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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05)화 (105/185)

105화

 연습실에 실장급 매니저가 남아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만큼 회사에서도 이번 싱글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해성과의 만남을 원활하게 조정해 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 사장이라면 이번 싱글을 히트시키는 것보다 이해성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할 만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1층으로 이어진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주머니 속에서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이 드르륵 떨렸다.

 《응 조수석으로 와요^^》

 기분 좋아 보이는 답장에 흐릿하게나마 웃음이 새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후드 가장자리를 당겨 얼굴을 가리면서 애써 웃음을 억눌렀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예닐곱 명의 팬들이 한순간 우르르 최홍서에게 몰렸다. 매니저가 후드를 쓴 최홍서의 어깨를 감싸고 걸음을 재촉했다.

 “다른 주민들 있다. 소리, 제발 소리 낮춰라. 어? 안 그럼 우리 연습실 또 바꿔야 된다?”

 팬들에게 주의를 주는 매니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푹 숙인 최홍서는 가슴 앞으로 내밀어지는 편지와 선물 따위를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

 눈에 익은 그의 세단이 헤드라이트를 깜빡여 신호를 보내왔다. 매니저가 팬들을 방어하는 사이, 최홍서는 얼른 조수석 쪽으로 달려가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최홍서 존나 사랑해! 3년 뒤에 결혼하자! 집 사놓고 연락할게!

 누군가 닫힌 문밖에서 악을 썼고, 매니저가 거칠게 타박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거의 차에 뛰어들다시피 조수석에 안착한 최홍서는 운전석 쪽을 쳐다보았다. 이해성은 차창 밖, 팬들이 있는 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뺨과 턱 근육이 평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남의 애인한테 대뜸 프러포즈라니... 아... 예의가 아니지 이건.”

 핸들의 상단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너클 부분이 노랗게 질려 있었다. 목소리도 진지하게 들렸다. 설마... 진심인가? 아니겠지? 장난치시는 거겠지?

 고개를 길게 빼고 그의 얼굴을 살피려는데 그가 마침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최홍서의 왼손을 덥석 잡으면서 상체를 굽혔다. 어둠 속에서 윤곽이 더 뚜렷해 보이는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지? 나랑 할 거지?”

 “뭘요...”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슬쩍 뒤로 물렀다. 이해성은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바짝 당겨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진지하기만 한 표정이 최홍서의 확답을 재촉했다.

 “결혼. 너도 들었잖아.”

 “추, 출발해요. 빨리.”

 순식간에 얼굴로 열이 몰렸다. 어둑해서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에게는 다 들킬 것 같았다. 이해성의 어깨를 밀어내면서 팔을 들어 얼굴 아래쪽을 가렸다. 매니저에게 쫓겨 팬들은 이미 시야에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의 차는 짙은 선팅이 되어 있었지만, 그런데도 자꾸 창밖을 살피게 됐다. 불안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어디로 출발해? 연습하러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

 “오늘 퇴근이에요.”

 최홍서에게 떠밀려 다시 핸들을 잡은 그는 퇴근이라는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세단이 연습실 앞을 지나칠 때 또 한 번 팬들의 높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몇몇은 제재하려는 매니저의 고함을 무시하고 차를 따라 달려왔다. 핸들을 잡은 그는 골목을 빠져나가 대로로 들어서고 나서야 한숨 돌리는 눈치였다.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쪽을 힐끔 쳐다보면서, 그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퇴근... 혹시 나 때문인가? 진짜 방해하려던 거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최근에 잠을 너무 못 자서 멤버들이 연습에 집중을 못 하더라구요.”

 “음... 확실히 수면 시간이 적긴 했지.”

 피곤해도 자기 전에는 꼭 한 시간 이상씩 통화를 하곤 했는데 요즘엔 그럴 수도 없었다. 스케줄을 소화하고 연습까지 마친 후에 숙소에 가서 씻고 누우면 이해성은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컨디션을 잘 유지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건 이해성도 마찬가지였으니, 새벽 3시, 4시에 통화를 하자고 깨울 수는 없었다.

