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컴백 (96)화 (96/185)

96화

 오랜만에 한남동에서 맞이하는 주말 아침이었다.

 이 맨션에 이해성 본인이 직접 들어오기로 결정하고, 새 짐을 들인 뒤에는 이곳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서초동도 분당 집도 거의 빈 집처럼 되어버렸었다. 그러다 영화 제작이 다시금 본격화되면서 한동안 서초동에서 지내왔었다. 계열 분리를 마무리 짓는 동안에는 회사와 가까운 서초동이 더 편한 것도 있었고.

 윤혜안을 파악하는 동안에는 서초동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컸을 것이다.

 최홍서가 자주 입었던 후드 티셔츠들과 그가 잠들었던 침대와 그의 손때가 묻은 만화책, 작곡에 사용했던 건반과 맥북이 여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이 집에 다른 누구를 들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날씨가 그다지 맑지는 않네요.”

 아침 식사 시중을 들던 강 실장이 한강 위 부연 하늘을 내다보며 근심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강원도 쪽도 오늘 비 소식이 있다고 합니다.”

 <크림 맨션>의 고사를 지내기 위해 이해성은 주말 이른 아침부터 강원도로 출발해야 했다.

 “행사는 실내에서 진행된다고 하니 날씨는 상관없겠지.”

 이해성은 태블릿의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계열 분리가 서류상으로 무사히 종료되면서 가장 바쁘고 예민한 시기는 넘긴 셈이었다. 이해성이 나서서 간섭해야 하는 단계는 지났고, 양사가 합의한 대로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검토하는 일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해성이 살펴보는 보고서는 ARA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었다.

 “봉안당에서 30분 정도 간단히 추모 행사를 진행한 후에 전체 대관한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 나머지 행사를 진행하실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쪽 레스토랑의 사진입니다.”

 강 실장이 이해성의 시선이 멈춘 사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위치가 어떻게 되죠?”

 “행사 후에 귀가하시기 편하도록 강남역 부근으로 정했습니다. 하남에서 레스토랑까지도 역시 대절 버스로 이동하실 예정입니다.”

 “잘했네요.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 아니니까.”

 최홍서의 첫 번째 기일이 며칠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그의 첫 기일을 기리며 팬들이 조촐하게나마 행사를 가질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한두 달 전이었다. 최홍서의 생전 활동 영상을 함께 감상하고, 그를 추모하는 글과 그림도 공유하면서 서로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이해성은 익명의 팬이라는 이름으로 그 행사를 온전히 후원하고 있었다.

 “뒤쪽에 보시면 그날 팬분들께 제공할 식사 후보를 정리해 뒀습니다. 부사장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싶을 것 같아서 일단 결정을 유보해둔 상태입니다.”

 가격대별로 음식의 가짓수와 종류가 정리되어 있는 사진을 천천히 넘겨보면서 이해성은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려 노력했다.

 “최종 인원이 어느 정도 된다던가요.”

 “백여 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요? 많이 줄었네요. 전에는 백오십 명 정도라고 하지 않았었나.”

 “아무래도 최초 신청자에서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겠죠.”

 이서경이 방콕에서 피살당하고 얼마 후, 이해성은 처음으로 최홍서의 유골이 안치된 봉안당 건물 내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크림 맨션> 황지우 역할의 최종 오디션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기억이 생생하다. 무언가에 홀리고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 문득 그곳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번쩍 솟아났었다. 그러나 성공한 건 그때 한 번뿐이었다. 이후로는 다시 또 그곳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봉안당에 사람을 보내 꽃을 새로 장식하면서 사진으로 그곳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그때마다 팬들이 두고 간 사진이나 그림, 메시지들이 이해성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최홍서를 잊지 않고 추억해 주었으면 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와준다면 좋았을 텐데. 그나마도 매년 줄어들겠지. 내년에는 몇 명이나 와줄까. 그 후년에는? 5년, 10년 뒤에는... 최홍서라는 아이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나 있을까.

 나는, 나는 언제까지 그 아이를 담고 있을 수 있을까.

 사진을 넘겨보던 이해성의 손이 문득 멈췄다.

 샌드위치가 반쯤 남은 접시를 한쪽으로 치워버린 그는 그 자리에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가장 좋은 메뉴들로 진행해요. 우리 홍서 위해서 시간 내서 와주시는 분들인데 잘 대접해 드려야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물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여 보지만 이해성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위스키 한잔할게요.”

 “......”

 이해성은 대답도 없고 미동도 없는 강 실장을 올려다보았다.

 강 실장은 ‘아침부터 말입니까?’라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좀 마셔도 되지 않나? 요즘 같은 시기에?”

 들이부어도 시원찮다는 듯 약간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강 실장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식탁 위에 양 팔꿈치를 괸 이해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날이 다가올수록 미칠 것 같았다. 슬픔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될 수 없는 감정. 어찌할 바를 알 수가 없어서 미칠 것 같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추모 행사 후원은 물론이고, <크림 맨션>의 제작사 이름을 빌려, 각 언론사에 최홍서의 팬들이 주최하는 행사 소식을 전했다. 더불어 ‘X군 스캔들’의 재판 결과가 다시 한번 재조명되어 최홍서가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기사를 써달라는 의미에서 이곳저곳에 선물도 많이 돌렸다.

