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기사가 추가로 몇 개 더 나오기는 했는데, 오후에 봤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고, 새로운 사진도 볼 수 없었다.
업데이트된 것 없이 그대로라는 사실에 안심을 한 건지 실망을 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최홍서는 심호흡하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다지 취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집 현관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를 무렵에는 제법 노곤하게 취기가 돌았다. 빨리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고 곧장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센서에 불이 들어오자, 바닥에 내려와 물을 마시고 있던 티파니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신발을 벗고 실내로 올라서니 녀석은 쪼르르 캣폴 위로 달아나버렸다. 처음 보는 사람을 피하듯이 구는 녀석의 태도가 오늘따라 괜히 서운했다.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곧장 캣폴 앞으로 가서 엎드린 녀석의 앞발을 톡톡 두드렸다.
“티파니, 늦게 와서 화났어?”
녀석은 이번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화날 일도 아닌 거야? 내가 있든 말든... 신경 안 써서?”
녀석은 창문으로 새어드는 희미한 빛 속에서 자그마한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그런 녀석을 보며 힘없이 웃던 최홍서의 머릿속에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원래 고양이보다 강아지를 더 좋아했다면, 박동하는 왜 굳이 반려동물로 강아지가 아닌 고양이를 기르게 됐을까?
그러나 잠깐 떠오른 물음표일 뿐이었다. 진지하게 매달릴 만한 일도 아니었다.
웬일로 한동안 앞발을 만질 수 있게 내버려 두었던 티파니는 그새 귀찮아졌는지 스윽 발을 거두어갔다. 최홍서도 가방을 벗어두고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불을 끄고 누운 뒤에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나니 정신이 더 또렷해진 것 같았다. 살이 반쯤만 닫혀 있는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드는 빛을 보면서 한참을 뒤척이기만 했다.
세상과 차단되어 있는 것 같으면 불안해지는 심리는 여전해서, 블라인드를 완전히 닫아둘 수가 없었다. 그래도 불안해질 때는 발치의 캣폴 위를 쳐다보았다. 간혹 티파니가 좁은 집안을 돌아다니며 부스럭거리고 노는 소리도 최홍서에게는 고마운 백색 소음이었다.
오늘 녀석은 캣폴의 바구니에서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우우웅, 우웅.
베개 옆에 두었던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는 소리에, 티파니가 귀를 쫑긋 세우면서 바로 머리를 일으켰다.
진동이 강한 편도 아니었는데 녀석은 잠귀가 밝았다. 얼른 진동부터 끄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던 최홍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심장이 정지할 만큼 놀랐는데, 벌떡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다. 등 뒤에 귀신이라도 와있는 것처럼, 이불 속에서 숨소리마저 죽인 채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당근판매자님.
밝아진 화면 속에 떠오른 이름은 분명 당근판매자님이었다.
멈췄던 심장이 즉시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비정상적일 정도의 빠르기였다. 맥박치는 핏덩어리가 금방이라도 몸 밖으로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곧 전신이 떨려왔다. 억제하고 있었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으로 핸드폰을 움켜쥔 채 화면 속의 이름만 쏘아보았다.
상담 때문에 그에게 번호를 알려주긴 했었다. 하지만 상담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통화는 모두 강 실장과 진행해 왔었다. 이해성과 통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윤혜안’에게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번호... 이건 그의 개인 핸드폰,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않는 사적인 번호였다.
그는 지금 윤혜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최홍서에게 전화하고 있는 것일까.
폭탄이라도 떠안은 것처럼 핸드폰을 쥐고 몸을 떠는 사이, 진동은 잦아들었다. 숨이 넘어갈 듯한 울음을 멈추고 마침내 깊은 잠에 빠진 아이처럼. 화면은 다시 암전되었다.
난데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번 터져버린 울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두 손으로 핸드폰을 움켜쥔 그대로 상체가 고꾸라졌다. 어깨가 떨리고, 불규칙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무릎을 꿇은 채 침대 위에 엎드린 모습은 신에게 참회의 기도라도 드리는 죄지은 신도 같았다.
전화를 받고 싶었다. 예전처럼. 네, 저예요. 라며 거리낌 없이 그의 전화에 응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만나지 못한 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잠들기 전까지 떠들고 싶었다. 예전처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윤혜안이 되어 덤덤히 전화를 받고, 전화를 건 상대가 이해성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척을 하면 되는 건가?
