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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82화 (82/185)

82화

그 테이블에는 두세 명 정도 아는 얼굴들이 섞여 있었다. 안다고는 해도 최홍서였던 과거에 얼굴과 이름만 익힌 연예인들이었다. 남녀로 이루어진 열 명 남짓한 그들은 이미 상당히 술에 취한 듯했다.

그중 한 명이 ‘윤혜안’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누구야, 윤혜안! 이 새끼는 분명 죽여도 안 죽을 거라고 우리끼리 맨날 그랬는데. 이거 봐라. 진짜 살아 돌아왔다?”

비틀거리며 최홍서에게 걸어온 그는 거의 매달리듯이 최홍서의 어깨를 뒤덮었다. 정상급 인기를 누리는 톱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 그는, 다혈질에 문란한 사생활로 업계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었다.

“공짜로 푸는 술 말고, 샴페인 가져와. 씨발, 내 걸레가 살아 돌아왔는데 샴페인 따야지!”

최홍서는 샴페인 보틀을 주문하는 남자의 팔을 어깨에서 치워냈다. 오오오, 주변에서 환호도 야유도 아닌 이상한 감탄을 쏟아냈다.

남자는 조금도 기죽거나 기분 상해하지 않고 더 단단하게 목을 감아왔다. 뜨거운 입술이 관자놀이에 박혔다. 더운 숨결과 함께, 그의 팬들이 열광하는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귓가에서 헐떡거렸다.

“왜? 애들 다 보는 앞에서 걸레라고 하니까 빡쳤어? 침대에서 그러면 좋아서 자지러졌으면서?”

최홍서는 그 팔에서 빠져나오려 힘을 줬지만, 체격 차이 때문에 쉽지 않았다. 고개를 꺾어 입술을 피하면서 목에 감은 팔을 마구 잡아 뜯어도,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나 이 성질머리 존나 그리웠잖아.”

“놔요. 놓고 말해요. 기억 없다는 거 들었다면서요? 기억도 못 하는 사람한테 무슨 짓이에요?”

그제야 남자의 몸이 최홍서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는 아무 잔이나 집어 들어 술을 들이켜면서, 곁눈으로는 최홍서를 내려다보았다.

“기억 잃었다는 거, 그거 다 쇼 아니었어?”

“무슨 근거로...”

“어차피 네 성질머리에 딴 사람인 척 오래 못 가. 과거 청산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네가 성질 죽이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 같은데? 어?”

그 남자뿐만 아니라, 테이블에 모여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쪽이 어떻게 생각하든, 예전 기억을 잃은 건 사실이에요. 이런 식으로 계속 저를 대하실 생각이라면, 앞으로는... 그냥 서로 모른 척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뭐야, 진지해?”

새로 서빙된 샴페인 병을 손에 쥐고 남자가 삐딱하게 최홍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테스트해 보면 되겠네? 나랑 존나 떡치는 동안에도 기억이 안 돌아오는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샴페인이 오픈되자, 이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 외에 다른 주변 사람들도 환호했다. 그 함성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음악의 볼륨이 커지고, 본격적으로 조명이 휘황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최홍서는 남자가 건네는 빈 술잔을 거부했다.

“퇴원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술은 거절하겠습니다. 초대받고 오신 거니 오늘은 재밌게 놀다 가시고, 앞으로는 보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최홍서의 어깨에 팔을 올린 남자는 허리를 숙여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윤혜안, 언제는 술과 섹스가 만병통치약이라며. 발목 부상으로 무대도 못 올라가고 존나 우울해하고 있었을 때 술 사 들고 들이닥쳐서 옷 벗고 덤볐던 게 누구더라?”

“전에 그쪽하고 제가 어떤 관계였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없다는 사람에게...!”

순식간이었다.

손목이 거칠게 잡아당겨지고, 몸이 앞으로 확 기울면서 남자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뒤통수와 허리가 붙잡히는 동시에 입술이 집어삼켜졌다. 막무가내로 혀부터 쑤셔 넣는 무례한 키스에 잠시 움츠러들었던 최홍서는 입안의 혀를 힘주어 물어버렸다.

그리 강한 힘을 주기도 전에 혀를 뒤로 뺀 남자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최홍서를 보며 히죽거렸다.

“이제 기억나?”

“......”

“너랑 이런 거 하던 관계였지.”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내면서 남자는 최홍서의 허리를 더 바짝 당겼다.

“내 첫 남자가 너잖아. 후장으로 하는 섹스 가르친 게 너였다고.”

“그만하세요.”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최홍서는 강하게 어깨를 뒤챘다. 그럴수록 몸을 죈 힘은 강해졌다.

“그만하세요? 윤혜안 입에서 무슨 이런 고운 말이 나와? 하하... 스폰서 할배들 흐물흐물한 좆 역겹다면서. 내 좆으로 정화시키겠다고, 이런 자리에서도 먼저 나한테 올라탔던 게 너야.”

