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통역사가 먼저 가보겠다며 일어난 뒤에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 가방을 멘 뒤에도, 최홍서는 좀처럼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고작 넥타이 하나의 무게가 바윗덩이처럼 느껴져 입안이 마르고 진땀이 날 정도였다.
통역사를 배웅하고 거실로 돌아온 강 실장의 무표정을 마주하자, 이번에는 죄지은 사람처럼 속이 뜨끔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용기가 사그라졌다.
이해성의 지시 때문인지, 최홍서였던 과거에는 그래도 강 실장이 많이 편하게 대해줬었다. 표정과 말투도 부드럽게 바꿔줬고, 어색하게나마 자주 웃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강 실장은 다시 처음 만났던 무렵처럼 어렵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성큼성큼 다가와 사천왕 같은 무서운 얼굴로 ‘이 쥐새끼 같은 놈. 부사장님 옆에 알짱거리는 목적이 뭐지?’라며 눈을 부라릴 것 같았다.
쇼핑백 끈을 손끝으로 배배 꼬고 있던 최홍서는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집도 바로 근처라서요.”
“부사장님께서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부사장님이요...?”
계열 분리라는 사건은 최홍서에겐 너무나 복잡해 보이는 일이었다. 자세히 설명된 뉴스를 열심히 읽어봐도 반 정도는 이해가 안 됐다. 모든 뉴스가 두 그룹에게, 특히 분리되어 나오는 ARA 그룹에게는 역사적인 화수분이 될 것이라고 흥분해 떠들어 댔다. 그런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고도 고작 윤혜안의 귀가에까지 신경을 써준 그를 떠올리자, 쇼핑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그에게는 단순한 예의 바름, 그저 의무감일지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가 관심 있는 대상도 ‘윤혜안’에게서 보이는 ‘최홍서’일 뿐, ‘윤혜안’이라는 사람에게 딱히 친절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최홍서는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더더욱 그에게 이것을 전해야 했다. 나는 윤혜안이 아닌 최홍서고, 그의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럼, 죄송하지만 이것만 좀 부사장님께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강 실장의 투박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손이 진한 자주색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어떻게 말씀 전해드리면 될까요?”
비어버린 최홍서의 두 손이 이번에는 가방끈을 꽉 붙들었다.
“별 건 아닌데,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서요. 저번에 부사장님이 생일 선물도 주셨고, 또...”
“......”
“너무... 말썽만 피워서... 죄송하다고...”
콧속이 맵게 울려 말끝이 흐려졌다. 그렇지 않아도 강 실장을 마주 보지 못하고 쇼핑백 부근을 헤매던 시선이 결국 그의 발치로 떨어졌다.
“알겠습니다. 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 실장의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객실을 빠져나왔다.
뭔가 사 갈 만한 것이 없을지 호텔 로비 층을 둘러보다가 와인을 몇 병 사서 택시에 올라탔다. 버킷햇의 챙을 연신 끌어내리며, 차창 밖 화려한 도시의 밤 풍경에 의식을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겉과 속이 서로 짝이 맞지 않는 이 상황이 때로는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억울하고, 막막하도록 무서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있기에 버텨나가고 있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미움을 받든, 의심을 받든, 어쨌든 그의 관심 속에 있다. 그것에 정신이 팔려, 다른 사람의 몸으로 되살아났다는 충격은 어떻게든 쇄신되고 있었다.
그러니 미쳐버리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는 건 이해성 덕분이었다. 그는 미워하는 것으로조차 자신을 구원하고 있었다.
“아니, 이 시간에 올림픽대로가 왜 이리 밀려? 손님, 올림픽대로 탔다가는 40분 걸릴 것 같은데요. 논현역에서 학동로로 꺾어 들어갑니다?”
운전기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최홍서의 모자챙 아래로 눈물이 주욱 그어졌다. 그것이 무릎 위로 채 떨어지기도 전에 최홍서의 손이 차갑게 그것을 닦아내 버렸다.
■
봉은사 부근에 위치한 박동하의 집은 외관부터 근사한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윤혜안이 살던 대기업 브랜드의 논현동 오피스텔보다 규모는 더 작은 대신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로비에서 방문객 접수를 한 뒤에야 엘리베이터 홀로 이동할 수 있을 만큼 보안도 철저했다. 현관 벨을 누르자, 먼저 도착해 있었던 용재가 집주인 대신 문을 열어주었다.
“빈손으로 오시라니까 뭘 또 이렇게 사 오셨어요?”
며칠 전에 봤음에도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반가워하는 용재의 환영에 최홍서는 미지근하게나마 웃으면서 실내로 들어섰다.
“와인은 잘 몰라서 추천받는 대로 사 왔는데 어떨지 모르겠어.”
차가운 인상마저 풍기는 생활감 없는 인테리어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다양한 음식 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왔다.
“냄새 좋죠? 동하가 요리 잘하잖아요. 안주 몇 개 만드는 중이에요.”
“와인? 윤혜안이 우리 집 오는데 와인을 사 왔다고?”
와인 꾸러미를 받아 든 용재의 뒤를 따라 하얀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걷고 있자니, 박동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끝에서 나타난 세로로 긴 주방에서 박동하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왔어? 금방 다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팔팔 끓고 있는 어묵탕의 빨간 국물을 맛보던 박동하는 평소보다는 조금은 풀이 죽은 얼굴로 최홍서에게 알은체를 했다.
