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환청을 떼어내려는 사람처럼 머리를 가로젓던 최홍서의 고갯짓이 멈추었다.
소파의 가장자리를 꽉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미간을 좁히고 입매를 굳힌 이해성의 얼굴은, 화가 난 듯도 했고, 금방이라도 울고 싶은 듯도 했다.
일방적으로 ‘윤혜안’을 몰아가던 그런 얼굴과는 어딘가 달랐다. 감정의 동요와 허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표정이었다.
한순간이나마 그것을 윤혜안에게 내보인 것을 후회하듯, 그는 하관을 넓게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최홍서는 그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최홍서를 흉내 내고, 최홍서와 이해성만이 알고 있다 생각했던 얘기들을 자꾸 상기시키는 윤혜안 때문에... 그는 지금 헤집어지고 있었다. 아물기를 기다리고 있던 상처를 윤혜안이 계속 건드리는 꼴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최홍서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상처를 만지는 것을 원치 않겠지.
그런데도 이성을 동원해 합리적으로 이 일을 처리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알 것 같았다.
짧은 한숨 뒤에 다시 이쪽을 돌아본 그는 평소의 얼굴로 완벽히 돌아와 있었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접하게 된 타인의 정보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 윤혜안 씨의 증상을 그렇게 진단한 전문가가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윤혜안 씨는 본인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기억을 잃었고, 그 상태에서 마침 최홍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게 됐다고 가정했을 때.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 내는 대신, 최홍서에 대한 정보를 자신의 과거로 대체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 그런 의미입니다.”
“아...”
최홍서는 감탄 같은 소리를 내면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더듬더듬 찻잔을 찾아 두 손으로 감쌌다. 차는 그사이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어중간한 온도를 그저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윤혜안 씨가 원한다면, 그분과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최홍서가 많이 좋아했던 목소리가 사무적으로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뉴욕과 보스턴에서 활동 중인 분인데, 화상 면담도 가능합니다. 한두 번 정도 시간을 내서 그쪽을 방문해 물리적인 검사를 받아보는 것도 좋겠죠. 하지만 환자가 심적 부담을 가지지 않는 게 우선이니 일단은 상담만이라도 해보자고 제안을 받았어요.”
결코 강요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윤혜안’이 수락하기를 기대하는 초조함을 완전히 다 숨기지도 않고 있었다.
테이블 위만 내려다보고 있어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심호흡 같은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을 뿐이었다. ‘윤혜안’이 도망쳐 버리지 않도록, 그는 스스로를 상당히 제어하고 있는 듯했다.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건 이해합니다. 원하지 않는 자신의 과거를 마주할까 봐 두렵기도 하겠죠.”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서 꼭 지금 윤혜안 씨의 인격체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지워진 기억에 체계적으로 조금씩 접근시켜 나간다면, 사고 전후의 모든 일을 그대로 기억할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실력 있는 전문가에게 조심스러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죠.”
그는 초현실적인, 혹은 비과학적인 현상들을 믿지 않는다.
무속 신앙을 신봉하는 강우현 감독이라도, 죽은 최홍서가 윤혜안의 몸을 빌려 깨어났다는 얘기는 아마 상대해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신의 눈을 빌려 과거를 보고 미래를 점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으니까.
하물며 미신은커녕 넥타이와 관련된 루틴 외에는 징크스조차 갖고 있지 않은 이해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의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였다.
찻잔의 표면을 엄지로 쓰다듬으면서, 최홍서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정리한 생각을 조용히 꺼내놓았다.
“제가 어딘가에서 정보를 얻었고, 그 정보로 최홍서를 흉내 내고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으신 거죠? 그래서 제가 예전 기억을 되찾으면, 그 흉내도 그만둘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구요.”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이해해 줬으면 합니다.”
그는 진지하고 신중했다. 동시에, 선택권은 없다는 듯 여지를 주지 않는 면도 분명 존재했다. 최홍서의 정보를 상세하게 손에 넣고 있는 게 분명한 윤혜안을 자유롭게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을 테니까.
찻잔이 손안에서 튕겨 나갈 정도로 힘을 주면서 최홍서는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고 잘근거렸다. 찻잔 속에서 투명한 연녹색 찻물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터뜨리듯 말했다.
“제가 그 상담을 받으면.”
“......”
“부사장님이 저를 좀 더 믿어주시게 될까요?”
손안의 찻물처럼 최홍서의 목소리도 떨고 있었다.
“물론이죠.”
간결한 즉답이 돌아왔다.
최홍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상담받을게요.”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테이블 너머에서 그의 구두가 멈춰 섰다.
“모든 걸 지원하겠습니다. 윤혜안 씨는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내서 그쪽의 전문가와 상담만 해주면 돼요.”
