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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83화 (83/185)

83화

“아까는... 이상한 걸 보여서 죄송합니다.”

“예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인가 봐요.”

“......”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 그렇게 말하려 해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 역시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구차한 변명 같았다. 그래서 그냥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그날도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쳐서 죄송하구요.”

“......”

이번에는 이해성이 말이 없어졌다. 그가 내어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최홍서는 다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신을 좀 가다듬고, 먼저 간다고 말씀드린 후에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요... 그런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중간까지는 참을 만했었는데, 아무 전조도 없이 갑자기 심하게...”

“알아요.”

“...네?”

의외의 답변에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세 사람 정도가 더 앉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같은 소파에 나란히 앉은 그는 겹쳐 꼰 다리의 무릎 위에서 술잔을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갑자기 열이 42도까지 올랐으니 버티기 힘들었겠죠. 아픈 사람 두고 폐 끼쳤다고 생각 안 하니까 죄송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믿어 주시는 거예요?”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해성이 최홍서와 눈을 맞췄다.

“체온계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잖아요.”

“......”

“믿어요.”

그 한마디에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윤혜안이 아니라 나는 최홍서라고. 거기까지 믿어주는 게 아니라 해도 괜찮다. 쓰러지고 아팠던 것들이 쇼가 아님을 믿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누명을 벗은 듯 한결 살만했다.

박동하가, 좀 전의 그 남자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그가 믿어준다면, 세상이 믿어주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너무 오래 눈을 맞춘 것 같은 생각에 최홍서는 허둥지둥 시선을 끌어내리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냈다.

“그리고, 병원비... 병원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그것까지 부사장님께서 부담하시게 할 수는 없어요. 하다못해 검사 비용만이라도 제가...”

최홍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는 수행원에게 손짓을 했다. 출입문 부근에 로봇처럼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이 재빨리 다가와 작은 상자를 하나 이해성에게 건넸다. 돈 문제를 그가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아서 최홍서도 말을 멈추었다.

“응급실 통해서 일반 병실로 옮기게 할 수도 있었는데, 내가 멋대로 지시한 일이에요. 그걸 윤혜안 씨에게 부담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 신경 쓰지 마요, 그런 건.”

간략히 설명한 그는 광택이 있는 은색 포장지에 푸른색 리본으로 장식한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최홍서 쪽으로 쓱 밀어두었다.

“선물도 없이 생일 파티에 올 수는 없잖아요.”

“가, 감사합니다...”

“풀어봐요. 성의를 봐서라도.”

“지금요?”

이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최홍서는 풀어보기도 아까울 만큼 근사하게 포장된 상자로 손을 뻗었다.

‘최홍서’도 없는 윤혜안의 생일 파티에 이해성이 나타날 줄도 몰랐지만, 선물까지 가지고 오리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쓰러졌던 게 쇼가 아니었다는 걸로 조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나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리본을 풀어내고,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벗겨냈다.

“......”

분명 그 향수였다. 이해성이 최홍서를 만날 때 뿌리곤 했던, 그리고 최홍서에게 선물해 주었던 오더 메이드 향수.

내용물을 확인한 최홍서는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안 뿌려 봐요? 향이 마음에 드는지 어떤지 알고 싶은데.”

그의 권유에 최홍서는 묵직한 병을 손에 들고 왼쪽 손목 안쪽에 향수를 분사했다. 향기를 호흡한 순간, 얼굴 근육이 움찔거렸다.

분명 향수의 용기는 같은데, 향기가 전혀 달랐다.

그래, 최홍서와 단둘만이 공유했던 향기를 그가 윤혜안에게 내줄 리가 없지.

“왜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젓고 오른쪽 손목을 왼쪽 손목 위에 겹쳐 가볍게 비빈 뒤, 그대로 양 손목을 귀 아래에 문질렀다. 머릿속으로는 딴생각 중이었으니, 거의 기계적으로 일어난 행동이었다.

문득 가벼운 한숨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예전에, 최홍서로서 그의 곁에서 들었던, 그런 달콤한 한숨과도 닮아 있었다.

묵직한 크리스털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이어졌고, 둘 사이의 거리를 단번에 지워내면서 그가 바로 옆자리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최홍서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향수병을 집어 들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처럼.

“그렇게 비비면 안 된다고 알려줬는데.”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던 최홍서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숨이 찰 정도였다.

마른침을 삼키고 최대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네?”

