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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80화 (80/185)

80화

요란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이해성의 성미를 잘 아는 병원이라, 의사는 간호사 한 명만 동반한 채 조용히 병실을 찾았다.

“병원에 도착한 당시에 열이 42도까지 올라 있었습니다. 지금도 빠르게 내리고 있지는 않아요.”

환자의 체온을 측정하는 간호사를 바라보면서 담당의가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발열이나 구역질 같은 증상으로 봐서는 신우신염이나 패혈증을 의심해 볼 수도 있는데, 환자가 어느 정도 회복을 해야 자세한 검사가 가능합니다. 지금은 의식이 아예 없다 보니...”

“......”

“그리고, 환자가 통증을 오래 참았던 것 같습니다. 겉옷까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어요. 예상하는 질환이 맞다면, 더 버텼을 경우 패혈성 쇼크로 이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VIP 병동의 보호자이자, ARA의 이해성이니만큼 그때까지는 나름대로 눈치를 살피며 얘기하던 의사의 표정과 목소리에 약간의 꾸짖는 듯한 기색이 섞였다.

“이 정도 증상이었다면 꽤나 고통스러웠을 텐데. 환자가 괜찮다고 해도 주변 분들이 억지로라도 데리고 내원해 주셔야 합니다. 이런 고열은 성인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어요.”

이해성은 대꾸 없이 환자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봉안당에서는 윤혜안이 바로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가증스러운 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강 실장의 보고서 내용으로만 윤혜안을 파악했었고, 강 실장의 보고서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었으니까.

윤혜안의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그가 ‘기억이 나지 않는 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해성에게도 보고서 속의 윤혜안은 ‘쓰러지는 척 쇼’를 하고도 남을 사람처럼 보였었다.

그런데 왜일까.

의사의 꾸짖음을 듣는 동안, 눈앞의 환자가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있는 게 정말 자신의 무심함 때문인 것만 같았다. 윤혜안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적어도, 그간 내 앞에서 쓰러지거나 뻘뻘 흘려댔던 땀들이 쇼는 아니었던 것이다.

오래 이어지는 이해성의 침묵에 의사는 불안해졌다. 그의 기분을 거스른 것은 아닌지 안색을 살피던 의사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서둘러 병실을 떠났다.

의사가 사라진, 거실과 연결된 폴딩 도어 쪽을 바라보면서 이해성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통을 인내하며 쥐어짠 탓에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던 냅킨이 이상하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쓰러진 척...”

“......”

귓속말하듯 자그마하게 들려오는 바싹 마른 목소리에 이해성은 병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만큼이나 파리한 얼굴빛으로 윤혜안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는 목덜미가 조였다 풀어지며 힘겹게 마른침을 삼켜냈다.

“쓰러진 척했던 게 아니라는 거, 그것만이라도 이제... 믿어주시는 거죠?”

의사와의 대화가 들렸던 건가.

고개만 돌리고 있었던 이해성은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초점을 잘 잡지 못하는 눈동자를 보니 아직 완전히 의식이 돌아온 게 아닌 듯했다.

몸이 안 좋아 쓰러지기까지 한 환자였다. 윤혜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이해성은 하관을 문지르며 침대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걸어갔다.

“그런 생각 하지 말고 지금은 그만 자요. 쉬어야 돼요.”

고열에 들뜬 환자의 눈에 순식간에 물기가 어렸다. 사라져가는 눈앞의 환상을 붙잡으려는 사람처럼 야윈 손이 공중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 손을 잡아줄 수는 없었다. 이해성은 병상의 측면에 설치된 사이드 레일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잠들면... 아저씨, 사라질까 봐...”

“......”

레일을 쥔 이해성의 손등에 순간 힘줄이 불거졌다. 환자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환자는 고열에 들떠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하얗게 껍질이 일어난 입술이 다시금 달싹거렸다.

“다 꿈이고, 나도 없어져 버리면... 다시 못 보면 어떡해요...”

윤혜안의 눈가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관자놀이를 적시고 귓가로 미끄러지는 눈물을 바라보면서, 이해성의 손은 이제 거의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약속, 못 지켜서... 아저씨 온다고 했는데... 내가, 기다리지 않아서... 잘못했어요.”

서럽게 흐느끼는 환자의 눈꺼풀 위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가려주었다. 울음소리를 들은 수행원이 병실과 거실 사이, 열어둔 폴딩 도어 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해성은 그에게 손짓으로 조명의 조도를 낮출 것을 지시했다.

의사는 아마도 환자가 내일 아침까지는 잠들어 있을 거라고 일러줬었다. 지금 이렇게 깨어나 떠드는 것은 잠의 연장선, 꿈의 연장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윤혜안이 이해성을 ‘아저씨’라고 부를 근거는 없었다. 윤혜안과 이해성이 어떤 ‘약속’을 한 적도 물론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지키지 못했음을 사과할 수 있는 약속.

