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최홍서였을 때 가끔 들려줬던 것 같은, 나직하고 달콤한 한숨 소리 뒤에 그가 말했다.
[집 앞에 와 있어요, 지금.]
잘못 들은 줄 알았고,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다. ‘당근판매자님’이 화면에 떴을 때보다 지금 그 말에 몇 배는 더 놀랐다.
[마음만 먹으면 윤혜안 씨 집 위치 정도는 알아낼 수 있다고 했잖아요.]
“......”
[개인 정보 침해 좀 했어요.]
‘윤혜안 씨 자택 위치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 안 합니까?’
‘그러면 개인 정보 침해잖아요.’
웃음기 없는 목소리이기는 해도, 그는 지난번에 나누었던 대화를 소재로 농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홍서는 집 앞에 와 있다는 그의 의도를 생각하느라 웃을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상황이었고,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전화 끊었어요? 나 혼자 떠들고 있는 건가?]
“아니요... 듣고 있어요.”
[혼자 있습니까?]
“네.”
[그럼 잠깐 차나 한잔 내줄래요?]
“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눈도 커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도 한잔 달라고 했어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제, 제가 지금 내려갈게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고, 식탁 앞과 싱크대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기만 했다.
[이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어요.]
갈팡질팡하던 최홍서의 다리가 이번에는 뚝 멈춰 섰다. 발등에 바위가 떨어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생각을 쥐어짜 보려 이마를 두드려봐도 그럴듯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집이... 좁고 지저분해서... 저기, 골목 아래, 좀만 더 내려가시면 카페가 있어요. 거기 가 계시면 제가 금방...”
[걱정돼서 찾아온 사람을 쫓아내는 겁니까?]
“......”
[내가 주최한 회식 자리까지 버리고 왔는데?]
문을 열게 하려고 일부러 죄책감을 파고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이 집에 들어올 생각인 것이다.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방식은 최홍서였을 때는 접해 본 적이 없었던 이해성의 다른 일면이었다.
[아픈 게 아니면 얼굴 못 보여줄 이유가 없잖아요.]
아픈데도 안 아픈 척, 윤혜안이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걸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좁은 원룸에서는 복도를 지나다니는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천천히 걸어온 걸음 소리가 현관 앞에서 조용히 멈췄다.
[아니면,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요?]
이제는 그의 목소리가 전화기 속에서, 현관 밖에서, 이중으로 들려왔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최홍서의 눈이 침대 머리맡을 향했다.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던지고는 넘어질 것처럼 허겁지겁 달려가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가격은 저렴해도 소중히 아낀 포스터들이었는데, 귀퉁이가 찢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잡아채듯 뜯어냈다.
“자, 잠깐만요! 10초만요!”
현관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포스터를 손에 쥐고 초조하게 좁은 집안을 둘러보던 최홍서는 종이 뭉치를 이불 아래에 감추었다. 그러고는 거울을 한번 쳐다볼 새도 없이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하나, 둘... 먼저 보조 장치를 풀고, 셋, 도어록의 잠금을 해제하고, 넷,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다섯... 다섯을 다 셌는데도 준비는 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문을 열었다.
“......”
거짓말처럼, 문틈 사이에 정말 그가 있었다.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놀라서, 단번에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찬 그림이라서, 하마터면 문을 다시 닫을 뻔했다. 실제로도 주춤 물러서면서 약간 문을 당기기까지 했다. 그가 문 가장자리를 손으로 잡고 당겨 열지 않았다면, 닫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이해성의 시선이 포스터를 떼어내고 숨기느라 상기된 얼굴과 흐트러진 호흡을 살펴보았다.
“운동이라도 하고 있었어요?”
최홍서는 손가락을 빗 삼아 머리카락을 정돈하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니요... 들어오세요.”
할 수 없이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그가 들어올 자리를 내주었다.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못 가져왔어요. 윤혜안 씨는 꽃도 사다 줬었는데.”
“신경 쓰지 마세요.”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선 그는 내부를 둘러보기도 전에 곧바로 뒤따라 들어온 최홍서를 마주 보았다.
“증상 있는데 참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의사가 참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니에요. 그냥 컨디션이 약간 안 좋은 거라서요.”
“......”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이해성은 옆구리 사이에 끼고 있던 재킷을 식탁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못 믿겠다는 얼굴로 성큼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진짜 열이 없는지 한 번 보죠.”
당장 이마를 짚어보려고 하는 그의 움직임에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시야 위로 다가오는 그의 손을 힐끔 쳐다보면서 어깨를 움츠리기까지 했다.
“지, 진짠데요.”
“진짜라면 피할 이유가 없잖아요.”
조금 이상한 논리 같았지만, 안 된다며 이 이상 뻣뻣하게 구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앞머리 아래로 이마를 짚은 그는 중병을 진단하는 의사처럼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마에 닿은 그의 손바닥이 따뜻했다.
