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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90)화 (90/185)

90화

 “하여튼 혜안이 형도 기적처럼 깨어나고, 동하 너도 자리 잡아서 이렇게 잘되고. 거기다 둘이 강우현 감독님 영화에 나란히 출연까지 하고... 나는 요즘 걱정이 없어.”

 둥근 식탁 앞에 모여 앉아 건배를 하고는 용재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최홍서와 박동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 같이 ‘티탄’이었을 때 이렇게 잘됐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가늘고 길게 찢어진 용재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핑 고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뒷말을 이었다.

 “그러면 동하 너도 회사 나가서 고생 덜했을 거고... 아버님 일도 더 잘 처리됐을 거고...”

 박동하가 나서서 눈물을 훔치는 용재의 두껍고 넓은 어깨를 감싸 위로했다.

 “그걸 형이 왜 미안해해? 하여튼 우리 용재 형 마음 약한 건 알아줘야 돼. 어디 가서 사기당하는 거 아닌지 내가 맨날 걱정이라니까?”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밝게 얘기하는 목소리에서는 애정이 묻어났다. 윤혜안을 대하는 태도는 알쏭달쏭해도 적어도 박동하가 용재에게 하는 말들은 진심인 것 같았다.

 “용재 형, 와인 한 모금 마시고 벌써 취한 거야? 아, 우리 와인은 다음에 마시고 소주 까자, 소주!”

 손님이 선물로 가지고 왔으니 예의로 내놓았던 와인 대신 박동하는 얼른 일어나 소주와 잔을 챙겨왔다. 그사이 눈물을 찍어낸 용재가 소주를 받으면서 빨개진 코로 얘기했다.

 “내가 처음으로 맡았던 팀이었잖아, ‘티탄’이. 진짜 잘 되는 모습 보고 싶었거든. 근데 형이랑 너 빼고는 이제 아예 연예계를 떠났으니까...”

 최홍서가 속해 있던 ‘레이어드’처럼 ‘티탄’ 역시 수많은 아이돌 그룹 사이에서 특별히 눈에 띄지 못한 채 몇 년을 고생했었다. 그러다 윤혜안이 배우로 활동하면서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티탄’은 한동안 윤혜안만 잘나가는 그룹이었다.

 멤버 한 명부터 알리기 시작해 점차 팀 전체의 인기를 끌어내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아이돌 그룹의 전략 중 하나였다. 다만, ‘티탄’은 윤혜안이 팀을 탈퇴해 버리면서 팀 전체의 인기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어진 것이었다.

 박동하나 다른 멤버들이 그 일로 윤혜안을 원망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해가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

 문제는 지금 박동하의 눈앞에 있는 윤혜안은 그 윤혜안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소주 한 잔을 말끔히 비워낸 박동하가 빨간 어묵탕 국물을 떠먹으며 덤덤히 말했다.

 “우리 한참 못 뜨고 고생하면서 지방에 마트 행사까지 다니고 그랬던 거나, 숙소에서 일주일 식비 10만 원으로 버티느라 개고생했던 거...”

 “......”

 “그러다 조금은 기회가 왔던 것도... 그래, 그 기회가 왔던 것도 다 형 덕이긴 했지만.”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피식 씁쓸히 웃고 나서는 식탁에 팔꿈치를 기댄 채 최홍서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형은 그런 거 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거지?”

 “내가 어땠는지, ‘티탄’이 어땠는지...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는 했어. 기억은 안 나지만.”

 최홍서를, 아니 윤혜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박동하는 스스로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도 찾아보기는 했구나...”

 대체로 호전적이었던 태도와 달리 지금의 박동하에게서는 약간의 체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단단하게 무장하고 ‘윤혜안’의 동태를 살피는 것 같았던 여태까지의 분위기와는 확실히 조금 달랐다.

 자리를 피해줄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지, 박동하와 최홍서의 눈치를 살핀 용재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로미오 이 녀석은 어디 있어? 티파니도 그렇고, 로미오도 그렇고, 우리 멤버들이 키우는 고양이들은 다 왜 이렇게 사회성이 없는 거야?”

 “우리 로미오는 안 그렇거든? 들어가 봐. 옷방에 숨어있을 거야, 아마.”

 “지난번 집에 살 때는 몇 번 봤는데, 나 기억하려나?”

 로미오야, 로미오? 쭈쭈쭈쭈.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며 복도 쪽으로 사라지는 용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최홍서가 먼저 물어보았다.

 “고양이가 있어?”

 단순한 질문이었는데, 박동하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나며 ‘윤혜안’을 향했다. 그러나 찰나일 뿐이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윤혜안의 말을 여전히 의심 중인지도 몰랐다.

 “형이 티파니 키우기 시작하고 나서 좀 더 후에 데려왔어.”

 좀처럼 술잔을 비우지 않는 최홍서에게 건배를 제안하면서, 박동하는 술잔을 내밀었다. 잔을 부딪치고 난 후에는 단번에 술잔을 꺾어버렸다.

