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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79화 (79/185)

79화

그는 강우현 감독과 제작사 대표, 총괄 PD 등과 한 테이블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도 다들 목소리를 죽여가며 조금 전의 상황에 대해 수군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뭐야... 서준영 선배 말대로 진짜 최홍서 스폰서였던 거야?”

박동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박동하는 가장 멀리 떨어진 테이블의 이해성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준영 선배가 그렇게 말했을 땐 안 믿었는데, 오늘 보니까 빼박 아니야? 그게 아니고서야 솔직히 저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잖아.”

최홍서가 맞장구라도 쳐주기를 바랐는지 몰라도, 그를 스폰서라고 얘기하는 박동하에게 순간 화가 치밀었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자글자글 주름이 지도록 냅킨을 비틀어가면서,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무슨 근거로 스폰서래.”

대신 김이정의 기막혀하는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벌하고 연예인이 만났다고 하면 바로 스폰 관계부터 떠올리는 거, 좀 아니지 않아요?”

“아... 그게, 전 김이정 배우님 얘기를 한 게 아니라...”

박동하는 쩔쩔매면서 변명하기 바빴다. 하지만 김이정은 좀처럼 표정을 풀지 않았다.

“한쪽이 재산 많고 권력 있으면 무조건 그런 관계로 보는 거 맞는데요 뭐. 그럼 돈 때문에 만나는 거라는 의심 안 받으려면 부모님 재산, 각자 연봉 다 따져서 나랑 똑같은 사람만 만나야겠네?”

김이정이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상처를 건드리면 누구든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지금의 최홍서에게는 이유를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더 이상 둘의 대화가 들리지도 않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지난번에도 용재가 올 때까지 버텼으니까. 조용한 곳에서 한숨 돌리면 소란 피우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은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야.

영화가 시작되려는지 드디어 조명이 어두워졌다. 이내 스크린에서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이 재생되었다. 최홍서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박동하와 김이정이 올려다봤지만 어두워진 덕에 표정은 대강 숨길 수 있었다.

손님들의 식사를 돕기 위해 배치되어 있던 고용인에게 다가가 화장실의 위치를 물었다. 다행히 옥상에도 화장실이 갖춰져 있었다.

화장실 문을 잠그자마자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변기를 붙들고 얼마 먹지 않은 음식을 쏟아냈다. 바닥이, 벽이, 천장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온몸의 모공이란 모공이 땀을 쥐어 짜내는 것만 같았다.

‘최홍서 씨가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모호한 표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기도 했다. 윤혜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그는 호들갑스러울 것도, 그렇다고 조심스러울 것도 없이, 최홍서의 의미를 그렇게 정의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만날 수가 없게 됐죠. 만날 수 없게 된 과정과 원인도 나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고, 가슴이 아픈 일들뿐이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소중한 사람을 그런 과정과 원인으로 인해 잃어버린다면, 누군들 예민해지지 않을까? 누군들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회복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할까?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회복된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오더라도 과연 그것이 진정한 회복이 될 수 있을까?

당시에는 그것이 내 앞에 놓인 유일한 결정 같았다.

희망이 있다고, 버틸 수 있다고, 오랫동안 스스로를 속이며 미루어왔을 뿐, 한계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깨달았었다. 그동안 내 발은 허공을 디디고 있었을 뿐임을.

그래서... 전부 놓아버리고 싶었다. 내가 놓아버리기만 하면, 끔찍했던 과거와 미래에 벌어질 또한 끔찍한 일들까지도 전부 사라져버리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패닉 상태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내가 퇴장한 자리에서,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나의 부재까지 끌어안고 고통받고 있었다. 그것을 똑똑히 보라고, 나는 이 세상에 다시 불려온 것이다.

최홍서가 사라진 세상에서 아직 최홍서를 놓지 못한 이해성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영혼으로 이승을 떠돌면서 그의 고통을 모조리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 같은 게 아니다. 영혼만 이승을 떠돌고 있는 것이 맞다.

그에게는 최홍서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이 비현실적인 경험은 분명하게도 형벌이고 징벌이었다.

