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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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스터디가 있는 날이면 강우현 감독의 자택에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진지하고 열띤 스터디가 끝나고 나면, 그 후에는 분위기가 바뀌어서 여러 주제를 오가면서 화기애애한 수다가 이어졌다.
“어제 송 PD랑 세트장에 다녀왔는데, 우리 맨션이 진짜 너무 근사하게 지어지고 있어서 설렜다니까? 이거 봐요, 내가 호별로 다 찍어왔어.”
직접 찍어온 세트장 사진을 배우들에게 보여주는 강 감독은 뿌듯한 얼굴이었다.
<크림 맨션>이라는 제목처럼, 영화는 맨션 입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중심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씬이 세트 촬영이었다. 아무래도 세트 촬영은 낮밤의 변화나 날씨에 영향을 훨씬 덜 받아서, 그 부분에서는 한결 편한 촬영이 되겠다고 다들 반기는 분위기였다. 물론 강우현 감독 작품에서는 그런 것보다 연기 자체가 문제이긴 했다. 대충 봐주는 감독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지난번에 얘기했던 우리 영화 고사! 드디어 다음 주로 확정됐어요. 모시는 분이 워낙 바쁜 분이라 시간 조율하느라 얼마나 애먹었는지 몰라.”
강 감독이 손사래를 치고 엄살을 부리며 이어 말했다.
“고사 지내는 것 때문에 다음 주는 시나리오 스터디 생략이니까 다들 그렇게 알아둬요. 스터디 없다고 시나리오 연구, 연기 연습 게을리하지 말고.”
고사 얘기가 나오자, 배우들의 관심사가 세트장 사진에서 그쪽으로 확 기울었다. 강 감독이 주의를 주는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도 않는지 두세 명씩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감독님, 고사 지내러 오시는 분이요. 많이 유명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김이정의 목소리가 시선을 모았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예약도 못 한다고 하더라구요. 기존 손님 소개로만 새 손님을 받는다고... 저도 명함 좀 받을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오호, 우리 이정 씨가 그런 데에 관심이 있었어? 요즘 세대들은 무속 신앙 구닥다리 취급하는 줄 알았는데.”
강 감독은 김이정의 관심이 반가운 눈치였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그런 쪽에 무관심하신데, 먼 친척분이 박수무당이시거든요. 촌수는 멀어도 가까이 살아서 교류가 좀 있었는데, 이상하게 전 어릴 때부터 그 집이 편하고 좋더라구요. 손 없는 날 이사하는 건 당연하고, 연초에는 운세 보러 가고... 아, 중요한 오디션 보러 갈 때는 뭘 입고 갈지 뭘 몸에 지니고 갈지, 그런 것도 꼭 점집에 물어봐요.”
“그랬어? 그럼 <크림 맨션> 오디션 볼 때도?”
“파란색 옷을 입고 신발은 하얀색으로 신으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오디션 붙었죠.”
김이정과 강 감독 사이에는 금세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세계가 형성됐다.
김이정이 무속 신앙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최홍서에게도 약간 뜻밖이기는 했다. 도도하고 세련된 이미지의 그녀는 무속인을 찾기보다는 타로점을 더 즐겨 할 것 같은 인상이었던 것이다.
“에이, 그것 때문에 오디션에 붙은 게 아니라 이정 씨 연기 실력인 거지. 그런 걸로 오디션 합격할 것 같으면 이 바닥에 일 안 풀리는 배우 하나도 없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건 서준영이었다.
“그런 건 적당히 재미로 하는 게 좋은 거지, 너무 맹목적으로 믿으면 좀 그래.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고.”
본인도 분명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서준영은 과학을 들먹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옆집 개가 짖나 싶은 심드렁한 얼굴로 서준영을 쳐다보고 있던 김이정이 문득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면서 씨익 웃었다.
“선배님 과학을 잘 아시나 봐요?”
“......”
“제가 알기로, 학업 성적이 그렇게 출중하시진 않았던 것 같던데.”