아니면, 알려준 적 없는 그의 프라이빗 폰 번호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최홍서인 척 받으면 되는 건가?
핸드폰의 진동이 울린 것보다 더 긴 시간을 흐느낀 최홍서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부스스 얼굴을 들었다.
“......”
언제 다가왔는지 티파니가 핸드폰을 움켜쥔 손을 핥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의 고양이는 작은 혀로 최홍서의 손마디를 핥더니, 곧 그 앞에 엎드려 옆으로 배를 드러냈다. 만져도 좋다는 신호였다.
마치, 자기를 쓰다듬기만 하면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고, 자기에게 그런 대단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의기양양한 모습에 웃음이 났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 위를 닦아내면서,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도 최홍서는 웃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티파니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배를 쓰다듬으면서 녀석의 털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당근판매자님’이라고. 남몰래 그의 번호를 그 이름으로 저장해둔 것만으로 만족했었다. 그 이름으로 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 오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다.
‘당근판매자님’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통화 1건.
그것이 지금의 최홍서에게는 윤혜안의 몸으로 눈을 뜬 것보다 더 큰 기적처럼 느껴졌다.
티파니를 꼭 껴안은 채 나란히 웅크리고 누워서 자그마한 녀석의 온기에 매달렸다.
티파니를 남겨주고 가서, 윤혜안에게 많이 고마웠다.
■
등받이가 높지 않은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오랫동안 정지 상태였다. 구석에 세워진 스탠드에만 조명을 밝힌 서재는 어둑했다.
자정이 넘어서야 퇴근해 피로감이 상당했지만, 이해성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벌써 30분 이상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슈트 차림에 재킷만 벗은 그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앞에 놓인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한참이나 노려보는 중이었다.
풀어 헤쳐진 리본이 테이블 아래로 길게 늘어졌고, 진한 자주색의 긴 상자가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펼쳐놓은 얇은 유산지 사이에 비스듬히 놓인 넥타이. 푸른색과 회색이 섞인 사선 스트라이프 넥타이였다.
“흠...”
다문 입술 사이로 무거운 신음을 흘리면서 이해성은 입가를 천천히 쓸었다. 허리를 비트는 움직임에 와이셔츠가 등받이를 스치며 바스락거렸다.
넥타이 아래쪽에 펼쳐놓은 작은 카드에 적힌 글귀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차마 그것을 다시 손에 쥘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저한테 부사장님은... 뭐든지... 세상을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 같아요.’
순진하게까지 느껴졌던 그 말에, 어떤 논리적인 근거도 없는 어린아이 같은 그 말에, 내가 힘을 얻었었다는 걸 그 아이는 알았을까.
어쩌면 그걸 윤혜안에게 물어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였는지 그 아이도 알고 있었냐고, 내 마음이 너무 부족하게 전해졌던 건 아니었냐고. 더 많이, 더 오래, 함께 사랑하고 싶었다는 걸 그 아이도 알고 있냐고... 답답한 마음에 무속인을 찾아가 죽은 이와 접신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윤혜안에게 그것을 물어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해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강 실장의 글씨체로 윤혜안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책상 앞에 선 채로 핸드폰을 꺼내 열한 자리의 숫자를 눌러 나갔다.
선물은 잘 받았다, 고맙다... 그런 인사를 하려는 건 분명 아니었다. 스트라이프 넥타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카드에 적힌 글귀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 아이의 글씨체를 일부러 흉내 낸 건지... 이제 그딴 것을 추궁하는 것도 더는 의미가 없었다. 윤혜안은 더 이상 ‘알고 있다’는 자체를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으니까.
신호가 채 열 번을 울리기 전에 이해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건지, 스스로 한 짓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핸드폰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도망치듯 창가로 걸어갔다. 굳게 닫혀 있는 블라인드의 살과 살 사이를 손가락으로 벌려 그 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윤혜안이 전화를 받았다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외면하려 애쓰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다.
여보세요, 납니다, 누구세요?, 이해성입니다... 따위의 말이 오갔겠지. 아니, 어쩌면 이 번호까지 이미 알고 있을지도.
‘강 실장 통해서 전해준 선물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윤혜안이 무엇이라고 대답하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 이쪽으로 와줄 수 있습니까.’
무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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