 “본가에서도 강아지를 오래 키워서 난 원래 고양이보다는 강아지파였는데, 우리 로미오를 키워보니까 고양이도 너무 매력 있더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냄비에서 어묵꼬치를 덜어내는 박동하의 얼굴은 자신의 고양이를 자랑하며 행복해하는 평범한 고양이 집사의 그것이었다.

 박동하는 젓가락을 이용해 꼬치에서 어묵을 빼내면서 말을 이어갔다.

 “나야 워낙 동물 자체를 좋아했지만.”

 “......”

 “형은 원래 동물을 안 좋아했어.”

 지나가듯 하는 말 같았지만, 최홍서의 의문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럼 난 왜 티파니를 키우기 시작했던 거야?”

 박동하에게 물어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어쩌면 티파니를 키우게 된 동기에 거창한 진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윤혜안이 티파니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귀여운 인형 정도로 여기며 별생각 없이 반려동물을 들이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어묵을 빼낸 꼬치를 내려놓은 박동하가 최홍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글쎄? 형은 워낙 충동적이고 변덕이 심했으니까.”

 용재에게 슬쩍 물어본 바에 의하면, 팀 해체 후에도 박동하와 윤혜안이 자주 연락하며 가깝게 지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박동하가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을 정도로 윤혜안의 인간관계는 빈약했던 것이다. 윤혜안이 갑자기 고양이를 왜 키웠는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는지, 박동하도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것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박동하는 다시 잔을 채우고 또 비워냈다. 마시는 속도가 꽤 빨랐다. 말하기 어려운 얘기를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꺼내 보려는 사람처럼 뜸을 들이던 끝에 박동하는 입을 열었다.

 “형 생일날,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식탁 위 어딘가를 내려다보는 박동하의 눈이 술기운에 촉촉이 젖어있었다.

 “그래, 재원이 형 패거리야 원래 저질이긴 한데, 형하고 잘 놀던 사람들인 것도 사실이야. 재원이 형이 맨날 그런 식으로 해도 형도 거기에 같이 어울리면서 놀았지 그런 수작질에 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점점 고조되어 가던 박동하의 목소리는 마지막에는 괴롭게 들리기까지 했다. 찌푸린 얼굴은 의도치 않은 잘못을 저질러놓고 괴로워하는 아이 같았다.

 재원이 형이란 그날 파티에서 ‘윤혜안’을 붙잡고 늘어졌던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다.

 소주를 또 한잔 벌컥 들이켠 박동하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냈다.

 “거기서 형이 그렇게 당황하고 발버둥 칠 줄은... 정말 예상 못 했어.”

 “그래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걸 시험해 보려고 그날 그 사람들을 불렀어?”

 박동하는 얼굴을 번쩍 쳐들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

 “그건 진짜 아니야!... 믿어 줘.”

 그날, 이해성은 당장이라도 ‘재원’이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덤벼들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등을 억지로 떠밀며 자리를 벗어날 때 보았던 박동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충격받아 굳은 얼굴은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믿어 줄 테니까, 대신 이제 너도 믿어 줘.”

 “......”

 “내가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는 거.”

 박동하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윤혜안’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하고 빈틈을 찾아내려 하는 그런 얼굴도 아니었다.

 물론 박동하의 모든 것이 연기일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하는 건 ‘윤혜안’도, 박동하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관계가 개선될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었다. 앞으로도 계속, 어쩌면 한동안, 어쨌든 윤혜안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이전의 윤혜안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도도도도도.

 침묵을 깨고 대리석 위를 달려오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쪽을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흰색과 갈색, 검은색 털이 섞인 얼룩 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호기심이 넘치는 눈으로 낯선 방문객인 최홍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꼬리를 세운 채 천천히 최홍서에게 다가왔다.

 앉아있는 다리 주변을 잠시 맴돌던 녀석은 안아도 좋다는 듯, 혹은 안아 올리라는 듯 최홍서를 올려다보며 야옹, 작게 울었다. 최홍서는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쓰다듬었다. 아직 티파니와도 이렇게 해본 적이 없어서 감격스럽기도 하고, 괜히 티파니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정작 티파니는 로미오에게 질투하지도 않을 텐데...

 “이 녀석은 형을 잘 따르네요. 티파니는 요새도 형한테 매정해요?”

 “아니야, 요즘은 많이 안 그래.”

 “형이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모시는데 그 녀석 괜히 콧대 높은 척한다니까요?”

 말없이 최홍서와 고양이를 번갈아 쳐다보던 박동하는 술이나 더 마시자며, 용재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혼자서 거의 소주 세 병 정도를 비운 박동하는 꽤 많이 취했다. 자리가 파할 무렵에는 두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 누가 봐도 취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로미오를 껴안은 박동하는 녀석의 앞발을 흔들면서 용재와 최홍서를 배웅했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최홍서는 이해성의 이름부터 검색했다. 그사이 새로운 뉴스나 사진이 뜬 게 없는지 궁금했다.

 강 실장을 통해 건넨 넥타이를 받아보고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에만 사로잡혀 내내 끙끙거릴 것 같아서 박동하의 집에서 술을 마시자는 용재의 제안에 응했던 건데, 아무 소용도 없었다.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서 최홍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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