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부사장님이 비흡연자시라고... 어디에서 본 것 같아서요.”
헛웃음으로 이해성의 어깨가 떨렸다. 고개를 숙이며 짧게 한숨을 쉬고, 담배를 손가락에 건 채 뒷목을 주물렀다.
“어디에서 본 것 같다...”
이해성은 윤혜안의 말을 입안에서 곱씹었다.
위키에까지 기록돼 있지는 않아도, 자신의 흡연 내력은 아는 사람만 아는 감춰진 얘기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의도와 달리 ‘재벌 3세 모범생’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금연에까지 성공한 모범생으로 간혹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모범생 이해성이 비흡연자라는 사실을 윤혜안이 알게 된 계기는 어딘가에서 ‘우연히’ 봤기 때문이 아닐 것 같았다. 최홍서와 둘만이 나누었던 대화 내용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흡연 여부를 좀 안다고 해서 그게 대수인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이해성은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윤혜안을 빤히 보았다.
“그래요? 나는 윤혜안 씨가 굉장한 헤비 스모커라고 들었는데.”
“......”
“기억을 잃은 후에는 담배도 안 피우나 봐요.”
최홍서처럼.
그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윤혜안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강변북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차창 너머에서는 서울의 야경이 한강 위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면서 이해성은 생각했다.
대체 윤혜안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지금 가장 궁금한 건 아마도 그것일지 모르겠다. 윤혜안이 스스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최홍서와 자신의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최홍서를 흉내 내고 있는지... 그런 것들보다도 지금 당장 가장 궁금한 건 그것인 듯했다.
“어렵게 끊긴 했었죠.”
차창 밖에 그대로 시선을 준 채 이해성은 충동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니 먼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서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그런 후에야 이혼을 제대로 마무리했는데. 그 무렵에 끊었어요.”
최홍서에게 해주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이어가는 이해성의 목소리는 바싹 갈라져 있었다. 어쩌면, 아마도 높은 확률로, 윤혜안이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는 이야기를...
힘겹게 마른침을 삼킨 그는 목구멍을 조이면서 말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피웠던 거라 끊기가 쉽지 않았죠.”
“......”
“모범적인 후계자의 거의 유일한 일탈이었지.”
이번만큼은 윤혜안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저,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한번 그 순간을 경험하고 싶었고, 그 순간 속에 몰입하고 싶었다. 역할 놀이를 하듯, 당시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꿈을 꾸고 싶었다.
이번만큼은 윤혜안이 들려주기를 바랐다.
‘잘하셨어요. 담배, 건강에 안 좋잖아요.’
그때, 그 아이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그 말을.
그러나 옆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윤혜안은 그 아이가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똑같이 흉내 냈었다. 이미 여러 번 했으면서, 왜 이번에는 하지 않는 건가. 두 번이든 세 번이든,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해성은 피우지 않은 채로 재만 길어진 담배를 재떨이 위에서 톡톡 두드렸다. 어쩐지 초조함이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침묵하는 윤혜안은 턱이 쇄골에 닿을 만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귀와 목, 얼굴이 온통 붉었다. 수줍음이나 부끄러움에 붉어진 것과는 달랐다. 그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려 애쓰고 있었다. 볼이 씰룩거리고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찔거렸다.
이해성의 시선이 좀 더 아래를 향했다. 바지의 허벅지 부근을 꽉 움켜쥔 윤혜안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이런 행동마저도 전부 계산된 것으로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할 사람 같지가 않았다. 뭘 얼마나 안다고... 아니면, 홍서를 계속 흉내 내니까, 이젠 홍서와 겹쳐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어?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내면서 이해성은 짧아진 담배의 필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자동차가 강변 북로를 벗어나 한남대로에 접어들 무렵이 되어서야, 윤혜안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어렵게 끊으셨는데, 왜... 다시 피우세요.”
“......”
“건강에 안 좋은데.”
이미 담배도 꺼버리고,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던 이해성은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의 붉은 기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윤혜안은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왜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됐는지, 윤혜안 씨는 그것도 다 알 것 같은데.”
“......”
“아니에요?”
“......”
