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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00)화 (100/185)

100화

 “최홍서처럼 안겨줄 수 있습니까?”

 덤덤해 보이는 태도나 말투와 다르게, 그의 얼굴과 눈빛이 일그러져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애걸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최홍서는 혀로 입술을 한 번 적신 뒤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무슨... 의미...”

 “의미... 윤혜안 씨에게는 솔직히 아무 의미가 없겠죠.”

 의미라는 말을 입안에서 곱씹어 본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최홍서의 대역 같은 거니까.”

 일부러 더 상처를 주려 하는 모진 어투도 아니었다. 건조하고 메마른 목소리에는 감정이랄 것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비를 쏟을 듯 먼 곳에서 구르릉, 구름이 낮게 울었다. 서울을 뒤덮은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그의 정수리에 닿을 것 같았다. 한 손을 팬츠 주머니에 찌른 이해성은 다른 한 손을 머리카락 사이에 얽어 흩트렸다. 그의 시선은 다시 최홍서의 발부리쯤으로 떨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인 척하며 같이 자자는 게, 윤혜안 씨에겐 거북한 제안일 수 있다는 거 압니다. 거절한다 하더라도 어떤 불이익도 없을 거고...”

 “저도 취소할게요.”

 “......”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직접 어깨에 둘러주고 앞섶을 여며준 코트 안에서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최대한 단단하게 말했다.

 피로해 보이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던 이해성이 눈만을 들어 최홍서를 보았다.

 “부사장님께 바라는 게 없다고 했던 거요. 취소할게요.”

 “......”

 “실은 부사장님이랑 자보고 싶었어요.”

 “......”

 “누구 대신이라거나 그런 거, 별로 상관도 없구요. 어차피 연인이 아닌 이상, 누구인 척을 하든 뭘 하든, 서로 사랑해서 자는 게 아닌 건 똑같잖아요.”

 “진심입니까?”

 이해성이 최홍서를 똑바로 쳐다봤고, 이번에는 최홍서의 시선이 사선으로 떨어졌다. 시야에 들어온 그의 오른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최홍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손에 다시 한번 닿을 수 있다. 그것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잖아요. 아마 그래서 그런가 봐요.”

 검푸른 핏줄이 뚜렷하게 불거진, 그러면서도 단정한 형태를 가진 커다란 손에 눈길을 고정한 채 한 번 더 강조했다.

 “전부터 부사장님이랑 자보고 싶었어요.”

 그러니 괜한 죄책감은 가지지 말라는 의미였다. 같이 자자고 제안한 상대가 윤혜안이라고 생각하면서, 당신은 죄악감을 느끼겠지만...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 당신과 잠자리를 가지려 하는 나 역시도 이 제안을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니까.

 자보고 싶었다고, 성적으로 가벼운 체하는 ‘윤혜안’의 말을 그가 믿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빤히 바라보는 진지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진실을 요구하며 무섭게 겁박해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난간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면서 그가 최홍서의 등 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럼 가죠.”

 뒤를 돌아보니 신호등에 초록 불이 들어와 있었다.

 수행원을 아예 돌려보냈는지 최홍서를 조수석에 태운 그는 직접 핸들을 잡았다. 먼저 핸드폰부터 찾아 뭔가를 이것저것 누르고는 곧 차를 출발시켰다.

 조금 직진한 뒤 유턴한 SUV는 왔던 방향을 거슬러 돌아갔다. 소월로 초입에 위치한 H 호텔로 진입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와 처음 소월로를 걸으며 데이트했을 때, 이제 저곳에 가서 접대를 하겠구나 혼자 각오했던 그 호텔이었다.

 윤혜안에게 그가 그럴 리가 없긴 했지만, 장소가 그의 집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최홍서의 추억이 있는 공간에서 당시의 감정을 되새길 때, 열이 나고 오심이 생기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았으니까.

 주차장에서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가 그의 차량을 인도했다. 바리케이드를 세워두고 비워두었던 자리에 주차를 하면서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불편하겠지만, 잠깐 저쪽으로 얼굴 돌리고 있어요. 체크인하지 않고 키를 받아야 하거든.”

