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거기, 신도님.”
“......”
서준영을 부르는 소리에 어수선했던 장내가 일순 얼어붙었다. 이제라도 산을 내려가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몇몇 사람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그녀에게 집중했다. 서준영마저도.
“저쪽에 밝혀둔 초들이 보이나?”
“......”
서준영이 그녀의 등 뒤, 제단 위에 밝혀진 초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배우들이나 제작사 직원들은 물론이고 이 영화에 투입되는 말단 스태프 한 사람까지. 모두가 저 제단에 자신의 초를 하나씩 가지고 있네. 강 감독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명단을 죄 받아서 내 손으로 이름을 적어 정성으로 하나하나 직접 불을 붙였어.”
그러고 보니 제단의 초들은 전부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불을 붙인 시간 차이 때문이었다. 이만큼 성공한 무속인이 조수의 손을 빌리지 않고 일일이 자신의 손으로 저 초를 다 밝혔다면, 그것은 드문 일이기는 했다.
“강우현 감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영화가 흥행하기를 빈 적이 없네. 누구도 다치거나 화 입는 일 없이 무사히 제작을 마칠 수 있게 해주십사, 그것을 비는 게야.”
“......”
“자네와는 천양지차지.”
“무, 무슨 소립니까, 그게.”
불퉁하게 받아치면서도 서준영은 자신에게 직접 얘기하는 무속인의 기운에 압도되어 그녀를 거의 곁눈으로만 보고 있었다.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무속인의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보는 사람을 으스스하게 만드는, 영락없는 영매의 웃음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굳어 뒤로 반걸음 물러나는 서준영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 의식이 그저 음식을 차리고 초를 켜 놓고 자신의 바람을 비는 미개한 미신이라면, 자네가 교회에 나가 얼마 안 되는 헌금을 내놓고 비는 그 이기적인 기도들과 대체 무엇이 다르지?”
“무슨... 그런 근거도 없는... 내, 내가 뭘 비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서준영이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그다지 아는 사람이 없었는지, 주변 몇몇이 웅성거렸다. 그 본인도 무속인의 입에서 나온 교회와 기도 소리에 기겁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러면서도 고집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이만큼 귀띔을 주었음에도, 신령님들 모욕하기를 그치지 않는구나. 너의 신에게 빈다는 기도가 고작 상 욕심, 돈 욕심, 동료들에 대한 시기·질투라는 것까지도 일러주랴?”
“......”
“무슨 상을 받게 해달라고 비는지, 네 기도에 누구의 이름이 오르내리는지, 그것까지도 내 늘어놔 볼까?”
서준영을 압박하는 무속인의 목소리와 화법은 송곳으로 사람의 이곳저곳을 푹푹 찌르는 것같이 날카로웠다. 조금 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점잖고 온화한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공포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서준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천히 다가간 그녀의 걸음이 마침내 서준영 앞에서 멈춰 섰다.
“말해 보시게. 이곳에서의 기도와 교회나 불가에서의 기도가 대체 무엇이 다른지.”
무속인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서준영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네의 신은 내 신령님들과 달리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가?”
그녀가 훨씬 더 아래쪽에서 서준영을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그녀의 시선에 짓눌린 쪽은 서준영이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뒷걸음질을 쳤다.
“보이지 않는 관념에 대한 믿음과 정성. 그것이 세상 모든 신앙의 공통인 게야!”
온 산과 천하에 호통을 치는 듯한 그녀의 고함에 서준영은 허겁지겁 굿당을 빠져나갔다. 구르다시피 계단을 내려가 비에 젖어 질퍽거리는 땅을 달리다 미끄러졌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혹시라도 무당이 쫓아오지 않는지 연신 뒤를 살피며 주차장 쪽으로 난 오솔길로 내달려갔다.
서준영을 뒤쫓아 문 앞까지 나왔던 무속인은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뒤를 돌았다.
치마의 뒤를 여미고 막 문지방을 넘으려던 그녀는 늘어선 사람들의 끄트머리, 문밖까지 밀려 나온 윤혜안을 스윽 돌아보았다. 서로 나란히 서 있는 김이정과 윤혜안을 번갈아 찬찬히 살피던 그녀는 곧 굿당 내부로 들어서려던 몸을 완전히 돌려세웠다.
윤혜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눈길에 이채가 감돌았다.
“기운이 영 어지럽다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구나.”
천지간에 오롯이 그 자신과 상대밖에는 없는 듯이,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 그녀에게서 윤혜안에게로 흘러들었다. 사람들은 저절로 그 두 사람에게서 거리를 두며 물러났고, 윤혜안은 온몸이 결박된 사람처럼 꼼짝을 하지 않았다.
굿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와 같은 강한 영력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 것처럼 이해성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신력의 기운을 갈무리하며 윤혜안에게 차분히 말했다.
“신도님, 잠시 둘이서 조용하게 이야기를 좀 하지요.”
“저... 저랑요?”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보이셔서 급히 말씀을 나눴으면 합니다.”
이해성이 서 있는 굿당 내부 자리에서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건강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의식 집전 전에 기운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니, 여러분께서는 이곳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총괄 PD에게 그렇게 전한 무속인은 윤혜안을 데리고 굿당 정문 앞을 떠나려 했다. 겁을 먹은 게 분명한데도 머뭇머뭇 그녀를 따라가려 하는 윤혜안을 보고, 이해성은 더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가 없었다.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거칠게 헤치고 정문 밖, 처마 아래 높게 돋워놓은 기단 위에서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그녀를 뒤따라가고 있는 윤혜안의 어깨를 붙잡아, 가지 못하게 잡아 세웠다.