“아, 그럼 또 증거 얘기를 하려나?”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던 윤혜안이 창밖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이쪽에서는 뺨의 일부분밖에는 보이지가 않았다.
이해성은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몸이 돌려진 상대는 놀라고 의아한 표정으로 이해성을 쳐다보았다.
놀라고 당황하기는 이해성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돌린 채 울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마자 손이 먼저 뻗어 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돌아본 윤혜안은 울고 있지 않았다.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울고 있지는 않았다.
이해성의 시선이 여기저기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어깨를 강하게 붙잡고 있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윤혜안의 눈빛이 갑작스러운 행동의 이유를 묻고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네가 울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윤혜안의 어깨에서 어색하게 거두어진 이해성의 손이 더듬거리며 다시 담뱃갑을 찾았다. 마치 핑계를 찾듯이.
“호텔 앞에서... 거기에서 어느 쪽으로 가면 되죠? 경리단길 쪽으로 내려가면 되나?”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손안에서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사이, 윤혜안이 제법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호텔 근처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집 앞까지 타고 가죠, 왜.”
“이 근처면 돼요. 다 왔어요.”
창밖을 확인하니 어느새 왼편으로 H 호텔 건물이 올려다보였다. 사는 곳마저도 이전에 최홍서의 숙소가 있었던 곳과 같은 동네였다.
이 근처에서 내려 함께 소월로를 산책했었고, 숙소까지 데려다줬었다. 최홍서가 어디에 사는지를 미리 조사해, 지도를 보고 경로를 숙지해 뒀었다. 스토커 같은 짓이기는 했지만, 매끄럽게 에스코트하고 싶었으니까.
윤혜안은 그 동네에 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릴 것처럼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가방을 만지작거리는 윤혜안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꾸만 뭔가를 불편하게 했다.
“저... 삼거리에서 직진하신 뒤에 횡단보도에 바로 세워주시면...”
“집이 어딘지 알려주기 싫어서 그래요?”
조수석 시트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운전석의 수행원에게 길을 설명하는 윤혜안의 말을 가로막았다.
“윤혜안 씨 자택 위치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 안 합니까?”
“그러면 개인 정보 침해잖아요.”
“......”
눈치를 살피면서도, 불퉁한 얼굴로 불만을 얘기한다. 생각지 못한 순간의 그런 당돌함마저도 그 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울진 않을 건데, 화는 낼 수도 있어요.’
‘귀여운 표정 안 했어요.’
정말 화가 나서가 아니라, 쑥스러워서 딱딱해지는 최홍서 특유의 말투가 이해성을 행복하게 했었다.
“그렇게 말하는 법은 어디서 배웠어요?”
못된 말을 배워온 아이를 혼내기라도 하는 것 같은 어투였다. 윤혜안은 입술을 꾹 다물고 이해성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 했다. 이런 고집을 부리는 모습조차도 그 아이를 연상하게 했다.
“부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신호가 바뀌자 운전석의 수행원이 곤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해성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윤혜안이 나서서 정면의 횡단보도를 가리켰다.
“저기에, 아까 말씀드린 자리에 세워 주세요! 정말 거기면 돼요!”
이해성이 별도의 다른 지시를 하지 않자, 수행원은 그곳에 차를 세웠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가방을 아랫배에 꽉 끌어안고 고개까지 꾸벅 숙이며 인사한 윤혜안은 도망치듯 차에서 내렸다.
한남동으로 가든 서초동으로 가든, 더 앞쪽으로 내려가 유턴을 해야만 했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윤혜안을 뒤로하고 자동차는 천천히 직진하기 시작했다.
이해성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생각에 잠겨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신호에서 나도 내려줘요. 좀 걸어야겠어.”
“알겠습니다.”
정차한 차에서 이해성이 내리자마자, 수행원이 곧바로 뒤따라내렸다. 뒷좌석에서 이해성의 재킷을 꺼낸 수행원이 재빨리 뒤를 따라왔다.
“부사장님, 기온이 많이 낮습니다. 겉옷을 걸치시는 게...”
“잠깐 담배 한 대만 피울 거니까.”
겉옷을 사양하고 그를 돌려보낸 이해성은 횡단보도를 건너 난간 앞에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