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컴백 (95)화 (95/185)
  • 95화

     재킷을 벗고 소매를 편안하게 팔꿈치 아래까지 접어 올린 그의 셔츠 칼라에는 ‘윤혜안’이 선물한 넥타이가 걸려있었다.

     “어...”

     넥타이에 고정된 최홍서의 시선을 따라 그의 눈길도 아래를 향했다. 그는 픽 웃으면서 넥타이의 매듭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본인이 줬으면서 이제 알아본 건가? 너무하네.”

     그때, 한서 그룹에 가실 때는 다른 넥타이를 해서... 그래서 이 선물은 소용없어진 줄 알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대신, 최홍서는 자기 몫의 머그를 감싼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지난번 선물해 줬던 타이하고 컬러가 겹치지 않아서 둘 다 잘 쓸 것 같아. 고마워요.”

     “...네?”

     되묻는 목소리가 떨리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떨리고, 따뜻한 머그를 감싸고 있는데도 손이 떨렸다. 그런데도 그는 최홍서에게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씁쓸히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지난번 선물해 줬던 타이라니...

     지금 눈앞의 윤혜안을 완전히 최홍서로 대하는 발언이었다. 최홍서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그러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최홍서의 부재를 지워내고 싶어서.

     그걸 아는데도, 정신없이 가슴이 뛰었다.

     “좀 앉지 그래요? 소파에 앉기가 그러면 식탁 의자에라도.”

     계속 서 있는 최홍서에게 이해성은 뒤쪽의 식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에는 2인용 소파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소파에 앉으려면 그와 나란히 앉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안 그래도 어수선했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얼른 앉지 못하고 의자를 이쪽으로 밀었다가 저쪽으로 밀었다가 허둥거리던 최홍서는 그와 멀찍이 떨어진 어중간한 자리에 의자를 놓고 엉덩이를 붙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해성이 머그의 손잡이를 엄지로 문지르면서 느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내가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그런 게 아니라... 여긴 너무 좁아서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아래 카페로...”

     “왜 그렇게 나를 돌려보내고 싶어 해요?”

     “이런 데는 불편하시잖아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불편한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그는 시선을 떨어뜨려 머그 안의 까만 음료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다문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셔츠에 감싸인 넓은 어깨가 부풀어 오르듯 위로 올라갔다가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그의 시선이 다시 최홍서를 향했다.

     “그렇게 사색이 될 거면서 넥타이는 왜 줬어요?”

     핀잔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심각한 무게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후회하듯 짧게 한숨을 쉰 그는 다소 가벼워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래 있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얼굴 하지 마요.”

     빨리 갔으면 하는 것도 아니고, 죽을 것 같은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오래 그와 있고 싶은데.

     그런데도 빨리 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고, 그가 더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 만큼 그의 머무름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최홍서인데, 지금의 나는 최홍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건데...

     부스럭, 부스럭.

     얌전하다 싶었던 티파니가 침대 아래서 놀잇감이라도 찾아냈는지 요란하게 움직여대기 시작했다. 수납공간이 마땅치 않아 침대 아래가 꽉 차도록 밀어놓은 상자 사이에서 미로 찾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역시도 침대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소리가 잠잠해졌다 싶은 다음 순간, 티파니가 털 뭉치의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완전히 빠져나오지 않고, 침대 아래에 납작 엎드려 얼굴만 내민 녀석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낯선 방문객을 올려다보았다.

     냐아?

     누구냐고 묻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다소 불안하게 들렸다. 간식이라도 줘서 마음을 가라앉혀 주려고 최홍서는 얼른 일어나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츄르를 가지고 왔다. 주방 수납장에서 츄르를 꺼내는 것을 보자마자 티파니는 방문객을 피해 쏜살같이 주방으로 달려왔다.

     “그래, 빨리 줄게. 대신 꼭 얌전히 있어야 돼. 알겠지?”

     자리로 되돌아가는 동안 다리에 바짝 붙어 쫓아오는 녀석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그가 돌아갈 때까지 제발 말썽 피우지 않기를.

     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닥에 앉아, 티파니에게 츄르를 먹이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녀석은 앞발을 최홍서의 손에 올리고 정신없이 혀를 할짝거리며 간식에만 집중했다. 방문객에 대한 경계심도 잊은 것 같았다.

     “이름이 뭐죠?”

     묵묵히 이쪽을 보고 있던 그가 그다지 관심 없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젯거리가 없어서 물어본다는 느낌이었다.

     “티파니요.”

     “티파니?”

     “네, 제가 붙인 게 아니라 전에... 그러니까, 사고 전에 제가 그렇게 붙였대요.”

     “아... 그래서 티파니?”

     “......”

     그래서 티파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최홍서는 소파에 앉은 이해성을 쳐다보았다.

     “하얀 바탕에 군데군데 회색 얼룩의 장모. 특히 눈코입 주변하고 귀에 염색이라도 한 것 같은 회색 얼룩.”

     “......”

     “모르고 붙인 건가? 하긴, 본인이 붙인 이름이라는 것도 기억 못 하니까.”

     이해성을 쳐다보느라 손의 높이가 달라졌는지, 티파니가 높은 목소리로 울어댔다. 손을 더 낮추라고, 녀석은 앞발로 최홍서의 손을 누르며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최홍서는 얼른 손을 더 낮춰주었다.

     “록밴드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키운 고양이 중 한 마리가 딱 이런 색을 가진 장모종이었어요. 그 녀석 이름이 티파니였고.”

     “아... 몰랐어요. 전 그냥...”

     “보석 브랜드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생각했나?”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이해성은 낮게 웃었다.

