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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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분위기 너무 좋은데요? 이런 데를 어떻게 몰랐지?”
“그러게요. 외관도 와인바가 아니라 갤러리인 줄 알았어요. 우리 매니저가 이 주변을 몇 번이나 뺑뺑 돌았다니까? 여기 아닌 줄 알고.”
“부사장님, 감사해요. 이런 좋은 곳에 초대해 주시고.”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제안했는데 응해 주셔서 감사하죠.”
회식 장소인 와인바에 먼저 도착해 있었던 이해성은 속속 도착하는 배우들을 직접 맞이했다.
“지난번에 영화 엎어지기 전에 첫 회식했던 곳이에요, 여기. 오랜만에 와 본다!”
“그랬어? 요즘 와인바 분위기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좀 질렸는데 여기 너무 괜찮은데?”
배우들은 와인바 내부를 둘러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서로의 모습을 찍어주면서 다른 사람들이 마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어느 배우의 말대로, 이곳은 최홍서가 황지우 역할을 맡았을 때 처음 회식을 가졌던 장소였다.
당시에는 많은 관계자들 사이에서 각자 핵심 투자자와 주연 배우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서로 말 한마디 제대로 섞을 틈도 없었다. 남자 친구가 되고 싶다고, 정식으로 고백하기 전이었고, 최홍서는 이해성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던 때라, 말을 붙이기가 조심스럽기도 했다.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최홍서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여러 사람 사이에 섞여 있어도, 그 아이가 보내오는 시선은 금방 감지되었다. 시선이 피부를 꾹 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막상 이쪽에서 바라보면, 보고 있지 않았던 척 고개를 돌리는 태도에 답지 않게 입가가 간질거리기도 했었다. 능숙하게 피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얼굴을 보면 더더욱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연애를 시작하는 건 이해성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새콤달콤하다고 하는, 소위 ‘썸’의 시기를 즐기는 타입도 아니었고, 연애의 시작도 과정도 그리고 끝도, 싱겁고 헐겁기만 했었다.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 애써본 적도 없었고, 맞지 않는다 싶으면 노력을 해볼 것도 없이 서로 돌아섰다. 연애에까지 노력을 기울이기엔 의무와 부담이 너무 많았고, 상대도 대체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더 알고 싶다는 궁금증, 바라보고 있으면 자꾸 흐뭇해지는 즐거움, 놀라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진심을 전하며 다가가려는 노력. 그 모두가 이해성에게는 처음이었다.
이 자리에서 최홍서와 서로를 흘깃거렸던 그 순간의 짜릿함을 떠올리면서, 이해성은 천천히 잔 속의 와인을 비워갔다.
각자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 이동한 탓에 배우들의 도착 시각도 제각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주문한 요리와 와인이 서빙된 뒤에도 윤혜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이해성은 도착이 늦어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부사장님, 요리도 드시고 계세요?”
“네, 먹고 있습니다.”
“술만 드시는 것 같아서요. 추천해 주신 전복 버터구이, 이거 아주 맛있는데요. 좀 드셔 보세요.”
“맞아요. 전복이 어찌나 연한지 쫄깃한 게 아니라 부들부들해요.”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전복을 한 점 집어 먹기는 했지만, 그다지 맛을 알 수 없었다. 시선이 자꾸 개별실의 입구를 향했다. 시간이 얼마나 됐지? 힐끔, 손목시계를 확인하려는데 누군가 이해성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부사장님, 저 지난번에 추천해 주셨던 영화 봤어요!”
모두가 다 같이 둘러앉은 커다란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은 박동하였다. 이해성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자, 박동하는 웃음 띤 앳된 얼굴로 한 번 더 강조했다.
“추천해 주셨잖아요. <해피 투게더>요!”
“아, 잘 봤습니까?”
서초동 집의 옥상 정원에서 바비큐를 했던 날, OST가 좋은 영화를 추천해 달라기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추천했던 기억이 있었다.
“탱고가 그렇게 슬프고 멋있는 음악인지 몰랐어요. OST도 좋았고, 영상미, 배우들 연기... 다 너무 좋았어요! 아르헨티나로 여행 가고 싶어졌을 만큼요.”
들뜬 얼굴로 영화 얘기를 떠드는 박동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해성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으면서, 이해성은 약간 초조함이 묻어나는 어투로 빠르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춘광사설5)>을 좋게 봤다면, 아마 같은 감독의 <화양연화>도 마음에 들 겁니다.”
그리고 박동하가 다시 말을 걸기 전에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송 피디님.”
“네, 부사장님.”
“배우분들은 다 도착하신 건가요? 윤혜안 씨가 안 보이네요?”
“아... 그게요, 혜안 씨는 오늘 못 오게 됐어요.”
이해성과의 사이에 두 명 정도를 더 끼고 앉아있던 총괄 PD가 상체를 숙여 이해성과 눈을 맞추면서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나요?”
“몸이 안 좋다고 해서요.”
“몸이 안 좋아요?”
이해성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경직됐다. 미간이 좁아지면서, 그는 노기가 섞인 것과도 흡사한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식은땀을 흘리거나 구토 증세가 있었던 겁니까?”
