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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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기온이 제법 쌀쌀했다.
여름과 가을 내내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호텔 레스토랑의 야외 테이블들은 거의 비어있었다. 한 사람은 무릎 담요를 덮고, 한 사람은 담요를 어깨에 두른 두 여성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지 자신들의 대화에 집중해 있을 뿐, 다른 고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해성은 조명을 밝힌 수영장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서 더 아래쪽의 정원으로 내려갔다.
높은 지대에 지어진 호텔이라, 정원에서도 서울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물 위에 비쳐 흔들리는 불빛처럼, 야경은 아름다웠다.
도시의 야경은 인공의 산물임에도 자연의 풍경처럼 감동을 주는 면이 있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온갖 욕망과 탐욕이 뒤엉켜 있음에도, 먼 거리에서 그저 빛으로만 존재하는 도시는 낭만과 희망을 품은 이상의 별처럼 보였다.
이해성은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그러한 도시를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단 한 사람이 사라짐으로 인해 도시 전체는 매력과 생명력을 상실했다. 이해성에게는 그랬다.
그 아이를 품은 불빛이 어딘가에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단지 작은 불빛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감탄하며 바라보아도, 이해성을 감동시킬 수는 없었다.
이해성에게 도시는 암전 중이었다.
문득 뒤를 돌았다.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선 호텔 건물이 올려다보였다.
예약해둔 스위트룸의 객실에서는 윤혜안이 뉴욕의 의사와 상담 중이었다.
윤혜안은 통역사와 함께 침실에서 상담을 진행 중이라 거실에서 대기하려 했으나, 어쩐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객실을 빠져나와 배회 중이었다.
이곳은 밤 9시가 지났고, 뉴욕은 오전 9시 이전이었다. 상담을 진행하기엔 알맞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진료와 연구를 활발히 진행 중인 유명 의사인 탓에 스케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상담이라고는 해도 그 효과를 확신할 수는 없다고 의사는 사전에 설명했었다. 심리적인 요인에 의한 증상일 경우, 치료가 아주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아주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뻔한 소리와 함께.
이해성은 주머니에 손을 찌른 그대로 손목을 돌려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곧 상담이 종료될 시간이었다.
도시의 빛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손을 씻고 미니바에서 위스키 온더록스를 한 잔 만드는 사이, 침실 문이 열렸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의 윤혜안이 통역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위스키로 짧게 입술을 축인 이해성은 잔을 손에 든 채 그쪽으로 다가갔다.
“수고 많았어요. 첫 상담이라 긴장했을 텐데. 불편한 건 없었습니까?”
“박사님이 편하게 해주셔서 괜찮았어요.”
사실 상담 당사자인 윤혜안보다 이해성 본인의 얼굴이 더 경직되어 있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그랬지만, 정작 윤혜안은 담담해 보였다.
이해성은 침실의 열린 문틈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 뉴욕과 연결되어 있죠?”
윤혜안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말고 기다려요.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매니저가 데려다줄 수도 없으니 택시 타고 왔을 텐데, 데려다줄게요.”
이해성은 손에 든 온더록스를 기울여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러고는 격려하듯 윤혜안의 어깨 위에 툭 손을 얹고 덧붙였다.
“상담이 어땠는지 그것도 듣고 싶으니까.”
그제야 윤혜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두 번도 아니다. 크게 한 번. 그런 버릇마저도 최홍서와 똑같았다.
최홍서 본인이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해성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행동할 때마다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으니까. 귀엽다고 말해버리면 오히려 쑥스러움에 해주지 않게 될까 봐, 아껴뒀을 뿐.
나이에 비해 얼굴은 앳되었어도, 최홍서는 기본적으로 의젓하고 예의 발랐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 행동이 더 눈에 들어왔었다.
성의 없거나 버릇없어 보이는 고갯짓이 아니다. 그럴 때의 최홍서는 오히려 비장할 만큼 진지했었다.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경계하고 의심하고 오해하던 아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모습들을 조금씩 보여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말장난을 주고받기도 하고, 조금은 고집을 부리기도 했었다. 그 모든 것이 마음을 열어주고 있다는 증명임을 알아서, 그 아이가 보여주는 하나하나의 몸짓이 다 소중했었다. 이해성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었다.
그런 부분까지 일부러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일까?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말없이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윤혜안은 불안한 표정으로 이해성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도무지 그런 계산적이고 교활한 행동을 할 인간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보고서로 윤혜안을 접했을 때 이해성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실제로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그가 정말 보고서 대로의 그런 사람인지 더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손안의 야윈 어깨를 무겁게 툭툭 누르듯 두드리면서, 이해성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좀 쉬고 있어요.”
