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그는 더 다정했다. 최홍서는 끌어안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아버렸다.
엎드린 몸 옆에 나란히 누워서, 그는 한참 동안 최홍서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눈을 감고 그 손길을 느끼면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 것만 같았다.
잘 자라고, 불안도 아픔도 다 잊고 내 곁에서 푹 잠들라고. 그가 품에 안고 재워 주었던 그때 같았다.
어깨 위로 내려간 그의 손이 이번에는 피부 위를 부드럽게 스쳤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흠이 생겨버리는, 연약하고 아주 값비싼 공예품을 만지는 것처럼.
손바닥 전체로 천천히 등 윗부분을 어루만지다, 그는 절반까지만 벗겨져 있던 파자마 상의의 목깃 부분을 끌어올려 주었다. 그런 후에는 심장만큼이나 무거운 손이 뒷덜미를 넓게 감싸듯 툭 얹어졌다.
눈을 감고 엎드린 채로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촉각을 집중했다.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는 부위에 그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한순간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알몸 위에 뿌렸던 향수 냄새가 희미해질 만큼, 그의 숨결이 가진 파급력은 강력했다. 그의 이마가, 높은 코끝이, 뒤통수와 목덜미에 닿고 있었다. 감미롭고 향기로웠다.
무슨 말인가를 속삭일 것처럼,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
뒤통수에 닿은 이마가 좌우로 움직였다. 그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드디어 미친 거지...”
“......”
“제정신이 아니야.”
떨리는 한숨과 함께, 그는 혼잣말하듯 스스로를 비난했다.
곧 그의 몸이 멀어졌다. 잠깐의 틈을 두고 파자마 하의 안으로, 엉덩이로 젤을 바른 손바닥이 파고들었다. 움찔, 몸이 경직됐지만 엉덩이 골을 마사지하듯 주무르는 능숙한 손길에 근육은 금세 부드러워졌다.
끈적하고 야릇한 점성을 가진 액체와 함께 손가락이 입구를 지분거렸다. 충분히 말랑해졌는지를 확인하면서, 그의 손끝이 애널 주변을 꾹꾹 누를 때마다 금방이라도 안으로 길게 파고들 것 같아 호흡이 흐트러졌다.
연인이 아니다. 그러니 키스나 애무가 필수 단계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잠자리의 주된 목적은 삽입 섹스를 통한 성욕 배출이지, 키스나 포옹, 애무를 나누며 교감하려는 게 아니니까.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의 애널을 정성껏 혀로 핥아가며 풀어줄 의무도 없었다.
아는데. 다 각오한 줄 알았는데.
최홍서처럼 안겨줄 수 있냐고. 그렇게 물었으니까. 진짜 최홍서를 대하듯 해줄 거라고, 그런 기대를 갖기라도 했던 건가?
온몸을 녹여내던 진득한 애무와 어르고 달래는 키스, 젤을 전혀 쓰지 않고 혀와 입술만으로 정성껏 애널을 풀어주었던 과정이 전부 생략된 섹스는 최홍서를 당황하게 했다.
“읏.”
충분히 부드러워진 입구 안으로 그의 손가락이 진입했다.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주며 구멍을 조여댔다. 그의 손가락을 거부하고 밀어내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토록 사랑하고 원했던 그의 몸인데. 안으로 들어오는 방식은 낯설었다. 험악하지도 않았지만, 다정하지도 않았다. 성기를 삽입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애널을 잘 풀어두기 위해 효율적으로 움직일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의 몸으로 그에게 안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다른 사람의 몸으로 죽음에서 깨어나 다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여전히 잘 몰랐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연인을 흉내 내는 사람을 통해서라도, 잠시만이라도, 고통을 마비시키고 싶어 하는 그의 심정은 또 어떤 것일지. 잘 몰랐다.
어떻게 해야 현명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현명해지기보다, 그저 필사적으로 그의 곁을 원했다. 그것이 어리석은 데다가 이기적이기까지 한 결정이라 하더라도.
“으흑...”
그가 파자마의 밴드 부분을 끌어 내리자 엉덩이가 더 드러났다. 길고 굵은 손가락이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감정이 배제된 손가락의 삽입은 마치 의료 행위에 가깝게 느껴졌다.
건조하기만 한 이런 행위로 그가 흥분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최홍서의 몸 역시 여전히 부드러워지지 않고 있었다.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니. 나는 아직도 자신이 최홍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전처럼 사랑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최소한 나는 지금 우리가 함께라는 사실이라도 알고 있었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윤혜안’으로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그는... 최홍서의 죽음 속에서 여전히 고통스러운 그는... 지금 이 행위가 정말 그가 원하는 것일까.
침대 헤드를 향해 기어 올라가려, 최홍서는 시트 위에서 몸을 비비적거렸다.
“읏.”
따라붙은 손가락이 내벽을 넓히기 위해 안에서 구부러졌다. 그가 만져주고 있는데도, 어떤 쾌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묻고 있는 베개가 뜨겁게 젖어 들었다. 들키지 않으려, 턱에 힘을 주고 소리를 꾹꾹 삼켜냈다.
“왜 웁니까.”
아무것도 새어 나가지 않은 것 같은데도, 그는 즉각 알아챘다.
울고 있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파서 그래요?”
