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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99)화 (99/185)

99화

 “부사장님! 무슨 일이세요?”

 중앙의 정문 앞 계단이 아닌, 기단 가장자리의 계단을 내려가 마당을 가로지를 때. 총괄 PD가 우산을 펼치고 달려 내려왔다.

 “윤혜안 씨가 몸이 안 좋아요. 서울에서부터 안 좋았었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안될 것 같은 상태라... 먼저 내려가 보겠다고 감독님께 전해주세요.”

 이해성은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해성에게 완전히 안기다시피 한 윤혜안의 파리한 안색을 힐끗 들여다본 피디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몸이 안 좋으셨으면 무리해서 안 오셔도 되는데. 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윤혜안이 몸이 안 좋은 건 알겠는데, 왜 당신까지 산을 내려가냐고. 피디의 표정에는 그런 의문이 가득했지만, 이해성이 그러겠다고 결정한 이만한 일에 사소하게 토를 달 사람은 없었다.

 우산이라도 가져가라는 피디의 친절을 거절하려던 이해성은, 윤혜안의 얼굴에 맺힌 물기를 보고 그것을 건네받았다. 이해성이 쓰고 온 우산이 굿당 어딘가에 있겠지만, 그런 것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지, 윤혜안은 자꾸만 무릎이 꺾였다. 이해성은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옆구리에 꽉 붙이고는 거의 들어 올리다시피 끌어안은 채 오솔길을 내려갔다.

 190cm가 넘는 장신에 단련된 몸을 가진 이해성이라도, 축 늘어진 성인 남성을 한 팔로 부축하는 것이 가뿐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핏기가 없다 못해 파랗게 질려 덜덜 떨리는 입술을 보면 이해성 본인도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쳤다.

 굿당에서 어서 멀어져야 한다는, 저곳에서 윤혜안을, 자신이 윤혜안으로 보고 있지 않은 윤혜안을, 어떻게든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쯤 이해성의 셔츠는 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매니저는? 같이 오지 않은 건가?”

 윤혜안에게 물었지만, 그는 정상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은 짝을 지어 서울에서부터 함께 차를 타고 온 걸로 알고 있었다. 윤혜안도 누군가의 차로 왔던 건지 매니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사장님!”

 이해성의 수행원이 빗속을 달려왔다. 윤혜안을 넘겨받으려 하는 그에게 이해성은 우산을 건네주고 윤혜안의 몸을 두 팔로 껴안았다.

 “차 안에 공기부터 따뜻하게 해요. 뒷좌석에 열선 켜두고.”

 “네, 알겠습니다.”

 수행원은 우산을 들고 바로 달려갔다.

 흐트러진 코트를 끌어 올려 윤혜안의 머리 위까지 덮은 뒤 잘 여미고 다시 차로 향했다. 부실한 몸을 두 팔로 부축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뒷좌석에 앉히려 하자, 윤혜안은 발작하듯 거부했다. 이해성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고개를 가로젓고 팔을 허우적거렸다. 조금 전까지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기운이 뻗쳐 차를 타지 않겠다고 버텼다. 말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입으로는 아아아아, 울음 같은 소리를 흘리며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간절하게 이해성을 보았다.

 버리지 말라고, 떼놓지 말라고 애걸하는 그 눈에 이해성의 가슴이 뜯기는 듯했다.

 “괜찮아, 너 태우고 나면 나도 탈 거야. 응? 착하지?” 

 얼굴에 흐르는 물기를 거칠게 손으로 훔쳐낸 이해성은 차 안으로 깊숙이 허리를 숙여 윤혜안의 몸에 안전벨트를 채웠다.

 “부사장님, 제가 붙잡고 있을 테니 타십시오.”

 운전석의 수행원이 버둥거리는 윤혜안을 붙잡고 있는 동안, 트렁크 쪽을 빙 돌아 차에 올라탔다. 그러는 동안 윤혜안의 고개와 시선은 이해성을 따라왔다.