“냄새가 좋네. 집도 멋있고.”
용재가 전화로 했던 말처럼, 최홍서는 지난 시나리오 스터디 모임에서 박동하와 전혀 말을 섞지 않았었다. 말을 붙여오는데도 무시했던 건 아니다. 박동하를 대하기가 껄끄러워서 시간 딱 맞춰 도착했다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그 집을 나왔던 것이다.
생일 파티가 있었던 날도 이해성과 함께 있었던 휴게실을 나온 후, 강 감독의 테이블에만 앉아있다가 일찍 클럽을 나와버렸었다. 그런 자리를 만든 박동하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말을 해봐야 좋은 소리가 나갈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만큼 지금은 감정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박동하라는 인물을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그쵸, 형? 집이 너무 멋있죠? 저도 처음 와봤는데, 딱 드라마 실장님들이 사는 집 같지 않아요?”
집주인보다 더 들떠 보이는 용재에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최홍서는 소파에 앉아있는 대신 작은 거실을 둘러보기로 했다.
삭막할 정도로 모노톤 일색인 공간은 약간 거드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그 집을 채우고 있는 가구나 소품들은 어느 가정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물건들이었다.
최홍서는 저렴한 조립식 선반 위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팬들이 선물해 준 그림이나 박동하를 본뜬 피규어, 그 옆쪽에 가족사진으로 보이는 액자가 몇 장 자리하고 있었다.
전원주택 마당에서 네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박동하의 품에는 강아지도 한 마리 안겨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형? 어? 이거... 동하야, 여기가 새로 산 집이구나?”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용재가 최홍서의 어깨너머로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등 뒤의 박동하를 향해 물었다. 종종 썬 대파를 어묵탕 안에 쓸어 넣던 박동하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아, 그 사진? 어, 거기가 그 집이야.”
“아버님도 건강해 보이신다. 이젠 많이 좋아지신 거지?”
용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전부 최홍서는 모르는 얘기들이었다. 궁금해하는 최홍서의 표정을 흘깃 살핀 박동하가 어묵탕을 식탁 위에 옮겨놓으며 덤덤히 말했다.
“형은 기억 못 하겠구나. 우리 아빠 많이 아팠어, 사고 때문에.”
하시던 일이 잘 안되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이삿짐센터 인부로 일하게 되셨는데 허리를 크게 다치셨다고 용재가 덧붙여 설명했다.
“힘도 써본 사람이 쓰는 건데, 우리 아빤 요령이 없었으니까. 원래도 허리가 안 좋았고.”
회사에서는 원래 허리가 안 좋았던 사람이니 산업재해 처리를 해줄 수 없다며 한 달 치 월급을 주는 것으로 손을 떼버렸다고 했다.
“당장 큰 수술을 해야 하는데, 우리 집 형편에 그런 돈이 어디 있겠어. 연예인은 대출할 땐 불리한 직업이잖아. 인기도 없는 놈이니 여기저기서 다 거절당했지. 거기다 팀이 흐지부지 해체되기까지 해서... 그때는 진짜...”
박동하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일 텐데도 그새 눈시울이 붉어진 용재가 애써 힘찬 어투로 박동하를 위로했다.
“에이, 그런 옛날 얘긴 뭐하러 해? 지금은 이렇게 배우로 자리도 잡고, 부모님께 집도 해드리고, 아무 걱정 없잖아! 지금이 중요한 거지!”
“집이라고 해도 서울도 아니고 그나마도 대출이 반인데, 뭐.”
“대출이 꼈든 뭐든, 네 나이에 부모님한테 그렇게 해드릴 수 있는 게 쉬워? 장해. 대단해, 박동하.”
“그래. 그건 충분히 대단한 일이잖아.”
잠자코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있던 최홍서가 조심스럽게 감상을 보탰다. 용재와 박동하의 시선이 동시에 최홍서를 향했다. 박동하는 물론이고 용재마저도, 혹시나 비꼬는 말인 것은 아닌지 유심히 살피는 표정이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과거의 윤혜안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뭐... 윤혜안이 대단하다고 하는 거 보니까 내가 진짜 대단한 일 한 것 같기는 하네.”
코를 찡긋거리며 그렇게 얘기하는 박동하는 다행히 좀 전의 얘기를 비꼼으로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앉아. 앉아서 먹으면서 얘기하자.”
“언제 그 말 나오나 했어. 아까부터 냄새 때문에 죽는 줄 알았다. 형, 빨리 와요.”
술상이 거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 얼른 자리를 잡으면서 용재가 최홍서에게도 손짓을 했다.
식탁 쪽으로 다가가면서 최홍서는 집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대출을 포함해 마련한 경기도의 아담한 전원주택, 저렴한 조립식 가구 위에 진열해놓은 소박한 소품들. 그리고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강남의 고급 오피스텔, 그것들은 어딘가 서로 어울리지가 않았다.
가족을 위해 대출을 받아 경기도에 자그마한 전원주택을 마련한 사람이 굳이 몇백만 원의 월세를 지불하면서 이런 오피스텔에 산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