떠오르는 것은 사망 전, 최홍서와 전화로 했던 약속뿐이었다.

윤혜안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것들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면서, 왜...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기다리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말을 왜, 네가...

이해성의 손바닥이 눈물로 축축해지고, 환자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든 후, 병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해성의 내면은 결코 고요해질 수가 없었다. 창밖에서는 부슬비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생일 파티를 위해 모두 모여있는 곳이라면서 용재가 데려간 장소는 얄궂게도, 이해성과 두 번째로 만났던 회원제 클럽이었다.

어느 재벌 3세의 승진 기념 파티에 ‘레이어드’가 게스트로 초청되었었고, 그날의 주인공과 최홍서의 접대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예기치 않게 이해성이 나타났었다. 접대는 취소되었고, 최홍서는 이해성과 함께 클럽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해성을 뒤따라 올라갔었던 계단을 거꾸로 내려가면서, 최홍서는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회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형 생일파티 준비 중이라고 했더니, 감독님이 여길 빌릴 수 있게 해주셨대요.”

모처럼 편한 차림에서 벗어나 멋을 부린 용재는 주인공인 최홍서보다 훨씬 들떠 있었다.

“강 감독님이?”

강우현 감독이라면 이런 클럽의 회원이거나, 혹은 회원을 가까운 지인으로 두고 있을 만하긴 했다.

“그렇다니까요? 형 깨어나고 첫 번째 생일이니까 당연히 축하해야 한다면서 애써 주셨대요.”

“그냥 밥 한 끼 같이 먹는 거 아니었어? 너랑 나랑 동하랑.”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면서 최홍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에 의하면 이 클럽의 규모는 셋이서 밥을 먹기에는 아주아주 지나치게 큰 편이었다.

“에이, 그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죠. 축하는 많이 받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씩 웃어 보인 용재는 굳게 닫힌 출입문 앞에서 직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용재의 이름이 게스트 리스트에 있는지 대조하고, ‘윤혜안’의 얼굴을 확인한 직원들은 정중한 태도로 육중한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역시나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직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조명이 번쩍거리거나 귀청이 터질 듯한 음악이 흐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다들 준비된 술을 마시며 어느 정도 흥이 오른 분위기였다.

주인공의 등장에 곧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환호 속에서 어색하게 거듭 인사를 하는 최홍서에게로 박동하가 다가왔다.

“형! 생일 축하해! 오... 이렇게 차려입고 있으니까 내가 알던 그 윤혜안 같은데?”

좋은 곳에 갈 거니까 대충 입으면 안 된다고, 용재가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박동하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박동하야말로 다소 수수하게 보였던 평소와 다르게 패셔너블한 차림이었다.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만진 모습은 역시 아이돌 출신이구나 싶게 화려하고 생기가 있었다.

【아이돌 모드일 때 홍서 씨 너무... 팬이에요.】

인터뷰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내줬을 때, 이해성이 메신저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돌이기 때문에 자신을 좋아했던 게 아닌 걸 알면서도, 한눈에 봐도 아이돌다운 박동하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그가 이런 자리에, 윤혜안의 생일 파티에 나타날 리가 없으니 매우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가까운 사람들끼리 축하하자며.”

“여기 모인 사람들 다 형이랑 가까웠던 사람들이야. 깨어나고 나서 사람들한테 연락도 안 돌렸었다며? 하여간 정 없긴... 연락하니까 다들 형 근황 궁금해하면서 흔쾌히 오겠다더라.”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괜히 미안하잖아.”

“형 기억 못 하는 거 다들 알아. 다 이해해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 감독님이랑 감독님 손님들도 와 계시니까 그쪽에 먼저 가서 인사드리자.”

박동하는 무대 앞쪽의 테이블로 최홍서의 등을 떠밀었다. 걸어가는 동안, 이곳저곳에서 ‘윤혜안’을 알아본 사람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왔다. 최홍서도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는 연예인이나 모델들이 여럿 섞여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최홍서와 친분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최홍서와 윤혜안은 쉽게 말해 노는 물이 서로 다른 부류였으니까.

혹시나 강 감독의 테이블에 이해성이 와 있는 건 아닐까 조금 긴장했었지만, 역시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심을 한 건지 실망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런 화려한 파티를 좋아하는 강 감독은 자신의 지인들을 여럿 데려와 시끌벅적하게 즐기고 있었다. <크림 맨션>의 제작사 대표와 총괄 PD도 강 감독의 테이블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쁘신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장소도 감독님께서 애써 주셨다고 들었어요.”

“우리 황지우의 생일인데 내가 이 정도는 해야지. 이 부사장도 아마 알고는 있을 건데, 워낙 이런 데 싫어하는 사람이라 올지 모르겠네?”

강 감독이 지나가듯 꺼낸 말에 최홍서는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그가 윤혜안을 싫어하고, 요란한 파티를 싫어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이곳에 그가 나타났을 때도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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