다시 한번, 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거운 한숨 소리 뒤에 몸 안에서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그흐, 흑, 그게 아니에요... 흑...”
“뭐가 아닌데요.”
“아흐, 흐... 아니, 흑... 아니흐으...”
“그러니까. 뭐가 아니냐고.”
“아저씨는... 흑, 이러흐, 이렇게 한 적,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의 체온이 멀어지면서 몸이 식는 느낌에 최홍서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그가 등을 보인 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가운을 벗고 전라가 되어 있었다.
“그만두죠. 우는 사람 붙잡고... 어차피 발기도 안 될 겁니다.”
“......”
“먼저 씻어요. 천천히 해도 되니까.”
말하는 동안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탄탄한 엉덩이와, 넓은 등, 불룩한 삼각근을 매단 두꺼운 어깨뿐인데. 그런데도 그 뒷모습에서 혼란스러움이 전해져왔다.
허벅지 위에 팔을 괴고 하관을 감싼 그는 육체 전체를 이용해 호흡하고 있었다. 어떤 격렬한 감정을 다스리려 애쓰는 것처럼.
눈물을 흘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어낸 최홍서는 그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시각각 무서웠다.
숨을 쉬면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데도,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하는 혼령이 되어 사람들 사이를 떠돌고 있는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무당의 말대로, 산 사람 흉내를 내며 걷고 말해도 송장이었고, 희로애락을 느껴도 귀신이었다.
오직 그의 곁에 있는 순간에만 자신이 최홍서임을, 땅에 발붙이고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가 ‘윤혜안’을 무섭게 몰아붙였을 때도, 역할 놀이하듯 시험했을 때도, 그리고 최홍서의 대체품이 되어주길 요구한 지금도... 이해성이 최홍서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최홍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어느 하나 무심히 넘기지 못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그것만이, 최홍서를 최홍서로서 살아있게 해주었다.
느릿느릿 그의 등 앞으로 기어갔다.
등 뒤에 바로 다가온 인기척을 느낄 텐데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가볍게 부풀었다 잦아드는 넓은 등 한가운데에 최홍서의 검지가 닿았다.
“......”
그 하찮고 미미한 힘에 제압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의 강한 육체가 모든 운동을 중지했다.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유엔빌리지 숙소의 제 방 침대에 누워있었던 진짜 최홍서는, 가지 말라고, 거의 처음으로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떼를 썼었다.
손을 대지 않으려고, 반대쪽을 향해 누운 이해성의 등에 최홍서는 손가락으로 장난을 쳤었다.
그때 내가 그의 등에 어떤 말들을 썼더라...
사랑한다고 했었나? 결혼하자고 했었나? 같이 멀리 도망가자고 했었나?
아니, 그건 전부 이해성이 했던 말들이었다. 그와의 기억은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글씨를 적어나갔다. 그날, 그의 등에 끄적였던 낙서는 아니었다. 그냥... 지금의 최홍서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미... 안... 하...
쓰려던 말을 채 마치지 못했는데, 그가 허리를 틀어 이쪽을 돌아보았다.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멈춘 최홍서의 손목을 꽉 감았다. 붙잡힌 손목 안에서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는 손목뼈를 그대로 으스러뜨릴 것처럼 힘을 주었다. 기적을 목격한 사람처럼, 최홍서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감격과 혼란, 받아들이지 못하는 충격 따위로 가득했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다른 사람의 몸으로든 뭐든, 그가 바라봐 주고, 그가 말을 걸어 주고, 그가 자신을 인식해 주는 이 순간만큼은 살아있는 존재일 수 있었다. 오직 그에 의해서만.
최홍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생일 파티에서.”
“......”
“그 남자하고의 사이에 내가 끼어들었었죠.”
그는 윤혜안의 생일 파티를 말하고 있었다. 윤혜안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 윤혜안과 그 남자의 실랑이에 끼어들었던 이해성은 금방이라도 상대에게 덤벼들 것 같았다. 그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상대에게 고압적으로 굴었었다.
“네가 괴롭힘당하는 거, 못 보겠다고 그랬었잖아. 화가 난다고.”
“......”
“원래 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닌데.”
이건 윤혜안이 아닌 최홍서에게 했던 말이었다. 소월로의 첫 데이트에서. 오렌지색 능소화가 담벼락에서 쏟아져 내리던 좁은 골목에서.
“......왜 그럴까요?”
당시의 이해성은 확신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너도 이 질문의 답을 스스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해성은 완전히 달랐다. 제발 답을 알려 달라는 간절함을 담은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절 싫어하시는데도, 아까 도와주셨잖아요.”
그날 파티에서 최홍서는 이해성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것이 헛다리를 짚은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 실랑이에 끼어들었던 이유. 그건 괴롭힘당하는 최홍서를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유라고.
그의 손이 다가와 최홍서의 뺨을 감쌌다. 그의 엄지가 뺨 위에서 와이퍼처럼 움직였다. 그제야 최홍서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가슴이 찢어져.”
“흐윽, 흡... 흐으, 흐...”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우는 건데... 내가 이렇게 마음이 아플 리가 없잖아.”
“아저씨, 흐, 나... 나흐으, 나...”
“알아.”
뺨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목뒤를 넓게 감쌌다. 그의 이마가 최홍서의 이마에 닿았다.
다 안다고. 그러니 고통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