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
“아저씨가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진심도 농담인 듯, 농담도 진심인 듯. 늘 진지한 그의 스타일을 이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떤 말이 진심이고 어떤 말이 장난인지, 그 무렵에는 최홍서도 어느 정도 구별해낼 수가 있었다.
한남대교를 지나, 숙소가 있는 유엔빌리지로 우회전하기 위해 세단은 다시 또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번엔 최홍서를 보지 않고 고집스럽게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의 밤빛이 반사되는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최홍서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어깨 끝에 가만히 입술을 묻고 있다가 문득 얼굴을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순간적으로 움찔 굳었던 이해성이 그제야 이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최홍서가 시선을 피했다. 도망치듯, 숨어버리듯, 그의 어깨에 다시 입술을 묻었다. 몸의 선을 따라 흐르는 얇은 가을용 니트 아래, 단련된 육체의 굴곡과 피부의 따스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곧 자동차가 출발했다.
숙소가 가까워질수록 최홍서는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그와 만나지 못할 때는 오히려 괜찮았는데. 아무 생각도 없었고, 감정도 거세할 수 있었다. 기계처럼 스케줄을 소화하고 지친 몸으로 귀가해 쓰러져 잠드는 것을 반복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자 얘기가 달라졌다. 돌아가기 싫다는 감정이 뚜렷이 떠오르는 것이다. 투정 부릴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자마자 잘 참고 있었던 울음을 터트리며 서럽게 우는 아이처럼.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타인의 체온이라는 것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지 몰랐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데이트를 하고, 하루 일과를 꼬박꼬박 보고하는... 그런 연애는 감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나 허락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가 창문 너머 따뜻한 실내의 맛있는 음식과 화목한 가족들을 바라보듯. 자신의 조건으로는 그런 행복을 절대 느껴볼 수 없을 거라고. 우선은 성공하고 돈을 벌어서 명 사장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조건이나 상황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해성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심하고 몸을 사렸으면서도, 결국에는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이끌렸다.
그가 있기에 더 두려워진 것이 많으면서도, 동시에 그가 있기에 지옥에 거하는 중에도 금빛 햇살을 잠시나마 쬘 수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내린 굵은 눈물이 그의 니트 안으로 스며들었다. 들키지 않기엔 늦어버려서, 최홍서는 굳이 울지 않았던 척하지 않았다. 그대로 그의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지 않았다. 왼손을 뻗어 뺨과 귀를 넓게 감싸 쓰다듬고는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춰주었을 뿐이었다.
“잠깐만 같이 있다가 들어갈까?”
안심시켜주는 낮은 목소리에 최홍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맨션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라이트를 전부 꺼버렸다. 세상에 단둘뿐인 듯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한 줄기의 눈물을 흘렸을 뿐 이후로 더 이상 울지는 않았다. 그런데 감정은 여전히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는 최홍서가 진정될 때까지 그저 머리와 뺨과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명 사장도, 같이 일했던 동료들도, 그리고 지금의 멤버들도, 최홍서에게 어지간히도 감정 표현이 없는 무뚝뚝한 놈이라고 불평했었다. 그런데도 이해성은 최홍서의 감정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었다.
정말 이상한... 특별한 아저씨였다.
그의 어깨에 관자놀이를 비비기도 하고, 어깨 끝의 단단한 삼각근을 앞니로 쿡쿡 두드리다 가볍게 깨물기도 하고, 깍지 낀 그의 엄지손톱 위를 문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신기하게도 점점 앙금이 가라앉고 감정이 맑아졌다.
그렇게 되기까지 잠자코 기다렸던 이해성이 최홍서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 눈을 맞춰왔다.
“말해 봐. 왜 울었어?”
“......”
커다란 손안에 뺨이 가두어진 채로 슬쩍 눈동자만 굴려 시선을 피했다. 그랬더니 그는 작게 웃으며 입을 맞춰주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나중에 더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해줘도 되고.”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그는 걱정하겠지. 집으로 돌아가서도 마음이 무겁겠지.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만큼 그와의 시간이 쌓여 있었다.
최홍서는 뺨을 감싼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저... 원래 신곡 발표나 드라마 공개 전에 스트레스가 심해요. 굉장히 예민해지고...”
“응.”
“저희 팀이 오래 고생하다가 이제 조금 인기를 얻었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그게 더 심한 것 같아요. 욕심이 많아서...”
“흠.”
“스트레스는 받아도, 이런 일로 울었던 적은 없는데. 아저씨한테는... 괜히 더 어리광 부리는 것 같아요.”
“......”
거짓말인 걸 들켰을까.
그의 침묵이 무서워서 최홍서는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전부 거짓말은 아닌데... 아저씨 앞에서만 어리광 부린다는 거, 아저씨 앞에서만 눈물도 흘린다는 거, 그건 다 진짠데.
