될 것’을 각오하고, 이해성의 곁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각오로 덤벼 이서경과 명도훈의 만행을 폭로하겠다는... 그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다.

 미리 다짐을 하지 않았어도, 이해성을 만나오는 동안 자기 안의 무의식에서 그러한 각오를 조금씩 다져 왔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최홍서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기는 배를 움켜쥔 채 조심스레 허리를 굽혀 엉망으로 구겨진 쇼핑백을 소중히 집어 들었다. 눈물에 흥건히 젖은 얼굴을 아무렇게나 닦아냈다.

 없었던 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

 자기를 속이거나 이용하거나 돈으로 지배하려 하지 않고, 따뜻하게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가와 마음을 만져 주었던 사람. 적어도, 그 한 사람에게만큼은 저 더러운 일들의 불똥이 튀지 않게 하고 싶었다. 자기가 이 세상에 와서 가져본 것 중에 유일하게 깨끗한 것, 유일하게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센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는데. 최홍서가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 전등에는 내내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최홍서라는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해낼 수 없는 것처럼.

 창문이 없어 빛이 새어 들지 않는 어두운 홀에서 최홍서는 몇 번이나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잘못 눌렀다. 그사이 새로운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고,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해성이 있었기에 지옥에 거하는 중에도 잠시나마 금빛 햇살을 쬘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잠시나마 그 햇살의 따스함 속에서 눈을 감고 느꼈던 행복을 후회할 일은 없었다.

 그것은 이서경이 미친놈이라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명백한 사실이었다.

 띠리리링.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마침내 잠금이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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