“그리고 손목 안쪽보다는 바깥쪽에 뿌리는 게 향기가 더 오래간다고. 그것도 알려줬었잖아요.”

“그게, 무슨...”

삐걱거리는 녹슨 기계처럼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눈이 최홍서를, 아니, 윤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번갈아 깊숙이 바라보는 눈은 이전처럼 탐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달랐다.

색이 다르고, 온도가 달랐다.

의심하고 배척하며 차갑게 탐색하는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찾는 그 눈빛은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가 지금 눈앞의 윤혜안에게서 찾는 것이 증거나 단서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지금 윤혜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윤혜안에게서 최홍서를 찾고, 최홍서를 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이번에는 마른침도 삼키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버린 최홍서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무릎 위에 힘없이 놓인 최홍서의 손목 위에, 바깥쪽 손목 위에 치익, 향수를 조금 뿌렸다.

“그냥, 누가 생각나서요.”

“......”

“윤혜안 씨한테 한 말이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향수병을 내려놓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최홍서의 고개가 그를 따라 위를 향했다.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간 그는 잔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잔 속에는 얼음만 남아있었다. 술을 더 마시려는지, 그는 잔을 들고 미니바 앞으로 걸어갔다.

“바쁘신데... 여기까지 와주시고, 선물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

“부사장님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는 이만...”

“그때는 아저씨라더니?”

“......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최홍서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러나 미니바 앞에 선 이해성의 넓고 곧은 등은 미동조차 없었다.

잠시 후, 새 잔을 손에 든 그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얼음 없이 진한 호박색의 술이 잔을 채우고 있었다.

“그날, 늦은 밤까지 윤혜안 씨 병실에 있었습니다.”

최홍서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쓰러진 척했던 게 아니라는 것만이라도 믿어주는 거냐고.”

“......”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에도 나에게 그렇게 말하더군요.”

곧은 자세를 허물어뜨려 미니바에 느슨하게 기댄 그는 잔을 천천히 돌리면서 말했다.

“잠들면 아저씨가 사라질까 봐 못 자겠다고, 나를 꽤 애틋하게 보던데요.”

얼음에 희석하지도 않은 독한 술을 단번에 여러 모금 들이켠 그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는 소파에 앉아있는 최홍서를 바라보았다.

“나까지 잠시 흔들렸을 만큼.”

입을 다문 상태에서도 거칠어지고 있는 자신의 숨소리가 최홍서의 귀에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 말의 의미를 더듬어보기도 전에 그가 다음 얘기들을 꺼내놓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 가능성에 대해서. 이런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 국내외 권위자들에게 자문까지 구해 봤어요.”

“......”

“의식 불명에서 깨어난 뒤에 인격이 변한 사례들이 없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그는 의식이 없었던 동안 전생의 기억을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관해 얘기했다. 의식을 회복한 후에 그 사람은 본인이 주장하는 전생의 자아로 살기를 택했다며 가족과도 인연을 끊었다고 했다.

이런 일을 겪기 전이었다면, 최홍서 역시 아무런 흥미를 갖지 않았을 이야기였다. 별난 사람들을 소개하는 B급 프로그램에나 등장할 소재로 취급했을 것이다.

“전생이라니... 그런 경우에는 누구도 사실 확인을 할 수가 없죠. 그런데 윤혜안 씨는 정작 본인의 과거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최홍서에 대한, 최홍서와 나에 대한 일은 아주 상세하게 알고 있어요. 그 아이가 나에게 어떤 말을 했었는지, 그리고 내 집의 구조까지도.”

“그건...”

“또 우길 생각은 말아요.”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쓸데없는 실랑이는 생략하자고, 그의 눈과 표정과 어조가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남아있는 술을 단번에 비워내고는 등 뒤의 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난번과는 달리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예전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윤혜안 씨 말, 이제는 어느 정도 믿습니다.”

“......”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울게요.”

‘기억 안 난다는 핑계로 그 지저분했던 과거 싹 청산할 생각이었어? 네가 기억을 하든 말든, 다 네가 했던 짓이야.’

조금 전 홀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그 남자의 말이 되살아났다.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 저는 찾고 싶지 않아요.”

“......”

“사람들이 말하는 예전의 윤혜안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그럼, 최홍서로 살고 싶기라도 한 겁니까?”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침착함이 살짝 흔들린 목소리.

환청을 떼어내려는 사람처럼 머리를 가로젓던 최홍서의 고갯짓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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