김이정의 응수에 다들 겉으로 티는 안 내도 흥미로워하는 눈치들이었다.
직접 들어서 알게 된 건 아니지만, 알고 보니 김이정은 유명 자동차 기업 오너의 아들과 사귀고 있었다. 파파라치에 의해 스캔들이 불거졌고, 재벌과 연예인의 스캔들이 대부분 그렇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지나갔어도 됐을 텐데, 그들은 열애를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입조심을 하지 않는 서준영이 나이도 어리고 후배인 김이정에게 완전히 함부로 굴지 못하는 데에는 그 이유도 포함되어 있을 듯했다. 강자 앞에서는 저절로 겸손해지는 부류의 사람이었으니까.
“자, 다들 이후에 시간 되시죠?”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깬 것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타난 총괄 PD였다.
“이해성 부사... 아니, 우리 투자자님께서 모처럼 회식을 갖자고 연락 주셔서요.”
언제쯤 적당히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나 때를 살피고 있었던 최홍서는 이해성의 이름이 나오자, 흠칫 굳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환호하며 반기는 분위기였다.
“제작비랑 별도로 투자자님이 격려 차원에서 맛있는 거 사 주신다고 하니까 되도록 참석해 주세요. 혹시 참석 못 하시는 분들은 저한테 얘기해 주시고... 장소는 메신저로 보내드릴 테니까 각자 그쪽으로 이동해 주시면 되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들 들뜬 얼굴로 부산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을 챙기는 사람, 차를 대기시키도록 매니저에게 전화하는 사람, 선약을 취소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 제각각 ARA의 이해성이 주최하는 회식을 기대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느릿느릿 시나리오를 가방에 챙겨 넣던 최홍서의 귓가에 박동하의 쾌활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피디님, 그럼 부사장님도 회식 장소에 오시는 거 맞죠?”
“네, 그쪽으로 바로 오신다고 하셨어요.”
“오늘 스터디 때도 또 못 뵈는 건가 섭섭했는데, 완전 잘됐다.”
“뭐야, 동하 씨 그사이 부사장님이랑 친해졌나 봐요?”
“아니요, 뭐... 친해지긴요. 그냥 지난번에 부사장님 댁 초대받았을 때 잠깐 영화 얘기를 했었거든요. 그때 추천해 주신 영화 어떻게 봤는지 말씀드리고 싶은데, 지난번에 못 봬서요.”
친해진 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박동하는 이해성과 단둘이 나눈, <크림 맨션> 일과 무관한 대화를 은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과시하려는 의도보다는 어린아이같이 뿌듯하게 자랑스러워하는 천진한 느낌이 있어서, 박동하의 말을 듣고 있는 총괄 PD나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귀엽게 보는 눈치였다.
영화 얘기...
바비큐 그릴 앞에서 고기를 구워주는 이해성에게 박동하가 오래 말을 걸었던 그때, 영화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생일 파티에 초대했던 것도 아마 그때였겠지.
누가 가슴뼈를 억지로 벌려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뻐근하게 아팠다. 그의 머릿속, 가슴속에는 지금도 여전히 ‘최홍서’뿐이라는 걸 다 보고 들었으면서도, 그런 귀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고작... 박동하와 단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질투를 느끼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그를 나눠 갖기 싫었으면, 그를 포기하지 말았어야지. 네가 놓은 거잖아.
마음이 멋대로 질투를 느껴버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해도, 그걸 드러낼 자격은 없었다.
가방끈이 가슴 앞을 가로지르도록 둘러멘 최홍서는 총괄 PD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피디님, 아무래도 저는 회식 참석이 어려울 것 같아요.”
“어... 혜안 씨, 왜요? 또 어디 안 좋아?”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최홍서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회식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곁을 지나쳐가던 김이정이 대화 내용을 들었는지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붙였다.
“혜안 씨 회식 빠져요?”