엄지로 최홍서의 뺨을 살살 문질러주면서, 그는 침묵 끝에 얘기했다.
“신곡 나오면 그때 같이 축하하면서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오늘 말해야겠다.”
“......”
“영화 투자 말이야. 투자금 회수가 목적이 아니었고, 그냥... 재능 있는 젊은 감독들 후원하는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해왔던 취미 같은 거였거든. 그래서 그동안은 개인사업자로 조그맣게, 거의 임시로 운영해 왔었어. 당연히 늘 적자였고.”
거기까지는 지난번에도 그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는 얘기였다. 왜 갑자기 지금 그 얘기를 꺼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홍서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면서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딱히 영화로 수익을 낼 생각이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앞으로는 후원이든 투자든 좀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이번에 영화 사업 법인을 냈거든.”
싱긋 웃어 보인 그는 핸드폰을 찾았다. 액정을 몇 번 톡톡 두드리더니 사진 한 장을 최홍서에게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 찍힌 서류는 사업자등록증이었다. 새로운 사업을 같이 축하하자고 하시는 건가... 최홍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보려고 사진 속 서류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사업자등록증
(법인사업자)
등록번호 XXX-XX-XXXXX
법인명(단체명) : 히읗시옷
“......”
그 대목에서 최홍서의 시선은 더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묶여버렸다. 사진을 확대해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던 최홍서의 손이 멈춘 것을 알아챈 이해성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작게 웃었다.
“대표자는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돼 있지만 내 회사 맞아.”
그리고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는 최홍서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여 귓가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이 히읗시옷은 이해성만의 히읗시옷이 아닌 거. 알지?”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마도 거의 유일한 공통점일 그 이름 ‘히읗시옷’이라는 네 글자를 그저 보고 또 보았다.
왜... 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왜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냐고 말할 수는 없었다. 너무나 귀중한 그의 감정을 그렇게 폄하할 수는 없었다.
왜... 왜 나에게는 그딴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나야만 했던 걸까.
‘왜’라는 화살은 그가 아닌 과거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서두르나? 우리 아직 이런 단계는 아닌 거야?”
장난스럽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 최홍서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목구멍에 잔뜩 힘을 주고 천천히 말했다.
“너무... 멋있는 이름이에요.”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최홍서의 뒷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그의 어깨에 최홍서의 코끝이 닿았다.
“어리광쟁이면, 뭐. 그게 어때서? 내가 좋다는데?”
“......”
“우리 홍서는 다른 곳에선 너무 책임이 많으니까, 나 한 사람한테는 좀 애기여도 되잖아. 스트레스받아서 예민해지면 내 앞에서는 울고, 어리광도 부리고 그렇게 해.”
“......”
“응?” 평소에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달리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후에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키스를 나누었다. 말캉거리는 입술을 부드럽게 비비고 꾹 눌러 서로의 부피감을 맛보았고,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입술 안으로 그가 혀를 넣어주었다. 그의 니트의 가슴팍을 꽉 움켜쥐고 그가 보여주는 황홀하고 달콤한 세계에 푹 젖어 들었다.
이젠 울지 말라고. 우울했던 기분은 여기까지라고, 온점을 찍듯이 그는 여러 번 잔 입맞춤을 쏟은 후에야 키스를 끝내주었다.
키스 뒤의 1~2분이 아직 최홍서에게는 죽을 만큼 어색한 시기였다. 너무 꽉 쥐고 있어서 주름이 생겨버린 그의 니트를 손으로 털어주면서, 괜히 말머리를 돌렸었다.
“아까 그거 사진... 저한테도 보내 주세요.”
“네, 그럴게요.”
웃으면서 대답한 그는 뒷좌석에 있던 간식이 든 쇼핑백을 챙겨주었다.
“누워서 메시지 해. 오늘은 홍서 일찍 퇴근했으니까 잠깐이라도 통화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 그는 차에서 내려 배웅하지는 않았지만, 최홍서가 엘리베이터 홀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초조하고 갑갑했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나아져 있음을 느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했음에도, 그와 있으면 다 잊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이런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들이 그렇게 쉽게 깨져버리지는 않지 않을까? 그런 희망에 사로잡힐 수 있었다.
멤버들이 타고 올 스프린터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어쩌면 기특하게도 좀 더 연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가 전해준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 개의 종이 상자에 각각 마카롱, 에끌레어, 마들렌이라고 쓰여 있었다.
쇼핑백을 내려다보고 흐뭇하게 웃으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습관대로 현관문을 향해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한 층에 한 세대만 거주하는 맨션이었고, 멤버들을 태운 스프린터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홀의 안락의자에서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본 최홍서는 귀신을 보고 경기라도 일으킨 사람처럼 몸을 크게 움찔 떨었다.
“차에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기다리다 지루해 죽는 줄 알았잖아.”
귀신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등받이가 높은 일인용 의자에 이서경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카섹스라도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