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지금까지 윤혜안으로서 몇 번이나 같은 공간에서 그의 곁을 스칠 기회가 있었지만, 그에게서 향수 냄새가 풍긴 건 처음이었다.
‘공적인 자리에 나갈 때는 향수를 안 쓰는데, 홍서 만날 때만 가끔 뿌렸지. 잘 보이려고. 홍서 위해서.’
첫 잠자리 후, 함께 욕조에 몸을 담그고 그는 그렇게 말해줬었다. 널 위해서라고, 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그 속삭임이 최홍서에게는 향수의 향기보다 더 아찔했었다.
그럼, 이번에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향수를 뿌린 건 아닐까.
향수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어서, 박동하와 얘기하는 모습만 봐도 입이 말랐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집을 자세히 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멋대로 안도하고, 잘 뿌리지 않던 향수를 뿌린 이유가 무엇일지 애를 태운다.
질투할 자격도 없는 게.
약간의 음식과 물만 섭취하고 있었던 최홍서는 자기 몫의 와인에 처음으로 손을 댔다. 와인을 마시기 위해 턱을 약간 들었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어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던 척 얼버무리지 않았으니까. 눈이 마주친 후에도 계속 시선을 맞추고 있었기에 착각일 리가 없었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최홍서였다.
그가 박동하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무슨 얘기라도 들은 걸까. 그래서 날 보는 건가.
불안으로 가슴이 술렁거려 와인을 한 번에 조금 많이 마셔버렸다.
최홍서는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어색하게 김이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동갑은 우리뿐이고, 현장에 대부분 선배님들이잖아요. 소문이 어떻든, 지금 나한텐 연기파 대선배님들보다는 혜안 씨가 편하게 느껴지거든요. 절친이 되자는 것까진 아니어도, 촬영하는 동안 잘 지내봐요.”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혜안 씨가 내 뺨 때리면 난 두 대, 세 대 때릴 거예요.”
진지하게 엄포를 놓으며 그녀는 건배를 제안했다. 최홍서는 희미하게나마 웃으면서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윤혜안과 가깝게 지냈었다는 박동하보다, 이상하게도 김이정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거침없는 말투를 무례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았지만, 적어도 그녀는 앞뒤가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싫으면 면전에서 싫다고 하지, 뒤에서 욕을 하고 소문을 만들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그게 좋았다.
그때, 배경에 흐르고 있었던 경쾌한 음악의 볼륨이 서서히 낮아졌다. 무언가 시작되려는지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접시에 고기를 올리고도 그릴 앞을 서성거리고 있던 박동하가 아쉬운 표정으로 테이블에 돌아오고 있었다.
바비큐 장비를 손에서 내려놓은 이해성이 커다란 스크린 앞으로 이동했다. 그는 격식을 너무 차리지 않은 편안한 태도로 와인 잔을 쥐고 손님들 앞에 섰다.
“어... 이렇게 너무 주목하시지 않아도 되는데. 식사하시면서 편하게 들어주세요.”
그는 먼저 가벼운 농담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먼저 설명드려야 할 것 같네요.”
테이블마다 웃음이 일었고, 이해성 역시 미소를 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최홍서 군을 추모하는 글귀를 삽입하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한순간 침묵이 감돌았고, 이후 곧 술렁거렸다. 곧바로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 단순히 의외의 발언이라 어리둥절해하는 사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식사에 집중한 사람 등등... 제각각의 반응들이었다.
최홍서는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무릎 위에서 냅킨을 꽉 움켰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최홍서 하나뿐이었다.
손님들의 분위기를 짧게 한번 살핀 이해성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갔다.
“감독님과는 상의가 되었는데, 그래도 여기 계신 분들께는 사전에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듯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최홍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심장이 귓가에서 뛰고 있었다. 세상에 없는 자신을 지금까지도 저렇게 귀하게 여기는 이해성을 바라보기조차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냅킨을 더 강하게 비틀어 쥐었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그만큼 울렁거림이 강해졌다.
잠시 어수선하던 중에, 누군가 심각하고 불만스러운 어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촬영을 진행했던 배우라면 몰라도... 한 씬도 함께 촬영하지 않은 배우를 위해 영화의 일부를 할애하는 건 지나치지 않나요?”
몇 명인가 소심하게 그 목소리 주인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중에는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서준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송지석 씨.”
상대를 부르는 이해성의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영화 투자를 오래 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투자 경력에 비해 영화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신 것 같네요.”
“......”
“한 씬도 함께 찍지 않은 배우이기 때문에 지나치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는 영화 제작의 일부가 아닙니까? 오직 촬영만이 영화 제작의 전부인가요?”
불쾌함을 폭발시키지 않으려 억제하면서도, 불쾌하다는 그 사실만큼은 그는 정확히 표시하고 있었다.
<크림 맨션>의 투자자 중 한 명인 듯한 상대도 움츠러들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
“지난번에 부사장님께서 최홍서 군에 대해 하신 말씀 잘 들었고, 그 내용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투자자들에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사업이에요. 진실이 어떻든, 최홍서 군을 불명예스럽게 기억하는 대중이 압도적인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굳이 영화에 그런 추모 글귀를 넣어서 입방아에 오르내릴 건수를 제공할 필요가 있을까요?”