 그가 자기 전 보내준 메시지나 사진들을 천천히 훑어본 후 그대로 잠드는 게 요즘 일상이었다. 어떤 때는 그조차도 끝까지 읽지 못하고 잠들곤 했다.

 그를 자주 볼 수 없는 건 아쉬워도, 이렇게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잠들 정도의 일정에 쫓기는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오히려 정신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신곡 준비도 준비지만... 이서경, 그 개새끼가 등판하셨으니까.

 강남역 쪽으로 우회전하려는 차량들 뒤에 차를 멈춘 그는 후드 위에 손을 얹고 최홍서의 머리를 가볍게 조물거렸다.

 “우리도 얼굴 보는 거 사흘 만이네?”

 고개를 끄덕거리던 최홍서는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눈을 맞추고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

 의외의 순간 불시의 고백을 들은 사람처럼 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얼굴 전체로 미소가 번졌다.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웃음을 숨기려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누가 간지럼이라도 태우는 것처럼 그의 입술은 웃음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가 먼저 보고 싶다고 하면 ‘저두요’라고 대답하기는 해도,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어서... 고작 이런 말 한마디에도 저렇게 기뻐해 주는데...

 웃음을 참으려 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그는 머리 위를 조물거리던 손을 목뒤로 가져가 얼굴을 끌어당겼다. 쪽, 가벼운 입맞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정말 보고 싶었어? 신곡 발표 준비로 정신없으니까 내 생각은 조금 덜해도 이해해 주려고 했는데.”

 “정신없는 건 맞는데... 그래도 아저씨 생각은 계속 나요.”

 “아...”

 그는 이번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통증을 참는 것 같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최홍서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들여보내기 싫게.”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앞차들을 따라 그의 세단도 우회전했다. 새벽 1시가 지났음에도 강남대로는 차량들의 불빛으로 일렁거렸다.

 “나도 애기 너무 보고 싶었어. 바쁜 거 다 알면서 보고 싶다고 떼쓰는 애인이긴 싫어서 점잖은 척했는데...”

 힐끔 이쪽을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최홍서도 그를 보았다. 짧은 눈 맞춤 뒤에 그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오늘은 진짜 안 되겠더라고. 사흘이 한계인가 봐.”

 “......”

 “죽는 줄 알았어.”

 콘솔박스의 쿠션 위에 팔을 걸친 그가 손바닥을 위로 하고 활짝 펼쳐 보였다. 손을 잡으라는 사인 같아서, 최홍서는 그의 벌린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슬며시 얽어 넣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를 보이지 않고 살짝 미소 띤 만족스러운 얼굴이 어쩐지 섹시해 보여서, 최홍서는 괜히 그와 깍지 낀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그러니까 후드 벗고 얼굴 좀 자세히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연습하다가 와서 땀 흘리고... 얼굴 완전 엉망인데.”

 “내 눈엔 귀엽기만 할 거 다 알면서 하는 말이지?”

 “...몰라요.”

 기어드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으면서도, 최홍서는 주춤주춤 후드를 끌어 내렸다. 안경도 벗어서 다리를 접어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머리도 다 눌렸을 텐데.”

 오른손을 빗 삼아 머리카락을 정돈하면서 중얼거렸다. 논현역 사거리에서 세단이 신호에 걸리자, 그는 상체를 틀어 최홍서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저절로 고개가 자꾸 수그러들려고 할 때마다 그의 왼손이 다가와 부드럽게 턱을 들어 올렸다.

 “오늘 종일 스케줄 있었잖아. 화장 다 지웠네?”

 “연습하기 전에 메이크업은 다 지우고 해요. 답답해서.”

 “이러고 있으니까 더 애기 같네. 갓 스무 살 같아서 갑자기 막 불안해져.”

 “뭐가요.”

 “잡혀갈까 봐. 잡혀가면 홍서 못 보잖아. 사흘이 한계인데.”