맑은 액체까지 게워낸 최홍서는 세면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겨우 일어나 찬물을 틀어 얼굴에 끼얹었다. 퍼붓듯이 끼얹었다. 그런데도 소용이 없었다. 저항할 수 없이, 의식이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누군가 몸속에 손을 푹 찔러 넣어 육체를 지탱해 주는 심을 확 뽑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목부터 꺾어지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뺨을 대고 누워서 최홍서는 희미하게 깨달았다.

최홍서였던 시절의 기억과 감정을 지나치게 강렬히 떠올리면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건가? 봉안당에서, 강 감독님의 응접실에서, 그리고 오늘... 그래서 그랬던 건가?

의식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윤혜안으로 깨어나 그를 볼 수 있었던 이 순간이 다 사라져버릴까 봐. 혹은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까 봐. 목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이 시공간을 떠돌던 상태로 돌아가게 될까 봐.

어떻게든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부릅떴던 눈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르륵 감기는 순간에 진심으로 바랐다.

더한 벌을 받아도 좋으니, 이곳에, 그를 볼 수 있는 곳에 남게 해달라고.

병실에는 공기청정기가 가동되는 작은 소음뿐이었다. 창밖에는 짙은 어둠 속에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실과 병실이 분리된 구조도 그렇지만, 사용된 가구나 조명들도 병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안락하게, 호텔 객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고용인을 동반해 VIP와 보호자들의 입맛에 맞는 식사를 따로 준비할 수 있도록 거실 옆으로는 주방도 마련되어 있었다.

19층 VIP 병동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 일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비 소식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야외 행사를 계획했던 거고.

창밖이 어두운 만큼 유리창은 불이 밝혀진 병실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등 뒤, 병상에 누운 환자를 바라보던 이해성은 흠... 무거운 한숨을 흘리며 뒤를 돌았다.

병상 가까이에 놓아둔 의자로 돌아간 이해성은 눈을 감은 환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환자는 해열제를 맞고 잠들어 있었다. 열 때문에 탈수 증세가 있어 손등을 통해 수액을 주입 중이었다.

그런데도 땀은 여전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관자놀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겹쳐 꼰 다리와 가슴 앞을 단단히 막은 팔짱은 눈앞의 남자에게 여전히 배타적인 이해성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일까.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구급차에 이 남자만 태워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지 못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영화 관람이 한창 진행되던 중, 박동하와 김이정, 윤혜안... 가장 나이가 어린 배우들이 모인 테이블을 중심으로 술렁거림이 일어났었다. 윤혜안이 화장실에 간 지 30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아서 찾아가 보니 문이 안쪽에서 잠겨 있고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행사는 즉시 중단되었다.

윤혜안이 앉아있었던 의자 위에는 냅킨만 놓여 있었다. 어찌나 쥐어짰는지, 냅킨은 자글자글 주름투성이였다.

이해성은 손님들이 테이블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고용인에게 문을 열도록 지시했다.

맨바닥에 모로 쓰러져있는 윤혜안을 발견한 순간, 이해성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강 실장의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던 갖가지 만행들이 아니었다.

‘부사장님께 나쁜 말은 절대 안 해요.’

최홍서가 해주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하던, 단호하고 야무진 표정. 그것만이 가득했었다.

다른 손님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윤혜안을 조용히 아래층으로 옮기게 한 뒤, 이해성은 바로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건장한 수행원에게 업혀 축 늘어진 윤혜안은 그 주변에만 가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

‘구급차를 기다리기보다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강 실장이었는지, 아니면 윤혜안을 업고 있던 수행원이었는지... 누군가의 보고에 이해성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대로 지하 주차장까지 동행했었다.

시트를 뒤로 젖히고 환자를 거의 눕히듯 앉게 한 뒤 안전벨트를 채우는 동안, 이해성은 SUV 차량의 열린 뒷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부사장님, 비켜 주셔야 출발할 수 있습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이해성은 뒤로 물러서는 대신 차에 올라탔었다. 어떤 사고 과정을 거친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VIP 병동을 준비하도록 병원에 연락을 지시했고, 환자는 응급실을 거치지 않고 곧장 19층으로 옮겨져 VIP 병동 담당의에 의해 바로 조치가 취해졌다.

다시 돌아와 상세히 보고하겠다던 담당의가 30분째 소식이 없었다. 거실에서 대기 중인 수행원에게 상황을 좀 알아보라고 해볼까 하는 중에 담당의가 병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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