 주차 브레이크 버튼을 누른 그는 최홍서가 무릎 위에 올리고 있던 코트를 집어 올려 쓰개치마처럼 둘러주었다.

 “믿을 만한 분이라 떠들고 다닐 일은 없지만, 애초에 얼굴을 안 보이는 편이 그쪽도 편할 테니까.”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자,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간단한 대화가 몇 마디 오간 뒤에 다시 창문이 올라가고, 잠시 뒤 그의 손이 다가와 코트를 끌어 내렸다.

 “이제 됐어요. 내려도 돼요.”

 다정한 듯하면서도, 최홍서였던 때의 다정함과는 한참 거리가 먼 행동들이었다. 손길 하나, 어투 하나, 바라보는 눈빛과 미소 끝에도 달콤한 향기가 듬뿍 묻어있었던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렇게 다른데도 똑같이 좋았다.

 그의 손이 다가와서 만질 때마다 여전히 심장은 겁쟁이처럼 강하게 수축하고, 폭발처럼 격렬하게 팽창했다.

 그의 뒤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이동했고,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객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객실로 들어간 그는 거실을 지나쳐 곧장 침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커튼이나 조명, 실내 온도를 이것저것 조절하면서 뒤따라 들어온 최홍서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준비할 것도 있을 텐데 천천히 씻고 나와요. 난 저쪽 욕실을 쓸 테니까.”

 마지막으로 조도를 낮춘 그가 이쪽을 향해 돌아섰고, 방 한가운데 어정쩡히 서 있는 최홍서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 끝을 따라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최홍서는 깨달았다. 그의 코트를 계속 껴안고 여기까지 왔다는 걸.

 그는 별말 없이 문을 닫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드레스룸에 코트를 잘 걸어놓고 느릿느릿 샤워를 마친 후에도 최홍서는 한동안 욕실을 나서지 못했다. 눈을 감고, 하나부터 다섯까지. 그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그 짓을 아무리 여러 번 되풀이해도 긴장과 불안, 기묘한 공포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항상 효과가 좋았는데...

 거울 앞에서, 우습게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윤혜안의 얼굴을 이곳저곳 점검하듯 바라보았다. 물기 맺힌 얼굴은 어떤 사람들의 말대로 최홍서의 얼굴과 닮은 듯 보이기도 했다. 최홍서도 눈이 크고 선명한 편이었는데, 윤혜안의 눈이 좀 더 컸다. 길고 진한 속눈썹 때문인지 윤혜안의 눈이 더 화려해 보이는 면도 있었다. 입술은 최홍서가 더 붉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바탕은 비슷한 부류이긴 했다. 최홍서의 표정이 덧씌워졌기 때문인지, 과거에 최홍서가 알고 있었던 윤혜안보다 더 많이 자신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눈이 조금 더 작아 보일 수 있을까, 쌍꺼풀 위를 문지르던 최홍서는 한숨을 쉬며 손을 툭 떨어뜨렸다.

 강원도의 굿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가 보여주었던 행동들... 그 때문에 잠시나마 기대를 품기도 했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해성은 윤혜안을 완전하게 최홍서로 대하고 있었으니까. 떠보려는 것도 아니었고, 머리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리움 때문에 작정하고 최홍서처럼 대하는 역할 놀이도 아니었다.

 품에 안고 어깨와 등을 쓸며 달래주던 그가 금방이라도 ‘애기야’라고 불러줄 것만 같았었다.

 최홍서의 혼이 윤혜안의 몸으로 깨어날 수 있다니... 누가 그런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진실이었다.

 “기린이 이무기 탈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짝이 안 맞아 숨이 조일 수밖에.”

 무속인이 했던 말을 곱씹던 최홍서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사이 다시금 거울을 부옇게 뒤덮은 습기를 손바닥으로 지워냈다.

 조금이라도 더 최홍서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기를 바라면서, 입술이 붉어 보이도록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큰 결심을 하고 욕실을 빠져나왔는데, 침실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침대 끄트머리에 파자마 한 벌이 얌전히 개켜져 있었다.