 젖은 재킷을 벗어버린 이해성은 윤혜안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차게 식은 마른 몸이 자석처럼 곧바로 찰싹 붙었다. 겁에 질린 두 눈이 바쁘게 굴러가며 사방을 살피고, 여전히 떨리고 있는 입술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코트로 어깨와 등을 꼼꼼히 여며주고는 품에 당겨 안았다. 불안해하는 눈이 이해성을 올려다보았다. 빗물과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겨 주면서 안심시키려 애썼다.

 “이제 괜찮아. 안전해. 여기까진 못 따라와.”

 자신의 가슴 앞을 가로질러 껴안은 이해성의 팔을 꽉 붙잡은 손도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출발해요.”

 “부사장님, 안전벨트를...”

 “괜찮으니까 그냥 출발해요.”

 이만큼 붙어 앉아서 끌어안고 있으려면 안전벨트를 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 역시 상관없었다.

 비포장도로의 산길을 내려가는 동안 이해성은 품 안에 있는 이의 뺨과 목덜미를 만지며 열을 확인했다. 몸은 식어있는데, 얼굴과 목은 불덩어리였다.

 “가까운 병원 좀 알아봐요. 큰 병원으로 먼저 가야겠어.”

 운전석을 향해 말하는 소리를 이해했는지, 품속의 환자가 다시 또 버둥거렸다. 뜨거운 목구멍 너머로 힘겹게 마른침을 삼키면서 윤혜안은 안 된다고, 싫다고,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또 쓰러지려고? 자, 얼마나 뜨거운지 봐.”

 이해성은 윤혜안의 손을 잡아 스스로 열을 느끼도록 손바닥을 이마에 갖다 대었다.

 고개를 가로젓던 힘이 잦아들고, 마르고 갈라진 파란 입술이 달싹거렸다. 숨이 부족한 것처럼 할딱거리며 윤혜안이 힘겹게 말했다.

 “그때랑... 달라요. 괜찮아요. 그냥...”

 “......”

 “그냥, 같이 있어요.”

 “......”

 그냥 같이 있자는 그 말에 왜 억장이 다 무너지는 것 같은지. 왜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고, 위태롭게 자기를 받치고 있던 세계가 다 무너지는 것 같은지.

 이해성의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화가 날 만큼의 슬픔이었다.

 32층, 그 까마득한 곳에서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는 홍서가... 지금 이 품 안에서 마지막 꺼져가는 숨을 몰아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혼과 영이 다 타는 것만 같았다.

 자기의 명이라도 그 입술 안으로 흘려 넣어주고 싶을 만큼.

 어깨를 안은 손에 더 힘을 주면서 이해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되겠어. 병원에 먼저 들르자.”

 “정말 괜찮아요.”

 “옆에 붙어 있을 테니까. 안 떨어질 테니까, 그러니까 병원 가자고.”

 “이건... 그때랑 달라서, 금방 열 내릴 거예요.”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데? 내가 알 수가 없잖아.”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면서도, 슬픔과 갑갑함에 채근하는 것 같은 말투가 나와버렸다. 그것을 후회하며 이해성은 눈두덩이를 누르고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안고 있던 이가 품을 더 파고들었다. 처음으로 최홍서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던 때처럼 목덜미에 마른 입술을 비벼왔다.

 “가라고 하지 마요. 아저씨... 아저씨, 나 잘못했어요. 정말로 잘못했어요. 안 갈래요. 여기 있을래요...”

 아저씨라고 부르며 매달려오는 목소리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해성은 그것에 대항할 수 없었다. 목덜미에 물기가 느껴졌다.

 “그래, 가지 말자. 안 가도 돼. 미안... 미안해.”

 진정할 수 있도록, 뒷머리를 어깨를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젖은 머리카락에 가만히 입술을 묻고, 보내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속삭여 약속했다.

 불안해하던 아이는 얼마 가지 않아 잠이 들었다. 아침까지 잠들지 않고 괴롭힐 것 같더니, 사람 마음도 모르고 자신의 팔 안에서 곤히 잠들어 버렸던 그날의 최홍서처럼.

 그날, 최홍서는 <러브 스토리>를 보기 위해 서초동으로 왔었다.

