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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88)화 (88/185)
  • 88화

     지난번에는 한서 그룹 계열인 녹스 호텔이었는데, 이번에는 최홍서의 집에서 가까운 H 호텔로 상담 장소가 바뀌었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아마도 그의 배려일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최홍서는 벙거지를 푹 눌러쓰고 호텔로 향했다.

     긴장으로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몇 번이나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셌는데, 막상 문을 열고 최홍서를 맞아준 것은 이해성이 아닌 강 실장이었다.

     “어... 어. 안녕하세요.”

     지난번처럼 이해성이 나올 거라 생각했던 최홍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상담 시간까지 여유가 있으니 조금 쉬고 계시죠.”

     강 실장의 안내에 거실로 들어가 쭈뼛거리며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인지, 통역사의 모습도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음료는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물이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수행원 없이 혼자 온 건지, 강 실장은 직접 미니바에서 생수와 잔을 챙겨왔다. 나이도 더 많은 분이 응대해 주시는 것이 편하지가 않아서, 최홍서는 엉거주춤 일어나 어쩔 줄 몰라 하며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용기를 내어 물었다.

     “감사합니다. 저기 그런데... 부사장님은요?”

     “부사장님께서는 중요한 업무가 있으셔서 오늘 제가 대신 모시게 됐습니다.”

     “아, 네...”

     강 실장을 올려다보고 있던 최홍서의 시선이 저절로 주욱 미끄러졌다.

     그렇겠지. 왜 생각 못 했을까. 모레 그렇게 중요한 일정이 있는데 오늘 여기서 ‘윤혜안’이 상담하는 동안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는 없겠지.

     사실 지난번 강우현 감독 자택에서의 스터디 모임에서도 그를 볼 수 없었다. 되도록 얼굴을 내민다고 했을 뿐 매번 반드시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한 건 아니었지만, ARA 이해성과 좀 더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다들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물론 실망한 것은 최홍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더 오늘을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곳에도 그가 반드시 동석한다는 약속은 없었는데. 왜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가 여기엔 꼭 올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 실망을 넘어 부끄러웠다.

     귓가가 달아오르는 느낌에 손으로 괜히 귀 위를 쓸면서, 최홍서는 옆자리에 내려놓았던 쇼핑백을 슬그머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뭔가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의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마침 걸려 온 전화가 구세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핸드폰을 쥐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책상 쪽에서 뭔가를 훑어보고 있던 강 실장이 뒤를 돌아봤다.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전화기를 귀에 대며 화장실로 향했다.

     “어, 용재야.”

     [형, 어디세요?]

     입구의 게스트용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여기... 그냥 동네.”

     거짓말은 아니었다.

     [쇼핑은 다녀오셨어요?]

     “어.”

     [백화점 가실 때도 모셔다드린다니까 형 자꾸 거절하시고... 계속 그러시면 제가 너무 일이 없어요. 앞으로는 저 자주 데리고 다니세요. 아셨죠?]

     “진짜 가까운 거리여서 그랬어. 앞으로는 자주 부탁할게.”

     [몸도 안 좋잖아요. 조금만 연락 안 되면 형 또 어디서 쓰러지신 거 아닌가 겁부터 난다니까요.]

     어쩐지 주변 사람들에게 걸핏하면 픽픽 쓰러지는 약골처럼 인식된 것 같아서 최홍서는 조금 억울했다. 정말 쓰러진 건 두 번뿐이었는데.

     “이젠 안 그런다니까.”

     [또 근거 없이 그러신다. 검사해도 원인을 모른다는데 또 그럴지 안 그럴지 어떻게 알아요.]

     검사를 해도 알 수 없는 그 원인을 아마도 나는 짐작하고 있으니까. 최홍서의 기억과 깊이 얽혀 있는 장소에서 최홍서였던 당시의 감정을 강하게 떠올리지만 않으면, 아마도 쓰러지는 일까지는 막을 수 있을 거라는 게 지금 최홍서의 생각이었다. 맞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근데, 전화 왜 한 거야? 지금 오래 통화하기는 좀 그래서.”

     [아, 내 정신 좀 봐. 동하네 집에서 한잔하러 가는데 형도 오시라구요. 내일도 스케줄 없으시잖아요.]

     “......”

     가겠다고 흔쾌히 대답하지 않는 최홍서의 침묵에 건너편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혹시... 동하랑 싸우셨어요?]

     “왜.”

     [생일 파티 때도 분위기 좀 그랬고, 형 지난번 스터디 모임 때도 동하랑 눈도 안 마주치셨다면서요.]

