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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07)화 (107/185)

107화

 “차에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기다리다 지루해 죽는 줄 알았잖아.”

 귀신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등받이가 높은 일인용 의자에 이서경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카섹스라도 했어?”

 “어, 어떻...게, 여, 여기...”

 말을 하기는 했어도 그것은 말이 아니었다. 입술에서 제멋대로 새어 나오는 비명 같은 것이었다. 맨션은 보안이 철저했다. 아무나 공동현관을 열고 들어와 엘리베이터를 탈 수는 없었다.

 무슨 그런 순진한 질문이 다 있냐고, 이서경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대한민국에서 내가 못 들어가는 곳이 있을 것 같아?”

 친근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저 태연하다 못해 사근거리는 말투. 눈앞에 있는 인물이 이서경이라는 실감이 서서히 강해지고 있었다. 그만큼 최홍서의 호흡이 가빠졌다.

 목둘레와 손목 둘레를 꼭 조이는 셔츠, 다리를 겹쳐 꼬느라 팬츠의 밑단이 들린 상태에서도 피부가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 강박적 옷차림. 코르셋이나 갑옷처럼 타이트한 복장을 하고 있는 건 이서경인데, 최홍서의 숨이 조여왔다. 하으, 흐윽, 흐... 흐으...

 “우리 홍서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어졌더라고. 그럼 내가 직접 와야지, 뭐.”

 안락의자의 양 손잡이를 짚으면서 이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최홍서는 뒷걸음질조차 칠 수 없었다. 벌린 입술로 밭은 숨을 내뱉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두어 걸음 앞에 와서 멈춰 선 이서경이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춰왔다.

 “더 예뻐졌네?”

 애틋한 상대라도 대하는 것 같은 미소와 눈빛에 최홍서는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그 손이 다가와 최홍서의 턱 끝을 쥐었다.

 “옛날이랑 달라진 게 없어. 세월이 그만큼 지났는데. 누가 널 스물일곱 살로 보겠어. 내 안목이 이렇다니까?”

 고작 턱 끝이 손에 닿았을 뿐인데 온몸을 결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거스르거나 저항할 수 없었다. 눈앞의 남자에게 죽을 만큼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니, 죽을 만큼의 공포가 아니라 최홍서에게 이서경은 죽음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최홍서의 명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다정한 체하던 미소가 서서히 서늘하게 식어가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얇은 입술이 비틀렸다.

 “우리 홍서가 요즘 좀 떴다며? 그래서 명 사장이나 너나 나를 찬밥 취급하는 거야?”

 “바... 바, 빠져서... 해외에... 스케줄이...”

 변명하는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쩔 수 없이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 건 명 사장을 상대로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명 사장은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서경은 무서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몸과 정신이 이미 그렇게 반응해 버린다. 명 사장은 자신을 관리하고 착취해 왔지만, 철저한 이성애자로, ‘상품’인 최홍서에게 직접 손을 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서경은...

 이서경 이후에 억지로 협박 받으며 끌려다녀야 했던 수많은 ‘접대’ 자리에서 겪어 온 그 어떤 인간도 이서경을 뛰어넘는 인간은 없었다. 아니, 그 모든 인간들의 역겨움을 다 합쳐도 이서경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최홍서에게 ‘저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저것’에게 당했던 일들도 인간 세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짓들이 아니었다.

 이서경이 두려웠다. 공포를 느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아... 이서경이 최홍서의 얼굴에 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홍서야, 이렇게 벌벌 떨 거면서 왜 나를 화나게 했어? 응?”

 “......”

 “명 사장이 그렇게 나오면 너라도 정신을 차렸어야지.”

 이서경은 뜻하지 않게 실수를 저지른 부하 직원을 안타까워하는 아량 넓은 상사라도 되는 것처럼 최홍서를 보았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최홍서를 보며 혀를 찼다.

 “홍서야.”

 그딴 식으로 부르는 아가리를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욕설을 퍼부으며 날뛰고 싶었다.