     아무리 핥아도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자, 티파니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폴짝 침대 위로 올라갔다. 최홍서는 입이 말라서 녀석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티파니, 얌전히 있어야지. 츄, 츄르 하나 더 줄게. 츄르 하나 더 먹자, 응?”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뭉쳐져 있는 이불 안으로 파고든 녀석은 그 안에서 멋대로 돌아다녔다. 포스터 위를 밟고 지나가는지 종이가 긁히고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티파니, 티파니, 이쪽으로 나와. 응?”

     최홍서는 이해성이 앉은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쪽으로 이불을 들추고 거의 애원하듯이 고양이를 불렀다.

     “나올 구멍을 못 찾나 보네.”

     이불 속에서 야단을 피우는 티파니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이해성이 도와주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노는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

     고개까지 가로저어 봤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시원하게 들춰버린 이불 안에서 티파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놀자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성을 올려다보더니 이불 안으로 재빨리 다시 숨어버렸다.

     하지만 이해성은 티파니를 찾아 다시 이불을 뒤적이지 않았다.

     마스킹 테이프가 그대로 붙어있는 귀퉁이가 찢기고, 티파니가 함부로 밟고 다닌 탓에 드문드문 구겨진 <이터널 선샤인>의 포스터.

     잠시 멈춰 있던 이해성은 이불을 한쪽으로 완전히 걷어내 버렸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이터널 선샤인> 아래 겹쳐진 다른 포스터들을 끄집어냈다.

     바로 옆에서 바라보는 그는 말을 붙일 수도 없을 만큼 화가 나 보였다. 연인의 외도 현장이라도 목격한 것 같은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넥타이도, 카드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기는 했지만, 이것과는 달랐다. 왜 이 집에서까지 최홍서를 흉내 내고 있냐고 그가 당장 벼락같이 화를 낼 것 같았다.

     “이건... 인터넷에서 싸게 팔고 있어서...”

     빈약하기 짝이 없는 변명을 해보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최홍서에게 선물해 주었던 오리지널 포스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조악한 해상도의 출력물. 그는 말없이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만에 아주 힘겹게 마른침을 삼키는 그의 턱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상담, 계속하고 싶어요?”

     꽉 막힌 목구멍을 억지로 찢고 나온 것 같은,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전혀 의외의 발언이었다.

     “...네?”

     “하기 싫으면 이제 하지 마요.”

     “상담을요?”

     “어차피 하기 싫었는데 나 때문에 억지로 하려던 거잖아요.”

     “안 해도 되는 거예요?”

     내내 포스터만 내려다보고 있던 이해성의 얼굴이 그제야 이쪽을 향했다. 그러나 그가 보고 있는 건 이미 눈앞의 ‘윤혜안’이 아니었다. 그 너머의 ‘최홍서’를 보고 있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냥 알 수가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나를 바라보던 연인의 눈빛을 잊을 수는 없으니까.

     그가 서너 번 반복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

     “안 해도 돼. 하지 마.”

     포스터를 한번 내려다보고 다시 이쪽을 보았을 때, 그의 눈이 ‘윤혜안’의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숨을 들이쉬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할 말을 집어삼키듯 입술을 꽉 다문 그는 한순간 몸을 휙 돌려세웠다.

     “커피 잘 마셨어요.”

     그가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챙겨 현관으로 향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구두를 신던 인기척이 문득 멈추고 등 뒤가 조용해졌다.

     “말썽만 피워서 죄송하다더니... 거짓말이네.”

     “......”

     “나 괴롭히려고 작정했구나?”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 괴롭히려고 작정했구나?’ ― 그건 최홍서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의 집, 손님방에서 처음으로 자고 갔던 날. 그의 품에 있던 최홍서에게.

     그가 보내오는 신호 같아서 무시할 수 없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바라는 말, 과거의 최홍서가 그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그에게 돌려주었다.

     “제가 이러면... 싫으세요?”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뺨이 떨리고, 눈이 떨렸다.

     폐에 남은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이 그가 말했다.

     “......싫을 것 같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복도를 걸어가는,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빨리 가기를 바랐던 게 아닌데.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는데.

     놀아주지 않을 거냐고, 같이 노는 거 아니었냐고. 티파니가 이불 사이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올려다보았다. 그런 녀석을 보며 억지로 웃어주다가 시선을 옮겼다.

     찢기고 구겨진 채로 침대 위에 펼쳐진 세 장의 포스터.

     그가 최홍서에게 선물해 줬던 포스터들은 전부 몇십만 원에서 많게는 몇백만 원까지 프리미엄이 붙은, 개봉 당시의 오리지널 포스터들이었다. 바로 어제 인쇄된 것처럼, 새것처럼 잘 보관된 특상품들이었다.

     하지만 ‘윤혜안’의 침대 위에 뒹구는 것들은 저화질의 스캔본... 말하자면 짝퉁이었다.

     지금 그에게 ‘윤혜안’이라는 존재가 이 포스터 같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홍서에 대한 그리움을 어설프게나마 달래 줄, 역할 놀이에 어울려 줄, 이미테이션, 짝퉁... 가짜.

     그가 준 향수도 가짜였다. 최홍서에게 주었던 것과 병만 똑같은, 내용물이 다른 가짜.

     지금의 자신은 전부 가짜였다. 윤혜안의 탈에 가둬진 ‘가짜 최홍서’.

     상담을 그만두라는 건, 윤혜안의 기억을 되찾지 말라는 의미였다. 윤혜안의 기억을 되찾지 말라는 건 최홍서를 계속 흉내 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과연 다행이고 잘된 일인지, 불행이고 저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그가 원하는 한, 그가 원하는 형태로, 그의 곁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