“아니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컨디션이 별로라면서 집에서 쉬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보기엔 그렇게 아파 보이는 건 아니었어요.”
PD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듯이 말했지만, 이해성을 안심시키지는 못했다.
옥상 정원의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었던 윤혜안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자동차 시트가 축축할 정도로 흘려댔던 땀과 병원 침대에 누워 자기를 바라보던 열에 들뜬 눈빛.
‘쓰러진 척했던 게 아니라는 거, 그것만이라도 이제... 믿어주시는 거죠?’
이해성은 핸드폰을 쥐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개별실로만 이루어진 와인바의 복도에서는 각 룸의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가늘게 새어 나온 소리들은 복도에 흐르는 잔잔한 재즈곡에 섞여 음악의 일부가 되었다.
이해성은 주머니에 손을 찌른 한쪽 어깨를 복도 벽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어둑한 복도에서 핸드폰의 액정 빛이 이해성의 얼굴 위에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저장해 두지는 않고 머릿속에 기억해 두기만 한 번호를 천천히 눌러나갔다. 그러나 점점 느려지던 손가락은 열한 자리의 숫자를 전부 누르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이해성은 시선을 끌어내려 목에 걸린 넥타이를 내려다보았다. 단정하게 정돈된 길고 커다란 손가락으로 매듭에서부터 넓은 아랫부분까지, 쓰다듬듯 길게 타이를 쓸어내렸다.
푸른색과 회색이 섞인 사선 줄무늬.
윤혜안에게 받은 넥타이였다.
벽에 기대서서 타이 끝을 만지작거리던 이해성은 문득 뒤를 돌았다. 룸으로 되돌아가는 뒷모습은 마음을 정한 듯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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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아, 냐아.
티파니는 최홍서의 발치에 앉아 울어댔다.
“뭐 하는 건지 궁금해? 티파니 맛있는 거 만들어주려고. 근데 아직 한참 기다려야 돼.”
싱크대 앞에서 흐르는 물에 단호박과 당근을 씻으면서 최홍서는 중간중간 티파니를 내려다보았다.
목이 아플 정도로 한껏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티파니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주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웃던 최홍서는 씻어낸 채소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직 물을 넣지 않은 냄비에서는 염분을 뺀 열빙어와 닭가슴살이 대기 중이었다.
회식에 참석하지 않은 대신 오늘은 티파니의 츄르 간식을 직접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요리를 잘하는 편도 아니고, 관심도 없었는데, 티파니의 간식을 만들어주는 건 귀찮지 않았다.
회식은 물론 가고 싶었다. 그와 말 한마디 섞지 못하더라도,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하지만 최홍서가 선물한 넥타이를 선택한 이해성이 ‘윤혜안’을 어떻게 대할지... 그게 무서웠다. 앞으로도 그를 안 볼 생각은 절대 아니었지만,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좀 더 필요했다.
씻어낸 단호박과 당근을 약간 큼직하게 썰어서 냄비에 넣고는 물을 부어 삶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에서 다음 레시피를 확인했다.
“그럼 이제 다음은... 브로콜리랑 양배추를 데쳐야 하는구나. 브로콜리랑... 양배추...”
싱크대 쪽으로 막 돌아서려는데, 핸드폰의 진동음이 울렸다. 무심코 다시 몸을 돌리면서 액정을 확인한 최홍서는 허리를 비튼 기묘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식탁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지도 못한 채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근판매자님.
입이 마르고 호흡이 빨라졌다. 젖어있는 손을 들어 손등으로 이마를 쓸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받아야 하나?
우왕좌왕하는 사이 전화는 끊어졌다.
더듬더듬 주방에서 사용하는 타월을 가져와 손의 물기를 닦아냈다. 갑자기 넋이 나가서 다음에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잊고 손 놓은 사람처럼, 식탁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우우웅, 우웅. 우우웅.
믿기지 않게도 ‘당근판매자님’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열 번 정도 신호가 간 뒤에 끊어졌던, 그리고 다시 걸려 오지 않았던 지난번과는 달랐다. 다섯만 세자. 다섯 셀 때까지도 끊어지지 않으면 받는 거야.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서 천천히 숫자를 셌다. 전화는 여전히 끈질기게 울리고 있었다.
최홍서의 떨리는 손이 전화로 향했다. 통화를 연결한 후에도 말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이 없는 거 보니까, 이 번호도 알고 있나 보네요.]
침묵을 깬 건 이해성 쪽이었다.
“어쩐... 일...”
하루 종일 말을 안 한 사람처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프다면서요.]
“아니요, 아프... 흠, 아픈 건 아닌데요.”
[아픈 것도 아닌데 회식엔 왜 안 왔어요?]
“......”
무서워서요. 부사장님 보는 게 무서워서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애꿎은 식탁 가장자리만 손으로 긁어댔다.
최홍서였을 때 가끔 들려줬던 것 같은, 나직하고 달콤한 한숨 소리 뒤에 그가 말했다.
[집 앞에 와 있어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