 그래도 부족했다. 그 아이의 첫 기일을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해, 뭐든 더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방콕으로 가버릴까도 생각했었다. 그 아이가 뛰어내렸던 자리와 그 아이의 몸이... 재로 돌아간 곳을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정신적 자해를 해버릴까도 생각했었다. 더 큰 고통으로라도 이 혼란을, 어쩔 줄 모르는 이 망연한 상태를 뒤덮고 싶었으니까.

 강 실장이 온더록스 잔을 내려놓는 조용한 소리에 이해성은 손바닥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얼음을 넣지 않고 3분의 1 정도 채운 위스키를 단번에 반이나 비워버렸다.

 그런 이해성을 내려다보던 강 실장은 껄끄러운 표정으로 겨우 입을 떼었다.

 “꽃 장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최홍서의 봉안당을 장식하는 꽃은 스스로 골랐던 이해성이기에 이 부분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은 위스키를 마치 진통제처럼 두어 모금 더 삼킨 이해성이 다시 태블릿을 집어 들며 말했다.

 “팬들이 하고 싶은 게 있겠죠. 그날은 내가 나서야 하는 게 아니니까. 기일 후에 다시 생각해 봅시다.”

 “부사장님.”

 “......”

 “나머지 세부 사항들은 제가 알아서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너무 고통스러워 보인다고. 강 실장은 그 말을 감춘 채 얘기하고 있었다.

 태블릿을 식탁 가장자리에 걸쳐놓은 이해성은 의자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댔다. 온더록스를 쥐고 세로로 줄무늬를 새겨놓은 크리스털 표면을 손끝으로 긁는 그의 얼굴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밖 어딘가에 멍하니 초점을 맞춘 이해성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강 실장은... 말투가 독특한 편이죠?”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렇습니까? 오히려 아무런 특징도 없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특징이죠. 말투에 자기만의 습관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그렇군요.”

 강 실장은 그런 것 따위에 별 관심도 없었고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고용주의 심리 상태가 염려스러울 뿐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특징이 있겠죠?”

 “그렇습니다. 아주 눈에 띄는 습관을 갖고 계시진 않지만, 부사장님만의 톤이 확실하시죠.”

 “그럼 강 실장은 말투만으로 나를 알아볼 수 있습니까?”

 그렇게 질문한 이해성은 잔을 들어 술을 좀 더 삼켰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창밖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부사장님께서는 목소리가 꽤 독특하셔서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앉은 이해성은 거의 비어버린 손안의 잔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목소리 얘기가 아니야. 목소리가 다르더라도 말투만으로 나를 구별해낼 수 있냐는 겁니다.”

 “음성 변조 같은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성 변조? 그래요. 그런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겠네.”

 이해성은 씁쓸한 색으로 헛웃음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변조된 그 기계음 같은 목소리라면... 글쎄요, 그건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의 고용주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강 실장으로서는 우선 성실히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강 실장은 내 말투를 얼마나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저는 그런 쪽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서요.”

 이해성은 강 실장에게 계속 질문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의 초점과 어투를 보면 대답을 듣는 것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어 보였다. 질문의 형식을 빌려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더 가까워 보였다.

 “어떤 범죄가 일어났다고 가정을 해봐요.”

 “......”

 “그런데 용의자가 글을 남겨뒀거나, 아니면... 사건 당시의 상황을 음성 메모로 남겨둔 겁니다. 그게 증거품으로 발견됐어요. 그 증거품만으로 실제 사건 현장에서 용의자가 어떤 어투로 얘기했는지... 그것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강 실장의 고용주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온더록스의 표면을 손끝으로 계속 긁어대는 이해성은 극도로 불안정해 보였다.

 “이목구비는 다른데 나를 보던 그 표정이고, 목소리는 다른데 나를 부르던 그 말투야.”

 강 실장은 고용주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부사장님,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내가 아닌 전문 경영인에게 ARA를 맡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죠.”

 “...네?”

 좀처럼 되묻는 일이 없는, 고용주의 의중을 귀신같이 읽어내는 강 실장도 이번만큼은 이해성의 사고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미친놈에게 그룹 경영을 맡길 순 없잖습니까.”

 냉소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한 이해성은 조금 남은 위스키를 마저 깨끗이 비워냈다. 무릎 위에 펼치고 있던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일어난 그는 사념에서 조금 벗어난 듯 보였다.

 “5분 뒤 출발하죠.”

 몽롱히 혼자만의 세계에 잠긴 것 같았던 말투에서 평소의 말투로 돌아와 있었지만, 식당을 걸어 나가는 그의 걸음이 위태로웠다. 고작 위스키 한 잔이 이해성을 흐트러지게 할 리는 없었다.

 사라진 이해성의 뒷모습에서 여전히 희부연 창밖의 풍경으로 고개를 돌린 강 실장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저분을 좀 놓아 드려, 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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