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그가 윤혜안을 싫어하고, 요란한 파티를 싫어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이곳에 그가 나타났을 때도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고...
‘오늘은 최홍서 씨가 게스트라고 해서 갔던 거예요.’
그 말 그대로라면, 오늘은 최홍서가 없으니 그가 이곳에 올 이유도 없었다.
“몸은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고? 얼굴 보니까 아픈 사람 같지는 않긴 한데. 술을 줘도 되나?”
최홍서에게 빈 잔을 건네면서 강 감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색을 살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어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무리하면 안 되니까. 우리랑은 한 잔만 같이 해요. 다른 손님들하고도 마셔야 할 테니까.”
이해성의 옥상에서 쓰러진 다음 날, 최홍서는 처음 보는 낯선 병실에서 눈을 떴었다. 병실이라기엔 지나치게 넓고 쾌적해서 정확히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인지 혼란스러웠을 정도였다.
다행히 용재가 곁에 있었고, 그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곳이 강남의 한 종합병원 VIP 병동이고, 이해성의 집 화장실에서 쓰러져 그곳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그런데 왜 VIP 병실에...’
‘이해성 부사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대요.’
‘부사장님이?’
‘댁에서 손님이 쓰러졌으니 마음 써주신 건가 봐요. 병원비는 신경 쓰지 말고 여기서 그대로 검사도 받고 퇴원할 때까지 있으라고 하셨대요. 부사장님 비서분인가? 아무튼 그런 분이 회사로 연락을 주셨어요.’
‘무슨... 검사?’
‘아, 그, 뭐라더라? 패혈증 아니면 신우, 신우.. 무슨 그런 병 같다고. 형 깨어나시면 소변 검사랑 엑스레이랑 CT... 그런 검사들 진행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지난번 봉안당에서도 똑같은 증상으로 쓰러졌었고, 당시에도 의사가 비슷한 소견을 냈었다. 이런저런 검사 결과, 최종적으로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진단이었다.
이번에도 소용없을 것이다.
아마도, 최홍서였던 과거의 기억이나 감정을 강하게 떠올리면 그런 증상이 유발되는 것 같았으니까.
확실하지는 않아도 지금껏 같은 증상이 일어났던 순간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그것밖에는 짚이는 데가 없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추측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몸에서 영혼이 눈을 뜬 마당에 최홍서는 이제 못 믿을 일이 없었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검사 결과는 역시나 이상 없음이었다.
의사가 의심했던 신우신염도 패혈증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종성 췌장염인가를 의심했으나 그 또한 아니었다고, 의사는 VIP 병동 환자에게 아주 친절히 설명해 주었었다.
‘환자분들이나 보호자분들 생각에는 불안하시겠지만, 사실 검사를 통해서도 발열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20~30% 정도나 됩니다. 드문 일은 아니에요. 환자분의 경우, 발열만이 아니라 구토가 동반되는 면, 그리고 급작스럽게 강한 증상이 일어나는 면이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신체는 이상 없이 건강합니다. 앞으로는 증상이 있을 때 참지 마시고 바로바로 해열제를 드시고 휴식을 취하시거나, 심하다 싶으시면 곧장 병원을 찾아주세요.’
이렇게 의학이 발달한 세상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열이 20~30%나 된다는 얘기가 최홍서에게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최홍서에게는 무서운 질병의 대표 격인 암도 고치는 세상인데, 고작 그런 고열과 울렁거림의 원인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그렇게 많다니.
그러나 동시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과학이나 의학으로도 밝혀지지 않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
그런 존재가 자기 자신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이상한 안심을 느꼈다.
그렇게 최홍서는 이틀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도, 이해성은 회사 측에도 전화번호를 남기지 않았다. 핸드폰 주소록에 ‘당근판매자님’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긴 했지만, 물론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병원에서는 이해성 쪽으로 보고를 하고 있었던 건지, 퇴원 직전에 그의 수행원이 찾아와 꽃바구니를 전해줬었다. 고작 이틀 있었을 뿐인데 퇴원 축하 선물이라면서...
화려하지는 않으면서 화사한, 그의 취향을 반영한 꽃바구니 사이의 카드에는 ‘윤혜안 님의 퇴원을 축하드리며, 건강을 기원합니다.’라는 상당히 상투적인 문구뿐이었다.
인간적으로도 호감을 느끼지 않는, 오히려 싫어하는 것에 더 가까운 윤혜안에게도 그는 예의를 다해주었다. 최소한 지난번처럼 구급차만 불러주고 끝난 건 아니었다. VIP 병동을 쓰게 해주고, 병원비도 전부 부담하고, 퇴원에 맞춰 꽃바구니까지 보내줬으니까.
그런데도 꽃집 직원이 손글씨로 쓴 듯한 상투적 카드 문구에 가슴이 아팠다.
더 많은 걸 바라면 안 되는데. 바라도 주지 않을 걸 아는데. 남이 써준 의례적인 그 문구 한 줄이 그와 자신의 거리감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갑갑했다.
그래도, 꽃바구니도 카드도 소중하게 집으로 가져가서 보관하고 있긴 했지만...
강 감독이 따라준 술로 건배를 나눈 뒤, 박동하는 다른 손님들에게도 인사를 돌자면서, 최홍서를 데리고 테이블을 빠져나갔다.
“이번 기회에 지인들한테 한꺼번에 인사도 할 수 있고 잘됐잖아. 기억 안 난다고 예전 사람들 척지고 지낼 것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긴 했지만, 최홍서는 그다지 내키지가 않았다. 뒤따라가는 걸음이 절로 느려졌다.