     “그래서 나랑 싸웠다고, 걔가 그래?”

     [형이랑 싸웠다고 대놓고 말은 안 하는데요... 형이랑 화해는 하고 싶고, 자기가 직접 형한테 말할 용기는 안 나니까 저한테 대신 찔러 보라고 하는 느낌이라서요.]

     용재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다. 박동하는 ‘윤혜안’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의심하지만, 박동하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상담 후에 곧바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최홍서였다면, 이런 날은 정지인이나 송현수에게 연락해 밖에서, 혹은 숙소에서 소주 한잔 마실 수 있었겠지. 그러나 지금 ‘윤혜안’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용재와 박동하, 두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한 시간 뒤에 출발할게. 주소 보내줘.”

     지난번과 달리 한 시간의 상담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그가 비싼 진료비를 치르고 있다는 걸 알기에 성의 있게 임하기는 했지만, 문 너머 거실에 그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재미가 없었다.

     <크림 맨션> 오디션에 응시할 때만 해도, 그저 투자자인 그를 가끔이나마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는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시간마저도 감사했다. 오늘은 만나지 못했지만, 상담을 할 때도, 시나리오 스터디 모임 때도, 한 달에 몇 번씩이나 그를 볼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상담을 마치고 거실로 나가 보니, 강 실장이 통역사와 최홍서를 위해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두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사장님은 추후 박사님과 따로 얘기 나누실 겁니다.”

     “네.”

     상담 전에 그에 대해 질문한 것 때문에 강 실장이 신경 써서 얘기해 주는 것 같아서, 최홍서는 다시금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는 미국인 통역사분과 함께 차와 마카롱이 준비된 둥근 테이블 앞에 앉았다.

     ‘홍서 씨의 연애 대상에는 남자도 포함될까요?’

     최홍서였던 과거에 이해성으로부터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는 선언을 들었던 날. 그날 그는 최홍서를 위해 마카롱을 준비해 두었었다.

     영화 식사 모임 자리에서는 거의 얘기할 기회도 없었던 그가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분명 최홍서는 기대감을 느꼈다.

     그가 잠자리를 갖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동시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싹트고 있었다.

     회상에 잠긴 최홍서는 예쁜 접시 위의 알록달록한 마카롱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들은 어린아이처럼.

     “혹시 마카롱 안 좋아해요?”

     함께 간식을 대접받은 통역사가 강 실장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소곤거리며 물어왔다. 최홍서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좋아해요.”

     “혜안은 배우니까, 이런 시간에 단 음식을 먹는 게 죄책감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좀 그렇긴 해요. 거기다 전 먹으면 찌는 체질이라서요.”

     아... 이젠 그렇지도 않은가?

     습관적으로 최홍서의 체질을 얘기했지만, 박동하의 말에 의하면 윤혜안은 먹어도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하지만 최홍서는 박동하의 말이 사실인지 실험해 보지는 않았다. 그럴 용기가 없었다. 체질 덕분에 살이 찌지는 않더라도 무절제한 식생활을 해서는 예쁜 몸매를 가질 수 없었고, 피부에도 영향이 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날씬하니까 한두 개는 괜찮지 않아요? 너무 맛있는데.”

     그녀의 말에 최홍서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랐는데. 오히려 조금 쪄야 하지 않아요?’

     마카롱에 선뜻 손을 대지 못하는 최홍서의 손목을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이해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으니까.

     여러 색의 마카롱 중에서 녹차 맛으로 보이는 초록색을 골랐다. 그날, 이해성이 먹었던 것과 같은 색이었다. 착각인지 몰라도, 그날 먹었던 마카롱과 식감도 맛도 똑같은 것 같았다.

     차를 아무리 함께 마셔도 목이 메었다. 어쩌면 오늘 이곳에 없는 그가 ‘최홍서’를 위해 마련해둔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윤혜안’이 ‘최홍서’를 연기해 주기를 바라게 된 것일까?

     지난번 상담 후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최홍서는 그에게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특히 담배 얘기를 꺼냈을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당황했었다. 최홍서를 대하듯 얘기하는 그의 어조에, 아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감정이 크게 휘청거렸었다.

     더 이상 이전처럼 ‘윤혜안’의 반응을 시험하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최홍서와의 사이에 있었던 장면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윤혜안’이라는 존재는 이미 관심 밖이고, ‘윤혜안’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오직 ‘최홍서’를 연기해 주는 것뿐이라고.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넥타이도 준비했던 건데...

     물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추측일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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