 진지한 얼굴로 능청스럽게 얘기하는 그의 농담에 결국은 피식 웃어버렸다.

 “뮤비 촬영 때랑은... 너무 다르죠?”

 며칠 전, 뮤직비디오 촬영장에 그가 간식차를 보내줬었다. UB의 투자자 중 한 명이 보내준 간식차라고, 명 사장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소개했다. 하지만 아마 속으로는 ARA의 이해성이 보내준 거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을 것이다.

 스튜디오로 찾아온 이해성과 잠깐 짬을 내서 차에서 만나기도 했었다. 완벽하게 꾸미고 있었던 그때의 모습과 지금이 너무 비교될 것 같아서,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손으로 얼굴을 만지면서 가리고 있었다.

 “이렇게 편한 차림으로 있어도 스타일리시하고... 맨얼굴도 이렇게 이목구비 하나하나 또렷하게 예쁘고... 내 애인은 역시 아이돌이구나 감탄하고 있었는데?”

 직접적인 칭찬에 쑥스러워져서 얼굴을 피하려 했지만, 그는 놔주지 않고 턱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결혼하자고 저렇게 쫓아오는 것도 다 이해가 돼. 팬들 잘못이 아니야.”

 “......”

 “그렇다고 양보할 생각은 없지만.”

 농담인지, 아니면 진지한 건지. 말투와 표정만으로는 선뜻 가려낼 수가 없었다. 말끝에 또 한 번 쪽, 기습적으로 입을 맞춘 그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신호등을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는 어떻게 다 아는 걸까.

 “숙소로 데려다주면 되는 거지?”

 이대로 좀 더 직진해서 한남대교를 건너면 숙소까지는 금방이었다.

 “홍서 좋아하는 과자들. 지난번에 우리 집 와서 잘 먹었던 것들 챙겨왔으니까 멤버들이랑 같이 먹고. 오늘이 너무 늦었으면 내일이라도. 응?”

 깍지 낀 손을 가볍게 흔들던 그가 맞잡은 손을 끌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런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최홍서의 입술이 살짝 뾰족해졌다.

 “아직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아저씨의 이성을 시험하지 마. 오늘은 애기가 아무리 꼬셔도 숙소에 딱 데려다줄 거니까.”

 “왜요.”

 납득할 수 없다는, 뾰로통한 목소리에 그가 힐끗 이쪽을 돌아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과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피곤해 보여. 당분간 계속 이런 스케줄일 텐데, 어떻게 내가 같이 있자고 해.”

 꾸벅꾸벅 졸면서 좀 더 같이 있겠다고 떼를 써도, 그런 자기를 보면서 마음 편하지 않을 그를 알았다. 그래도 더 같이 있지 못해서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어서 평소보다 과감하게, 그의 오른쪽 어깨 끝에 입술을 묻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더 헤어지기가 싫어서, 안 하던 짓을 하게 됐다.

 그가 깍지 낀 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으로 가져가, 심장 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아무리 꼬셔도 안 돼... 진짜 안 돼... 이렇게 사랑스럽게 굴어도 안 돼... 돌려보낼 거야...”

 그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최홍서는 그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로 웃었다.

 “이대로 납치해서 연예계도 은퇴시키고 어디 가둬 놓고 나만 보고 싶은데. 이거 정상 아니지?”

 “그렇게 해도 되는데.”

 “응?”

 “납치, 은퇴, 감금... 아저씨가 해주는 거면 좋아요.”

 그렇게 되면, 천하에 ARA의 이해성이 작정하고 자기를 숨겨 놓으면, 명 사장도 이서경도 못 찾을 거고. 그렇게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는 거 아닐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어깨 끝에 입술을 떼었다 붙였다, 장난치듯 몇 번이나 꾹꾹 누르면서 이대로 그와 함께 증발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깍지 끼고 있던 손에 문득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그가 짐짓 엄중한 말투로 얘기했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

 “아저씨가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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