용기 내어 올려다본 그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걸로 그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다면, 거부하고 버틸 이유가 없었다. 그의 곁에 남는 것을 포기할 배짱도 없지 않은가.
앞에 버티고 선 그를 올려다보며, 최홍서는 마치 신을 향해 기도하듯 말했다.
“대신, 저도 부탁이 있어요.”
그의 표정은 관대했다. 뭐든 들어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가 그 정보들을 어딘가에서 알게 됐다는, 그런 증거를 찾아내시기 전까지는 절 의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최홍서는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그걸 빌미로 부사장님께 뭔가를 요구하려고 한다는 의심이요.”
“......”
“증거를 찾거나, 아니면 실제로 제가 부사장님께 뭔가를 요구하기 전까지는... 저, 무죄인 거잖아요.”
당신의 추측이 맞다.
최홍서를, 최홍서와 당신 사이의 일들을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
그렇게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발언이었다.
전혀 모른다고 발뺌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증거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정보를 손에 넣어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이해성이 ‘윤혜안’으로 알고 있는 자신이 바로 그 정보의 당사자였으니까.
“그때까지는 의심하지 말아 달라. 그게 원하는 전부입니까?”
“네.”
상담은 회사나 다른 지인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진행할 것.
이해성이 보호자 자격으로 의사로부터 상담 경과를 제공받는 것에 동의할 것.
이해성은 그 두 가지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윤혜안이 상담을 받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상담 내용을 비밀로 할 것을 약속했다.
상담을 받기 위해 입이 무거운 믿을 만한 통역사를 붙여 주겠다고도 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상담 내용을 공개하고 싶지 않다면, 자신이 직접 통역을 해주겠다는 제안과 함께.
“자세한 부분은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될까요?”
찻잔을 감싸 쥔 최홍서의 떨리는 손을 힐끔 내려다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최홍서는 향수는 물론 포장지와 리본까지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주인공을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먼저 나가 봐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술에 물면서 그가 살짝 턱짓을 해 보였다. 이런 때의 그는 어딘가 불량해 보였다. 질 좋은 슈트를 입고, 지적인 얼굴로 점잖게 말하고 행동하지만,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불량배처럼 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담배를 입술에서 손가락으로 옮기며 연기를 길게 뿜는 그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최홍서는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파와 문의 중간쯤까지 걸어갔을 때, 등 뒤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혜안 씨를 보고 있으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반만 돌려세웠다.
그사이 그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허벅지에 팔꿈치를 괸 그는 연기를 뿜으며 재를 털어냈다.
“적어도 그 아이가... 윤혜안 씨처럼, 건물이 아니라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면.”
뛰어내렸다는 표현을 입에 담을 때, 그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랬다면, 그 아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 정도는 열려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자꾸 들거든요.”
재떨이 위에서 손을 거둔 그가 시선을 들어 ‘윤혜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요. 내 말이 잔인합니까.”
“......”
“그 아이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며 내 편을 들어줬었지만, 사실 난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기적을 보면서도 내 사람 생각밖에는 머릿속에 없는 인간이에요.”
그러니 대강 장단을 맞춰주는 척하면 포기하고 놓아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라는, 그런 의미 같았다.
담배를 한 모금 더 깊숙이 빨아들인 그는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홍서가 나에게 좋은 분이라고 해줬던 것. 그것도 압니까?”
“......”
“무조건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아이 같은 그 맹목적인 믿음에 내가 얼마나 위로를 받았었는지, 윤혜안 씨는 그것도 알아요?”
다시금 ‘윤혜안’을 바라본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침착하지 않았다. 원망과 분노, 그리움이 충돌하는 눈빛은 술에 잔뜩 취한 사람 같기도 했다.
“우리에 대해서 뭐든지 다 알고 있는, 윤혜안 씨 신 같은 사람이잖아요.”
헝클어진 그의 두 눈이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다, 최홍서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런 걸 모르더라도, 제가 보기에도 부사장님은 좋은 분 같아요.”
“윤혜안 씨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는 씁쓸히 조소하며 담배를 입술로 가져갔다.
“절 싫어하시는데도, 아까 도와주셨잖아요.”
“......”
입술에 담배를 물기 전, 그의 손이 멈췄다. 지친 눈으로 말없이 응시하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그를 위로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괴로워하는 그를 앞에 두고 내가 먼저 눈물을 흘려버리는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선물 상자를 꺼내놓은 뒤에 휴게실 밖으로 나가 있었던 수행원이 최홍서를 향해 깍듯이 허리를 접었다. 마주 인사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직접 향수를 뿌려주었던 손목 바깥쪽 자리가 화상이라도 입은 듯 화끈거렸다. 그곳에서부터 피어나는 향기는 과거에 그가 주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래도, 적어도, 그가 준 것이었다.
손목을 들어 향기에 코를 묻으며 요란한 음악과 조명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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