앞장서던 박동하가 빨리 오라며 재촉하더니, 최홍서가 다가오자 주변을 살피며 은밀히 물어왔다.
“근데, 그날 어떻게 된 거야?”
“그날?”
“형 쓰러진 날.”
“......”
“다른 손님들은 화장실 쪽으로 가지도 못하게 하더니... 그 이후에 부사장님도 안 나타나셨어. 혹시, 형 병원에 따라가셨던 거야?”
최홍서의 표정을 살피면서, 박동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할까 봐, 이해성이 다른 손님들을 내버려 둔 채 윤혜안을 태우고 병원까지 따라왔었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한 사람 같았다.
“난 다음 날 아침에야 정신이 들어서, 그날 일은 기억이 안 나.”
“병원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 없었어? 이해성 같은 사람이 병원에 나타났으면 형 깨어난 다음에라도 말이 나왔을 거 아니야.”
“못 들었어, 그런 얘기.”
최홍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퇴원 후,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지냈었다. 의학적으로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지만, 하룻밤을 꼬박 고열에 시달렸던 몸은 회복이 필요했다. 아마도 박동하는 그사이 여러 번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래?”
그제야 박동하의 얼굴에서 초조한 기색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묻는 말에는 사실대로 답해줬지만, VIP 병동에 입원시키고 병원비까지 전부 지불해 줬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박동하에게 꼬박꼬박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형이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어서 병원으로 옮겼다고 하더니, 그 이후로 부사장님은 안 나타나시고... 부사장님 비서분인지 집사분인지, 대신 사과하면서 준비한 음식이랑 술은 편하게 즐기시라고 하긴 했는데. 다들 흥도 깨졌고, 흐지부지 파했어, 그날. 사람이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주인도 없는 파티에서 먹고 마시면서 기분 내기도 그렇잖아.”
“......”
“그래서 난 부사장님이 형 병원으로 따라가신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가 봐?”
박동하는 그것만큼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고 싶은 듯했다. 곁눈질로 최홍서를 바라보는 눈이 꽤 간절했다. 이해성에 대한 박동하의 관심에 대해 긴가민가했었는데, 오늘로 확실해진 것 같았다. 이건 절대 재벌에 대한 일반적인 호기심이 아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다른 볼일이 급하게 있으셨던 거겠지. 바쁘신 분이니까.”
“그치? 가까운 사이면 몰라도, 병원까지 따라가시진 않으셨을 거야. 그랬다면 병원에도 소문이 돌았을 텐데 아무 말 없다는 거 보면.”
“그렇지...”
박동하는 완전히 안심했는지,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감돌았다. 너무 솔직해서 차라리 순수해 보일 정도로 박동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게 힘들어서, 최홍서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버렸다.
“용재 형한테 들었는데, 검사 결과도 이상 없다고 했다며?”
“응.”
“아무 이상 없는데 기억이 안 나고, 아무 이상 없는데 쓰러지고... 그러니까 남들이 형 의심하잖아. 사람이 그렇게 쓰러지는데 병원에서는 왜 이상이 없대? 그 의사, 돌팔이 아니야?”
그렇게 얘기하면서 박동하는 멈춰 서 있던 몸을 다시 움직였다. 최홍서는 돌아서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상이 없다는 게, 특별한 병이 없다는 거지... 내가 거짓말로 쓰러졌다는 뜻은 아니야.”
“누가 뭐래?”
“지금 너 하는 말이 나한텐 그렇게 들리는데?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일부러 열을 42도까지 오르게 만들어?”
“열이 42도까지 올랐었어?”
그렇게 되묻는 걸 보니 어느 정도는 의심했던 게 사실인 것 같은데, 박동하는 인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팔을 붙잡은 최홍서의 손을 털어냈다.
“난 형이 거짓말로 쓰러졌다고 한 적 없어. 자꾸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고 나오니까, 사람들이 의심할 여지가 생긴다는 거지.”
“......”
할 말이 없었다.
최홍서가 아무리 나는 윤혜안이 아니라고 우겨도, 자신의 사회적 신분은 윤혜안이었다.
기억을 잃은 척한다, 쓰러진 것도 가짜다. 사람들이 지금의 윤혜안을 그렇게 보는 이유는 과거 윤혜안의 행적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최홍서가 그 책임을 져야만 했다.
“형이 기억이 나든 안 나든, 과거의 형도 형이야. 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형 본인은 기억 못 해도, 남들의 기억은 그대로라고.”
“......”
“솔직히 형 깨어나고 기억 잃었대서... 당연히 형 본인이 제일 놀라고 혼란스럽겠지만, 주변 사람들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야.”
“......”
“누구나 용재 형처럼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그냥 기억만 잃은 게 아니라, 말투, 성격, 식성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수준인데. 오히려 용재 형이 특이한 거 아니야?”
박동하의 목소리에는 점점 원망이 섞이고 있었다.
“그래. 너도 혼란스러울 텐데, 내가 너무 예민했어.”
“......”
“이런 게, 예전의 나랑 다르다는 거지?”
“......그래. 진짜 다른 사람 같아서 적응 안 된다고.”
박동하는 이제 최홍서를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분하고 억울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어린아이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최홍서는 전부터 박동하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내놓았다.
“너는, 내가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예전의 내가 더 좋아?”
눈빛은 그대로 감정이 들끓고 있는데, 박동하가 억지로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아프게 웃어 보였다.
“어, 예전의 형으로 남아있는 게 훨씬 더 좋아.”
그러고는 다시 뒤를 돌아 어느 요란한 테이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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