 “......”

 그의 집에서 처음 자고 갔던 날. 그가 내주었던 파자마였다.

 그 앞에 멈춰 서서 한동안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장에 진열된 것처럼 예쁘게 개켜진 파자마 셔츠 위에는 향수도 한 병 얌전히 놓여 있었다.

 그가 최홍서에게도 선물했었던 그 향수였다.

 차에 탄 직후에 핸드폰에 이것저것 입력했던 게 아마도 수행원들에게 몇 가지를 지시했던 모양이었다.

 이걸 입고, 이걸 뿌리라는 거겠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최홍서라고 생각하고 안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

 가운을 벗어 침대 발치의 벤치에 올려두고, 알몸 위에 향수를 뿌렸다. 그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오랜만에 맡은 향기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그에게서는 늘 좋은 향기가 감돌았지만, 이 향수는 가장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의 향이었다. 그를 뒤집어쓰는 것만 같은 감각에 전신이 짜릿하게 떨려왔다.

 향수를 뿌린 알몸 위에 파자마를 입었다. 윤혜안의 몸은 최홍서에 비해 빈약했지만, 신장이나 기본적인 체격은 그리 큰 차이가 없어서 그의 파자마를 입은 폼이 그럴듯하게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다행이었다.

 단추를 채울 때가 되어서야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느라 단추 채우기가 쉽지 않았다.

 맨 위 단추를 겨우 잠갔을 때쯤, 양쪽으로 열도록 만들어진 침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가운 차림의 그는 양손에 온더록스 잔을 쥐고 있었다.

 최홍서는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몸을 돌려세우면서 단추를 채우고 있던 손을 서둘렀다. 등 뒤에서 그의 버석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곧 전부 벗겨버리고 같이 뒹굴 텐데, 지금 맨 가슴을 좀 보이는 게 대수냐는... 그런 의미의 웃음 같았다.

 “맨정신이 힘들 것 같으면 좀 마실래요?”

 최홍서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혼자 마시고 있었는지, 가까이 다가온 그의 숨결에서 위스키 향이 풍겼다. 강한 알코올은 대부분 날아가고, 위스키의 풍미가 진하게 남은 무겁고 독한 향. 이 역시도 최홍서가 기억하고 있는 이해성의 향기 중 하나였다.

 되도록 또렷한 머리로 이 뒤의 모든 순간을 제대로 기억하고 싶었지만, 이 떨림과 긴장을 누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서 잔을 건네받아 눈 딱 감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세 번째로 크게 한 모금 삼킬 때, 그가 강제로 잔을 끌어내렸다.

 “뭐 하는 겁니까? 쓰러지고 싶어요?”

 “......”

 입가로 흘러내린 술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최홍서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헐렁한 파자마를 걸친 ‘윤혜안’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내린 그의 시선이 가늘게 떨고 있는 손가락에 닿았다.

 “술을 퍼붓지 않으면 못 할 것 같아요? 그럼 지금이라도 그만둬요. 대역을 해달라고 하긴 했어도, 원하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딱딱해진 표정만큼 그의 목소리도 차가웠다. 돌아선 그는 창가의 테이블로 걸어가 잔을 내려놓았다.

 최홍서는 얼른 뒤쫓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고개를 저으면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면서,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에요! 무서워서 그러는 거 진짜 아니에요. 그냥... 긴장해서 그래요.”

 돌려보내려고 할까 봐 무서웠다. 그의 마음을 붙잡을 뭔가가 필요했다. 최홍서 같은 말... 그런 말을 해야만 했다.

 여전히 경직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어깨 끝에 이마를 묻었다. 그가 입은 가운의 소매를 쥐어짜듯이 붙잡았다.

 “저, 할 때... 잘 못 느낄지도 몰라요.”

 “......”

 “그렇더라도, 아저씨랑 하는 게 별로여서 그런 게 아니...”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는 최홍서의 상박을 움켜쥐고 침대로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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