 “나는 네가 참 마음에 들었었어. 거의 첫눈에 반하다시피 했던 거지. 그래서 홍서랑 처음으로 같이 자려고 오래 기다리기까지 했었잖아.”

 “......”

 “너도 알겠지만 나는 강압적으로 그러는 거... 아주 안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홍서가 2차는 절대 안 된다고 자꾸 튕기니까,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던 거지.”

 이서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서경은 7년 전 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최홍서의 전신이 다시금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식한 육체의 반응이었다.

 “촬영 같은 걸로 증거 남겨놓는 거, 나 그런 거 안 좋아하는 것도 알잖아. 근데... 하아... 제 발로 걸어오게 세팅된 애들이 아니면 나도 어쩔 수가 없거든. 보험은 들어놔야 뒤탈이 없으니까.”

 이서경의 손이 최홍서의 어깨에 툭 얹어졌다.

 “그때도 난 너한테 억지로 그럴 생각 조금도 없었다? 이해하지?”

 최홍서와 2차를 하고 싶다고 계속 조르는 통에 명 사장을 곤란하게 하고 있다는 재벌 3세 구찌 손님.

 아니, 명도훈 말에 의하면 구찌 정도가 아니라 에르메스, 샤넬이라고 했던가.

 명도훈은 자기 선에서 계속 거절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최홍서에게 네가 직접 만나서 거절하고 오라고 했었다. 그 재벌 3세 손님에게 계속 시달려 왔다는 명도훈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최홍서는 그러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만남 장소는 호텔에 딸린 고급 레스토랑의 별실이었고, 그런 곳에서 무슨 큰일이 날 수 있다는 것은 당시의 최홍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갓 스무 살이 된 최홍서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그 레스토랑이 입점해있었던 호텔의 객실에서 최홍서는 수차례 강간당했고,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당시 스무 살이었던 최홍서가 그때껏 들어본 적도 없었고, 지금까지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런 온갖 변태 행위에 동원되며 그 과정 하나하나를 모조리 촬영당했었다.

 그것이 최홍서가 이서경과 명도훈에게 잡힌 약점이었다. 첫 번째 약점.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이용해 최홍서에게 ‘접대’를 강요하기 시작했었다. 그런 식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스무 번째... 오십 번째 약점을 계속해서 축적해나간 것이다.

 당시의 최홍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을 거부하고 신고하는 대신 촬영된 사진과 영상이 온 세상에 공개되는 것.

 명 사장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서경은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단한 재벌가의 아들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맞서고 그런 사람을 신고한다고 해서 자신이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최홍서는 그런 희망을 품어볼 수조차도 없었다.

 최홍서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면서 이서경이 가볍게 눈을 흘겼다.

 “3천만 원 줄 테니까 나랑 2차 하자고, 명 사장 통해서 내가 몇 번이나 그랬어? 그냥 네가 스스로 선택해서 제 발로 왔으면 서로 편안했을 거 아니야. 쯧.”

 하지 않는다는 옵션이 없는데, 그게 어떻게 ‘선택’이 될 수가 있냐고.

 머릿속에서는 수없이 외치고 있는데 혀를 움직여 말할 수가 없었다.

대항하고 싶고, 소리치고 싶고, 맞서고 싶은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의 이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에게 자신이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이서경은 어깨를 주무르던 손에 문득 강한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최홍서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만큼 넌 나에게 모든 면에서 예외인 특별한 존재였다는 거야. 응?”

 “......”

 “그런데 네가 나를 이따위로 대접하면, 내가 많이 섭섭하지. 안 그래?”

 최홍서의 어깨를 놓은 이서경은 몇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재킷 속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뭔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핸드폰을 내려다보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라는 듯 이서경은 흘려 말했다.

 “홍서야, 나 니들이 누구 믿고 까부는지 다 알아.”

 “......”

 지나가듯 얘기한 그 말에 최홍서의 심장은 단단한 벽에 내던져져 박살이 났다.