“어디로 데려가려는 겁니까.”
“......”
이마와 양어깨 끝, 명치에 못을 박아 사람을 고정해두는 듯한 무속인의 시선이 이해성을 돌아보았다.
이해성과 윤혜안을 번갈아 찬찬히 살핀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관한 분이 아니신 듯하니, 그렇게 염려스러우시면 함께 가시죠.”
처마 아래를 지나 건물 모서리를 끼고 도니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방이 하나 나왔다.
아담한 방안에는 방울, 부채, 장구, 징, 작두, 신칼, 장대와 깃발 등 여러 무구(巫具)와 신복이 정갈히 정리되어 있었고, 잠시 쉴 수 있는 공간도 조촐히 꾸며져 있었다.
천장에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무속인은 따로 불을 켜지 않았다. 정문 쪽보다도 실내는 더욱 어둑했다. 마루 밑 공간의 중앙에 윤혜안을 세워놓은 무속인은 한쪽 구석에서 초에 불부터 붙였다.
“내가 왜 보자고 했는가, 신도께서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테고...”
해 질 무렵처럼 어두운 실내를 밝히기에는 두 개의 초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촛불을 밝힌 그녀는 무구를 정리해놓은 선반에서 방울을 꺼내 들었다.
요란하지 않게, 살살살 흔드는 것만으로도 방울 소리는 불길함과 불안함을 자아냈다. 방울을 흔들며 윤혜안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무속인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귀신이야, 아니면 송장이야?”
윤혜안보다 서너 걸음 뒤, 문 옆에 서 있던 이해성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산 사람 흉내를 내며 걷고 말하고 음식을 씹어도 송장이고,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워도 결국은 귀신인데. 귀신이 어찌 몸을 얻었고, 송장이 어찌 혼을 얻었어?”
그저 뜻이 높고 기가 맑은 꼿꼿한 노부인처럼 보였던 최초의 인상은 어디로 가고, 그녀는 온전한 만신의 모습이 되어 장난질로 사람을 괴롭히는 잡귀를 내리치듯 호통했다.
점점 빨라지는 방울 소리를 따라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윤혜안의 어깨가 빠르게 들썩이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이해성이 끼어들려는 순간, 무속인이 방울을 높이 쳐든 채 손을 멈췄다.
“욕지기가 불쑥 치밀면서 전신에 땀이 쪽 빠지고 눈앞이 핑그르르 돌다 까무러쳐버리지?”
이해성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윤혜안이 쓰러지면서 보이는 증상들 그대로였다.
“기린7)이 이무기 탈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짝이 안 맞아 숨이 조일 수밖에.”
쯧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녀는 연민이 밴 눈으로 윤혜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선생들께 듣기만 들었지, 생전에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방울을 내려놓은 그녀는 합장을 하고 윤혜안을 향해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삼도내 귀신 할미의 실수로 의령수에 걸린 저승옷이 잘못 입혀졌으니... 신령님들, 살피소서. 이 혼령의 죄가 아니옵니다.”
무속인의 기운에 꼼짝없이 짓눌려 덜덜 떨고 있는 윤혜안의 뒷모습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무속인의 중얼거림도, 바람 한 점 새어들지 않는데 미친 것처럼 춤을 추는 촛불도, 이해성에게는 전부 교묘한 속임수처럼 느껴졌다.
성큼성큼 걸어가 윤혜안의 앞을 막아선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공기의 압력이 더 높아지기라도 한 것처럼, 깊은 물속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이 쉽지 않았다. 직접 겪고 있으면서도 이해성은 그러한 현상들을 인정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무당에게서 윤혜안을 감추듯이,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든 이해성은 몸을 누르는 압력에 저항하며 무당에게 맞섰다.
“뭐 하는 겁니까? 무서워하는 거 안 보여요? 사람 데려다 겁주는 게 당신들 일입니까?”
무속인의 눈빛이 이해성의 혼을 먹을 듯이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이 또한 흥미롭다는 듯 허리를 펴고 이해성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키가 현저히 더 작아 분명 그녀가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이해성은 그녀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굽어보고 있는 것 같은 압도감을 느꼈다.
“무엇이 신도님의 눈을 흐려 보지를 못합니까?”
“......”
“보이지 않는 관념에 대한 믿음과 정성. 그것이 세상 모든 신앙의 공통이자, 곧 연심이란 것의 본질 아닙니까?”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은 이해성에게 암호 같았다. 잡힐 듯 말 듯 알쏭달쏭하기만 한 수수께끼 같았다. 그런 모호한 발언들이야말로 무속인들의 속임수라고. 지금까지의 이해성은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왜일까.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그녀의 말들을 곱씹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연심의 본질.
보이지 않는 상대의 마음을 믿고 정성을 들이는 것.
팔꿈치에 느껴지는 맨살의 감촉에 이해성은 퍼뜩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았다. 식은땀을 흘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윤혜안이 어느새 자기에게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앞 못 보는 사람처럼 초점이 몽롱한 눈으로 색색 숨을 쉬면서 이해성의 팔꿈치 부근을 꼭 붙잡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의지할 곳이라는 듯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아졌다. 앞에 선 이가 무당이 아닌 신 그 자체라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팔에 매달린 이가 쇼를 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믿고 싶은 것을 믿기로 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무당에게서 등을 돌리고 윤혜안의 어깨를 감싸 방을 나왔다. 제 팔을 스스로 감싼 채 덜덜 떠는 윤혜안을 세워놓고 코트를 벗어 담요처럼 그 몸을 감쌌다. 이가 서로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날 만큼 떠는 몸을 양팔로 끌어안고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