투자자의 목소리도 뒤로 갈수록 점점 경직되었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사람은 최홍서뿐으로, 대부분은 이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 불명예스러운 기억을 쇄신해 보려는 의도인데. 제 설명이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부사장님께서는 강 감독님 영화에 대한 존경만으로 손실을 각오하고 투자하신 걸지도 모르지만, 저 같은 투자자에게는 수익을 내야 하는 사업입니다. 저는 <크림 맨션>이 대중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흥행을 거둘 거라 판단했기 때문에 투자를 결정했어요. 솔직히... 부사장님께서 최대 투자자로서 월권을 행사하신다는 생각이 드네요.”
“월권이요.”
투자자의 말을 되짚으면서 이해성이 유쾌한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었다.
최홍서는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킨 끝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해성이 근처의 테이블에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투자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송지석 씨, 백종훈 감독님 영화에 투자하셨었죠?”
“......”
“이미 입봉 후에 서너 작품 디렉팅해 보셨고 나름의 흥행작도 가진 감독님이셨는데, 송지석 씨는 당시에 감독님을 어느 정도나 존중해 주셨을까요? 캐스팅은 물론이고, 촬영 도중에 시나리오 수정을 요구해 감독님과 스태프들, 배우들 전부 고생시키시더니, 나중에는 편집에까지 배 놔라 감 놔라 하셨다고 들어서요.”
사람들의 시선이 투자자를 향했고, 이해성은 언성을 높이지 않는 특유의 차분한 어투로 상대를 계속해서 코너로 몰아가며 압박했다.
“영화의 실제 주인은 투자자라고, 씁쓸하지만 자본주의의 원리가 다 그런 게 아니겠냐고. 송지석 씨가 감독님께 그렇게 말했다고 하던데. 그래서 전 송지석 씨가 최대 투자자의 이 정도 결정을 이해 못 하시리라고는... 정말 짐작도 못 했네요.”
투자자의 좌석으로 천천히 걸어간 그는 테이블 가장자리를 짚고 허리를 숙여 투자자와 눈을 맞췄다. 미소가 감도는 이해성의 눈빛에는 옅은 광기마저 스며 있었다.
“송지석 씨, 처음부터 저는 여러분께 미리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자리라고 했지, 동의를 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씁쓸하지만, 자본주의 원리가 저에게 그 정도 권한은 부여했으니 동의가 불필요해서요.”
그제야 투자자는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꽉 다물린 입술과 파르르 떨리는 눈가가 분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더는 대적할 만한 말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최홍서로 살아있었을 때, 조 사장의 입을 다물게 하는 이해성의 언변을 보면서 몇 번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오직 권력으로만 상대의 입을 막으려 하는 부류가 아니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하는 그의 솜씨에는 반박할 수 없는 근거와 논리가 배경에 깔려 있었다. 권력이 다는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이전보다 훨씬 예민해져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최홍서와 관련된 일만 되면 아주 약간의 잡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순식간에 차가워지고 무서워졌다. ‘윤혜안’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내가 그를 저렇게 만든 것이다. 내 죽음이 그의 상처가 되었으니까. 상처를 건드리면 누구든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없게 되는 거니까. 점점 더 빠르게 뛰는 심장과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최홍서의 떨리는 두 눈은 이해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허리를 일으킨 그가 자신의 와인 잔을 내려둔 곳으로 다시 걸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최홍서 씨는 시나리오와 캐릭터 연구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의상 제작팀과도 활발히 소통하며 의견을 제시했었죠. 최홍서 씨는 프리 프로덕션 전 과정에 열심이었습니다.”
잔을 쥔 그는 남아있는 술을 단번에 모두 비워냈다.
“한 씬도 촬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영화와 무관한 배우인 게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던 영화를 단 한 씬도 촬영해 보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으니 더 안타까운 동료 배우 아닙니까?”
손님들을 고루 둘러보면서, 그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는 듯했다. 약간은 침착해진 음성이 뒤를 이었다.
“최대 투자자로서 제가 감독님이나 제작사에 어떠한 압력을 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원치 않는 캐스팅이나 전개가 있더라도, 영화는 기본적으로 감독의 의도대로 제작되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천천히 손님들 사이를 부유하던 이해성의 시선이 최홍서에게서, 윤혜안에게서 뚝 멈췄다.
그의 눈빛이 숨통을 움켜쥔 손아귀라도 되는 것처럼, 최홍서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눈을 맞춘 채 이해성은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 문제에는 아닙니다.”
“......”
“앞으로 최홍서 씨와 관련된 문제에는 모두들 왈가왈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외 영화 제작과 관련해서는 스태프분들이든 배우분들이든 불편함 없으시도록 전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최홍서를 건드리지 말라고. 만약 경고를 무시한다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그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전의 식사 자리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었다. 더불어 그것은 윤혜안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벗어난 후에야, 최홍서는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버틸만한 뱃멀미였는데, 이제는 바닥과 테이블이 녹아내리듯 휘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이상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더는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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