살아서, 남의 몸으로나마 다시 살아서, 그의 손에 닿았다는 감각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눈을 부릅떠 힘을 주고 입을 꽉 다물었다.
“흠.”
손이 조금 오래 머무는 게 아닌가 싶어 슬쩍 몸을 뒤로 빼려는 순간, 그의 손이 뺨으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바윗덩이가 발등으로 떨어져 뼈를 완전히 으스러뜨린 것 같았다.
귓가를 스친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 정도로 그의 손이 깊숙이 들어왔다. 넓은 손바닥이 볼에 완전히 밀착됐다. 발부리만 내려다보고 있던 최홍서의 귀에 나직한 목소리가 닿아왔다.
“착하다.”
그건 최홍서에게 하는 말이었다.
끼니만 잘 챙겨 먹어도, 보고 싶다는 말에 얌전히 얼굴을 맡기기만 해도, 그의 손에 가만히 뺨을 비비기만 해도... 그는 꼭 착하다고 칭찬해 줬었다.
다시 나타난 이서경의 협박이 날로 심해져 기어이 몸에 병이 났던 날.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던 그날.
숙소로 찾아온 이해성은 지금처럼 이마와 뺨을 감싸 열을 가늠했었다. 그리고 펄펄 끓는 이마에 입을 맞추며 착하다고 말해줬었다.
열에 시달리는 비몽사몽 중에 가지 말라고 그를 붙잡았던 것을 기억한다. 한 번도 그렇게까지 적극적인 의사를 보인 적이 없었는데, 그대로 그를 보내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안 하던 짓을 했었다.
아픈 사람을 건드리지 않으려 하는 그를 억지로 유혹해 기어이 잠자리를 가졌었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안감에, 병이 돋은 몸보다도 마음이 더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지금 그는 윤혜안이 아니라 최홍서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최소한, 윤혜안이 보여주는 최홍서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억은 자비 없이 심장을 자근자근 저미는 날 선 식칼과도 같았다.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떠난 후 그에게도 내내 마찬가지였겠지.
목과 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물려 그의 손에서 슬쩍 빠져나갔다. 얼굴을 감추기 위해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 등 뒤에서 그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열은 없는 것 같네요.”
“소파에 앉아 계세요. 차 드릴게요. 캡슐 커피랑 티백 녹차밖에 없긴 한데...”
“커피로 하죠.”
그에게 등을 보인 상태로 괜히 더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소파에 앉아있으라고 했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요리 중이었습니까?”
“요리는 잘 못해요. 고양이 간식 만들다가...”
그가 흉을 볼 것도 아닌데, 어수선하게 어지럽혀진 주방이 부끄러워서 이것저것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었다.
“고양이는 안 보이네요.”
“침대 아래에 숨었나 봐요.”
그 뒤로는 더 말을 걸지 않아서 소파에 가서 앉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커피를 내린 머그를 가지고 뒤를 돌았을 때, 그는 방 한가운데에 서서 소파 위 선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 왔을 때부터 그곳에 있었던 선반 위에는 드라이플라워와 향수가 놓여 있었다.
VIP 병동에서 퇴원할 때 그가 수행원을 통해 보내줬던 꽃다발이었다. 그대로 버리기 싫어서, 드라이플라워로 만들어 화병에 꽂아 두었던 것이다. 손재주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서, 동영상을 보면서 열심히 따라 했는데 3분의 1 정도는 버려야 했다. 윤혜안의 생일에 그가 주었던 향수까지 화병 옆에 나란히 모셔져 있었다.
포스터를 숨기기에 급급해 저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아, 그건... 모처럼 주신 거라, 비싼 꽃 같아서. 비싼 거니까 아까워서...”
다른 의미는 없다고, 딱히 당신이 준 것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간직하려 했던 게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사이, 그가 이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양손에 쥔 머그 중 하나를 건네받으면서 완전히 다른 얘기를 꺼냈다.
“말썽 피우는 거, 알고 있긴 했나 봐요.”
“......”
소파에 앉은 그가 머그를 입술로 가져가면서 말했다. 오늘따라 회전이 느린 두뇌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또 잠시 머릿속을 더듬어야만 했다. 그가 이 집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모든 활동이 정지될 만큼 소화하기가 벅찼다.
‘너무... 말썽만 피워서... 죄송하다고...’
아, 그래. 강 실장을 통해 넥타이를 건네면서 함께 전해달라고 했던 말이었다. 아마도 강 실장이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전해주었던 모양이다. 넥타이, 넥타이... 그제야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재킷을 벗고 소매를 편안하게 팔꿈치 아래까지 접어 올린 그의 셔츠 칼라에는 ‘윤혜안’이 선물한 넥타이가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