 이서경은 최홍서의 명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 형님이 참... 이런 밑바닥에 기웃거리던 분이 아닌데 말이야. 그 모범생이 연예인 스폰서 노릇을 다 하게 될 줄이야. 하하... 뭐, 이제야 형도 돈을 쓸 줄 알게 된 거지. 그러고 보면... 우리 홍서가 참 대단해?”

 “그게 아니에요.”

 처음으로 최홍서의 입에서 또박또박 나간 말이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서경이 고개만 돌려 이쪽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특별할 것 없는 표정이었다.

 “부사장님은 저한테 돈을 지불한 적도 없고... 그러실 생각도 없어요. 명 사장이... 혼자 착각하고 북 치고 장구 치는 거예요.”

 여전히 떨고 있으면서도, 이서경을 똑바로 쳐다보고 얘기했다. 그때까지는 도무지 애를 써도 열리지 않았던 입술과 움직이지 않았던 혀가 뻑뻑하게나마 말을 들어주었다.

 무표정했던 이서경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서경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다정하고 따뜻하다고까지 생각할, 그런 소름 끼치는 미소.

 “뭐야? 우리 홍서도 사랑에 빠졌어?”

 홍서‘도’라는 표현이 귀에 거슬렸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 피식피식 웃으면서, 이서경이 다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최홍서의 양 볼을 한 손으로 꽉 쥐었다.

 “사랑에 빠져서, 그래서 부사장님 감싸는 거야?”

 뿌리치려 얼굴을 털면, 이서경은 아귀에 더 강한 힘을 주었다. 바로 코앞에서 마주하는 그 얼굴과 눈빛에 구역질이 치밀 것 같았다.

 “야... 진짜... 갸륵해서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나.”

 이서경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최홍서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퍽 밀쳐냈다.

 “사실대로 말한 거예요. 못 믿겠으면 캐보면 되잖아요!”

 뒤로 몇 걸음 밀려난 최홍서 앞으로 가까이 들어서면서, 이번에는 쇼핑백을 발로 툭툭 걷어찼다.

 “여기나 저기나... 진짜 다들 병신 새끼들처럼 왜 이러냐?”

 최홍서는 쇼핑백을 품에 끌어안았다.

 “이 집이 누구 집인지, 내가 그 정도도 모르고 여기 왔을 거 같아?”

 “이, 이 집은... 그런 게 아니... 윽!”

 뒤로 밀려나던 최홍서의 어깨가 현관문에 닿자, 이서경은 최홍서의 오른쪽 뺨을 현관문에 마구 짓이겼다.

 “이해성이 좀 우쭈쭈 해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거 같아?”

 그리고 모욕적으로 최홍서의 뺨을 툭툭 두드려댔다. 이해성이 그렇게 귀하게, 깨지기 쉬운 공예품처럼 감싸주었던 뺨을.

 “이해성이 알면, 뭐? 지저분한 떠돌이 개새끼 한 마리를 위해서 까다로운 뒤처리라도 해줄 거 같아? ARA의 이해성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 같아? 그런 산전수전을 겪고도 너 아직도 그렇게 순진하냐, 홍서야? 어?”

 “부사장님한테 그런 거 바란 적 없어요.”

 “어유, 씨발, 그러세요? 그런 숭고한 사랑을 하고 계세요?”

 “......”

 “여기나 저기나... 진짜 웃겨 뒤지겠네.”

 욕설을 지껄인 이서경은 팔을 들어 이마를 긁어댔다. 그리고 짜증 섞인 초조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홀 안을 걸어 다니면서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홍서야.”

 그러다 한순간, 다시 최홍서 앞으로 성큼 다가오면서 최홍서의 코앞에 핸드폰 액정을 들이댔다.

 “사랑하는 부사장님한테 우리 추억 좀 공유해 드릴까? 응?”

 “......”

 액정 속 사진은 7년 전 이서경이 촬영한 수십, 수백 장의 사진 중 한 장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최홍서는 쇼핑백을 꽉 끌어안은 채 허리를 숙이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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