침실에 준비해놓은 노트북 화면 속에서는 이해성과의 대면을 위해 의사가 대기 중이었다. 문을 닫은 이해성은 책상 앞의 의자에 털썩 기대앉았다.
간략한 인사 후 상담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혜안은 이전의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완전히 깨끗한 백지와도 같은 상태죠.”
“기억하지 못한다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겁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상담이 훨씬 더 진행이 돼야 답변을 드릴 수 있어요. 우선은 환자의 말을 믿으면서 상담을 해나가야죠.”
이해성의 조급함에 웃어 보인 의사가 화면 아래의 차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만,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점은...”
“......”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보통은 그 사실에 불안을 느끼기 마련이거든요. 내 가족은 누구고, 내가 어떤 유년 시절을 거치며 성장했고, 어떻게 살아갔었는지... ‘나’라고 인식할 만한 기반이 아무것도 없으니, 인간이라면 불안해질 수밖에 없어요.”
안경 너머 그녀의 명민해 보이는 눈이 반짝거렸다.
“그런데 혜안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마른침을 삼킨 이해성은 시선을 노트북에 고정한 채 손으로 술잔을 찾았다.
“혜안은 웹상에서 자기와 관련된 자료들을 어느 정도 찾아보았고, 기본적인 정보들은 인지하고 있긴 해요. 하지만 그건 혜안에게 소설이나 영화 속 캐릭터의 정보 같은 거죠. 나라고 인식할 수가 없는 거예요.”
“......”
“그런 식으로 알게 된 과거의 자신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는 불안을 느끼기 마련이죠. 혜안은 지금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손안에서 천천히 잔을 돌리면서, 이해성은 확인하듯 되물었다.
“그런데 윤혜안 씨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거죠?”
“맞아요. 직접 대화해 보니,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자신의 삭제된 과거를 최홍서의 정보로 대체하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부분은 어떻게 보입니까?”
의사는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우선은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고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게 해서 가슴과 두뇌가 모두 열리는 데에만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어요. 각오하신 거잖아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이해성은 가슴팍을 크게 부풀렸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의사는 환자로서의 윤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스스로를 과도하게 보호하려는 방어적 태도도 없고, 감상적으로 굴지도 않는다. 그런 소견들이 뒤를 이었다.
윤혜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최홍서에 대한 기억을 자신의 것인 양 훔쳤다. ― 그런 결론을 기대했던 건지, 아니면, 아직은 알 수 없다는 의사의 답변에 안심을 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몸이 무겁고 피로했다.
거실로 돌아갔을 때, 윤혜안은 소파에서 <크림 맨션>의 대본을 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그는 대본을 덮어 가방에 넣으며 일어났다. 지난번에 메고 있던 것과는 다른 가방이었지만, 시즌이 지난 명품 브랜드 제품이라는 점은 동일했다.
열린 문틀에 기대서서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고 있던 이해성은 거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담받느라 기운 빠졌을 것 같은데. 룸서비스라도 시켜줄까요? 먹고 갈래요?”
윤혜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기 전에 저녁 먹었어요. 괜찮습니다.”
하긴. 나랑 마주 앉아서 밥 먹고 싶진 않겠지. 편한 상대도 아닐 테니까.
너무 피곤해서 얼른 욕조에 몸이라도 담그고 싶은데, 어째서 밥을 먹고 가겠냐는 제안을 했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가슴 앞을 사선으로 가로지른 가방끈을 꽉 붙잡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보다,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가죠.”
자동차에 오를 때까지도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수행원이 문 앞에 서고, 이해성과 윤혜안은 안쪽의 모서리를 하나씩 차지했다.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윤혜안은 서너 걸음 뒤에서 이해성을 따라왔다.
두 사람을 태운 세단이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간 후에야 이해성은 첫마디를 건넸다.
“담배 좀 피울게요.”
윤혜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해성은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창문을 반쯤 내리고 그 너머 풍경에 무의미한 시선을 주며 필터를 빨아들였다.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얼마 후 고개를 돌렸다. 보지 않고 있었던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윤혜안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왜요.”
“아닙니다.”
“할 말 있으면 해요.”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허벅지 위의 바지를 쥐었다 놓았다... 한참 망설이던 윤혜안은 겨우 중얼거렸다.
“부사장님이 비흡연자시라고... 어디에서 본 것 같아서요.”
헛웃음으로 이해성의 어깨가 떨렸다. 고개를 숙이며 짧게 한숨을 쉬고, 담배를 손가락에 건 채 뒷목을 주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