“컨디션이 약간 안 좋아서, 집에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쉽다. 혜안 씨 몸도 약하니까 가자고 조르지도 못하겠고.”
“저 안 약해요.”
“화장실에서 쓰러졌으면서?”
“그때는 진짜 특수했던 거고, 원래는 튼튼해요.”
“흠...”
김이정은 그다지 신용이 가지 않는다는 듯 코를 찡그리고 혀를 찼다. 그러고는 곧 최홍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감기 기운만 좀 있어도 자기 관리 잘하긴 해야 하니까. 가서 푹 쉬어요, 그럼.”
말하지 않는 것도 웃긴 것 같아서, 회식에는 못 갈 것 같다고, 박동하에게도 그렇게 전하고 나서 용재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평창동을 내려왔다.
컨디션이 안 좋다는 건 꼭 거짓말은 아니었다. 컨디션에는 몸뿐만 아니라 감정도 포함되는 거니까.
며칠 전, ARA 그룹은 한서 그룹과의 계열 분리를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한서 홀딩스의 사옥을 방문한 이해성의 모습을 뉴스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해성은 ‘윤혜안’이 선물한 넥타이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취재진의 뜨거운 플래시 세례 속에서, 이해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킷의 단추를 채우며 세단의 뒷좌석에서 내려섰다.
검정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네이비색 슈트와 함께 그가 선택한 것은, ‘최홍서’가 선물한 넥타이였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봐도, 분명히 그 넥타이였다.
호찌민 스케줄을 다녀오는 길, 그에게 선물하려고 면세점에서 구입했던 넥타이.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기에 자신의 선물이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그런 것으로 선물의 가치를 저울질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나 생각하면서 고른 거예요?’
고작 넥타이 하나에 그는 세상을 다 얻기라도 한 것처럼 감격한 얼굴이었다.
‘진짜 예뻐 죽겠다.’
그리고 그때, 그의 차에서 제대로 된 첫 키스를 했었다.
좋아하는 상대와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으며 교감하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보통의 첫 키스를.
모든 사람들이 ARA 그룹 역사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거라고 말하는 날에, 그는 바로 그 넥타이를 선택했다.
그것이 ‘윤혜안’의 선물에 대한 그의 대답 같았다.
내 마음은 여전히 최홍서만의 것이고, 네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는... 처음 ‘윤혜안’에게 말했던 그대로 대체품 따위는 필요 없다는, 말보다 더 분명한 대답.
너에 대한 내 관심은 오직 최홍서와 연관된 부분만이라고. 그것을 제외한 ‘윤혜안’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얼마나 행복한 대답인지를 생각한다. 얼마나 분에 넘치는 사랑인지를.
이해성은 최홍서를 여전히 사랑했다. 너무나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마도 가슴의 이 통증은 행복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랑이 행복한 만큼 아픈 것이다.
너무 큰 것을 너무 작은 것에 담으려고 하면, 너무 작은 것이 찢어지거나 터져버리기도 하는 거니까. 그래서 아픈 것이다. 나의 좁은 마음에는 그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형, 어디 들러서 저녁거리라도 포장해 갈까요?”
운전석에서 용재가 묻는 목소리에 최홍서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주무세요?”
이번에도 대답이 없자, 용재는 라디오의 볼륨을 가만히 낮춰두었다. 듣기 좋은 편안한 목소리로 디제이가 곡을 소개한 뒤,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소년의 깨끗한 미성이 이어졌다. 동화 같은 멜로디와 가사에 무심코 귀를 기울이던 최홍서는 용재에게 들키지 않도록 씁쓸히 미소 지었다.
대중가요의 가사가 모두 자기 얘기처럼 들리면 사랑을 하고 있는 거라고들 하던데. 예외는 없는 모양이었다. 들려오는 그 곡의 가사처럼 기도라도 하고 싶었다.
믿기지 않는 이 꿈속에서, 내가 그를 지키려면, 그리고 그의 곁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끝없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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