 강 실장이 음료를 가지고 오자, 최홍서는 슬금슬금 이해성에게 가까이 다가왔었다. 아직 이해성과도 서먹하던 연애 초기였다. 그런데도, 더 어렵고 어색한 사람이 등장하자 자기도 모르게 이해성에게 붙어 섰던 것이다.

 스스로 이해성의 팔꿈치 부근을 붙잡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최홍서는 강 실장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 이해성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영화를 보는 내내 강 실장을 옆에 세워두고 싶었다. 스스로 자기와의 거리를 좁히고 다가오는, 자기를 의지하는 그 아이를 보고 싶었으니까.

 지금 자기에게 안겨있는 이 아이가 최홍서의 정보를 어디에서 알아냈고, 무슨 이유로 최홍서를 흉내 내고 있는지,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았다. 이미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이 아이를 최홍서로 바라보고, 최홍서로 듣고, 최홍서로 대하고 있다는 것. 그게 문제였다.

 품에서 뒤척이는 아이의 몸을 감싼 코트를 더 여며준 뒤,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사이 빗방울이 굵어졌다. 보이는 것이라곤, 내리긋는 비에 흠뻑 젖은 진녹색 세상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 최홍서에게는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이곳이 어디고, 왜 여기에 있게 됐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과음한 다음 날의 블랙아웃과 닮은 느낌이었지만, 최홍서에게는 그 한순간이 엄청난 공포였다. 다시 또 다른 곳에서, 다른 이의 몸으로 깨어난 것은 아닐지, 그것부터 겁이 났으니까.

 최홍서는 SUV 차량의 조수석에 누워있었다. 다리를 편하게 뻗을 수 있도록 최대한 뒤로 밀려 있는 좌석은 최대치로 젖혀져 있었다.

 최홍서는 좌석을 세워 일어났다. 몸 위를 덮고 있던 얇고 가벼운 캐시미어 코트가 흘러내렸다.

 “......”

 누구의 것인지, 기억에 남아있었다. 애착 담요처럼, 코트를 쥐고 품에 꼭 끌어안았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행원도, 이해성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강원도 굿당에서의 일은 전부 생생했다. 군데군데 삭제되긴 했어도, 이해성의 차에 함께 타고 있는 장면도 남아있었다. 그런데 언제 앞좌석으로 옮겨왔는지 기억이 전혀 없었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이곳이 어디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남산 소월로였다. 시야가 닿는 곳에 바로 이해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야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야경을 등진 채 난간에 기대서서 자동차 쪽을 보고 있었다. 최홍서 역시 그런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차에서 내려섰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 다가오는 윤혜안의, 아니 최홍서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해일이 잦아든 바다처럼, 복잡했던 생각에 종지부를 찍고 후련해진 사람처럼, 그에게서는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네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멈춰서, 안고 있던 코트를 내밀었다. 코트는커녕 재킷도 걸치지 않은 셔츠 차림의 그가 너무 추워 보였다.

 “이거... 걸치세요. 저는 재킷 입고 있으니까...”

 난간에서 몸을 뗀 이해성이 가까이 다가왔다. 코트를 받아 든 그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것을 최홍서의 몸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가슴 앞에서 그것을 단단히 여몄다.

 이제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의 표정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좀 어때요?”

 평소보다 더 허스키하게 긁힌 그의 목소리에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돌봐주신 덕분에... 이제 괜찮아졌어요. 열도 다 내렸어요.”

 진짜라고 증명하기 위해서 스스로 이마를 짚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열이 떨어진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지, 그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대신, 최홍서의 발부리 쪽으로, 천천히, 비스듬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대체품은 필요 없다고 했던 말.”

 “......”

 “취소할게요.”

 그리고, 다시금 무겁게 끌어 올린 시선이 최홍서를 향했다.

 지금의 그가 해일이 잦아든 바다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해일 속으로 몸을 던져버리기를 택한 것이었다.

 세상의 온갖 꿈과 희망, 부귀와 영화를 전부 모아 둔 것 같은 도시의 야경을 뒤로하고, 한때 그 도시 전체의 주인처럼 보였던 그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최홍서처럼 안겨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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