“그만해! 아니야, 아니야!”

최홍서는 발악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눈가에 더운 습기가 훅 끼쳤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품에서 빠져나가 돌아서려는 최홍서를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이 또 한 번 붙잡았다.

“어디 가? 기억 안 난다는 핑계로 그 지저분했던 과거 싹 청산할 생각이었어? 네가 기억을 하든 말든, 다 네가 했던 짓이야.”

“기억 안 나! 기억 안 난다고!”

네가 기억을 하든 말든, 다 네가 했던 짓이야.

남자의 말이 불길한 예언처럼 전신을 휘감아 조여왔다. 최홍서로서 벌인 일들도, 윤혜안의 과거도, 전부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그렇게 현실을 눈앞으로 들이미는 것만 같았다.

최홍서는 환영에 시달리는 것처럼 마구 고개를 저었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얼굴을 가린 팔을 남자가 붙잡아 끌어내렸다.

“윤혜안 얼굴로 이 정도 얘기에 벌벌 떠는 걸 보니까 또 새로운데? 이것도 존나 꼴리네? 응?”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을 가격하기 위해 팔꿈치를 들어 올렸고, 그마저도 남자에 의해 저지당했을 때. 주변의 모든 소음 사이를 곧게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윤혜안 씨.”

“......”

“바쁩니까?”

바로 등 뒤? 고작해야 두세 걸음 정도 뒤일까?

고함을 지르지 않아도 집중하게 만드는 존재감 강한 저음. 돌아보지 않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앞에 버티고 선 남자의 일그러지는 시선이 최홍서의 추측을 뒷받침해 주었다.

최홍서는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거의 바로 등 뒤에 이해성이 서 있었다.

“내가 조금 늦게 도착해서요. 인사라도 할까 하는데. 뭔가... 소란스럽네요.”

아직까지도 남자는 최홍서의 팔과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해성의 시선이 그런 남자의 손을 향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치우라는 의미였다.

“방해한 건가요?”

일부러 더 느릿하게 만들어내는 목소리는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제야 남자는 손을 거두어들이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최홍서는 얼굴을 적신 눈물을 얼른 훔쳐내면서 이해성을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아니요... 아닙니다.”

고개를 저으면서 이해성의 팔을 끌었다.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있다는, 뿌리쳐질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할 수가 없었다. 좀처럼 돌아서지 않고 버티려 하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이해성의 등을 억지로 밀어냈다.

“부사장님, 저쪽, 저쪽으로 가요.”

이해성의 등장에 다들 동요하는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윤혜안의 생일 파티에 등장한 이해성. 물론 강 감독이나 다른 영화 관계자들도 참석했으니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윤혜안의 생일 파티에 등장해 윤혜안을 편들고 나선 이해성. 거기까지 간다면 약간은 이야깃거리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봤자 업계 내에서 도는 소문에 그칠 것이란 걸 안다. 연예인을 스폰서나 애인으로 둔 재벌들이 모두 가십이 되지는 않으니까.

그렇더라도 지금의 윤혜안과 그가 함께 입에 올라서 좋을 게 없을 듯했다. 일이 커지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해버리고 싶었다.

얼어붙은 채 이쪽을 보는 박동하의 모습도 사람들 사이로 언뜻 보였지만, 그런 것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회원 전용 휴게실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죠.”

인파를 헤치고 빠져나간 후에 이해성이 먼저 그렇게 제안했다.

그를 따라 안쪽 복도로 접어들었다. 이전에 이곳에 왔을 때, 명 사장에게 보고 전화를 하기 위해 안내받았던 휴게실과는 전혀 달랐다. 예전 그곳은 아마 게스트용인 모양이었다. 이해성과 함께 들어간 휴게실은 작은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는 여차하면 침대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길고 폭이 깊은 소파와 미니바, 전용 욕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문을 닫으니 홀의 소음과 완전히 차단되었다.

“앉아 있어요.”

옆으로 돌아서서 눈물을 마저 훔쳐내고 있던 최홍서를 짧게 쳐다본 그가 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니바 앞으로 걸어간 그는 전기 포트에 물을 데우고, 크리스털 글라스에 얼음을 넣으며 차분한 소음들을 만들어냈다. 엉거주춤 의자에 앉은 최홍서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힐끔거렸다.

조금 전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좋지 않은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고, 쓰러진 날 이후 첫 만남이라 긴장이 됐다. 혼날 걸 알고 불려온 아이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이것 좀 마셔요.”

잠시 뒤, 그가 가지고 온 것은 고급스러운 잔에 담긴 향긋한 차였다.

“감사합니다.”

최홍서는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테이블을 빙 돌아온 그가 옆자리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고,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반대쪽으로 엉덩이를 끌어 움직였다. 하나뿐인 소파는 꽤 긴 편이라 그와의 거리를 충분히 유지할 수는 있었다.

그는 얼음을 넣은 위스키를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아까는... 이상한 걸 보여서 죄송합니다.”

“예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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